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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학기 반장 Mar 19. 2024

죽음의 수용소에서 삶의 의미를 찾은 사람

빅터 프랭클, <죽음의 수용소에서>


우리 부부는 신혼 때 버킷 리스트였던 '해외에서 한 달 살기'를 했다. 주로 독일에서 많은 시간을 보냈다. 히틀러가 최초로 세운 나치 강제수용소에도 다녀왔다. 갈비뼈가 살 밖으로 튀어나올 것만 같은 몰골, 좁은 침대에 멸치 떼처럼 포개진 모습, 산 자는 가스실로 향하고 죽은 자는 소각실로 향하는 운명 등 수감자들 사진이 다하우 수용소 곳곳에 걸려있었다.


그곳에서 매일 죽음과 직면하며 처절하게 살아남은 수감자가 있다. 그보다 더 깊이 삶의 무게를 말할 자가 있을까? 빅터 프랭클은 저서 <죽음의 수용소에서>에서 홀로코스트의 잔혹한 참상을 생생히 그려낸다. 죽음의 현장에서 생사를 넘나들며 벌거벗은 실존을 담아낸 이 책은 100명이 넘는 이 시대의 현자들이 입을 모아 인생을 바꾼 책으로 꼽을 정도로 반향을 일으켰다.


몸에 난 털조차도 소유하지 못하는 맨 몸뚱어리로 빅터 프랭클은 수용소에서 부모와 형제, 아내를 모두 잃는다. 그는 완벽한 상실감으로 굶주림과 추위, 혐오와 모멸감을 느낀다. 절망의 나락으로 떨어졌지만, 그는 결국 살아남았고 인간 존엄성의 승리를 보여주었다. 이것이 어떻게 가능했을까?



왜 살아야 하는지 아는 사람은 그 어떤 상황도 견딜 수 있다.
- 독일의 철학자, 프리드리히 니체


빅터 프랭클은 니체의 말을 인용해 삶에는 살아야 할 이유가 있어야 한다고 역설한다. 수용소에서 인생에 더 이상 기대할 것이 없다고 말한 수감자들은 하나같이 모두 파멸해 버렸기 때문이다. 그는 우리가 삶에 무엇을 기대하는가에서 벗어나 삶이 우리에게 무엇을 기대하는가에 초점을 맞추라고 강조한다. 그때 우리는 삶이 던지는 과제에 책임을 지고 올바른 행동과 태도로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이다.


삶이 내게 무엇을 기대할까? 서른 넘어 어느 날 찾아온 의문이 심장을 후벼 팠다. 어느 날 갑자기 엄마가 떠나버렸다. 암이라는 한 글자가 엄마의 60년 인생을 6개월 만에 중단시켰다. 아들 하나만 바라보고 평생 희생하며 살아온 엄마를 그렇게 허무하게 보냈다. 시간이 흘러 알게 되었다. 그동안 내 머릿속에는 온통 엄마가 나에게 무엇을 기대할까로 가득 차 있었다.



그제야 삶이 내게 어떤 질문을 던지는지 귀 기울이기 시작했다. '누군가의 나'가 아닌 '그대로의 나'에게 치열하게 집중했다. 시련 속에서 삶이 이끌고 온 나의 시간을 돌아보았다. 결손 가정에서 고통으로 몸부림치며 빚어낸 내 삶의 진주는 '소통'이었다. 소통의 부재로 냉랭했던 가정을 경험한 내가 세상에 온기를 불어넣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을 찾고 싶었다. 그것이 바로 삶이 내게 기대하고 있는 것이었다.


삶이 내게 물었고, 내가 삶에 답했다. 그 과정에서 내 삶이 누군가에게 작은 위로와 용기가 된다는 것을 발견했다. 누구에게나 주어지는 삶이라는 시간의 보편성 위에 오직 나만이 담아낼 수 있는 경험의 특수성이 더해지니 이야기가 되었고 콘텐츠가 되었다. '따듯한 말과 글로 공감하며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사람'으로 사는 것. 마침내 삶이 내게 던진 과제를 한마디로 정리할 수 있었다.


"만약 어떤 사람이 시련을 겪는 것이 자기 운명이라는 것을 알았다면, 그는 그 시련을 자신의 과제, 다른 것과 구별되는 자신만의 유일한 과제로 받아들여야 한다. 시련을 당하는 중에도 자신이 이 세상에서 유일한 단 한 사람이라는 사실에 감사해야 한다. 어느 누구도 그를 시련으로부터 구해낼 수 없고, 대신 고통을 짊어질 수도 없다. 그가 자신의 짐을 짊어지는 방식을 결정하는 것은 그에게만 주어진 독자적인 기회이다."

- 빅터 프랭클, <죽음의 수용소에서>, 청아출판사, 125쪽


혹시 사는 게 힘들어 죽겠다고, 인생에 기대할 것이 없다고 낙심하고 있는가? 빅터 프랭클은 시련이야말로 유일한 과제이자 독자적인 기회라고 정의한다. 그는 수용소에서 어떤 이는 성자처럼, 또 어떤 이는 돼지처럼 행동하는 것을 보며 한 가지 사실을 깨닫는다. 인간은 극한의 고통 속에서도 철저히 자기 의지로 어떤 삶을 살 것인지 선택할 수 있다는 것이다.


유일무이한 존재인 나의 선택이 우주에서 단 하나뿐인 스토리가 된다. 빅터 프랭클은 "나를 죽이지 못한 것은 나를 더욱 강하게 만들 것이다."라는 니체의 말을 또 한 번 인용하며 이렇게 말한다. "그대의 경험, 이 세상 어떤 권력자도 빼앗지 못하리!" 또한 그는 극한의 시련 속에서 '인간이 추구해야 할 궁극적이고 가장 숭고한 목표는 사랑'이라고 고백했다. 그는 아내의 생사 확인이 안 되는 상황에서도 의연했다.


"이 세상 그 어느 것도 내 사랑의 굳건함, 내 생각, 사랑하는 사람의 영상을 방해할 수는 없었다. 사실 그때 아내가 죽었다는 것을 알았더라도 나는 전혀 개의치 않고 아내의 모습을 떠올리는 일에 나 자신을 바쳤을 것이다. 나와 그녀가 나누는 정신적 대화 역시 아주 생생하고 만족스러웠을 것이다."

- 빅터 프랭클, <죽음의 수용소에서>, 청아출판사, 71쪽


현재 나는 엄마를 육신적으로 만날 수는 없지만, 정신적으로는 가능하다. 아버지는 평생 엄마를 원망하고 욕했지만, 그 무엇도 엄마를 향한 나의 사랑을 훼방할 수는 없다. 진정한 사랑은 육신을 초월하는 법이다. 엄마의 죽음을 통해 나는 비로소 삶을 사랑하게 되었다.


어린아이는 하루에 400번 큰소리로 웃지만, 성인은 겨우 7번 웃는다고 한다. 유치원생 아이들 앞에서 나는 세계 최고의 개그맨 아빠가 된다. 별거 아닌 행동과 표정에도 아이들은 깔깔대며 웃는다. 해맑다는 말이 딱 어울리는 미소 천사 그 자체다. 심지어 울다가도 나의 작은 몸짓에 반응하며 눈은 우는데 입은 웃는 묘한 표정을 짓기도 한다.


아이가 이렇게 웃을 수 있는 이유는 현재에 충실하기 때문이다. 지금의 삶을 사랑하는 것이다. 과거를 후회하고 미래를 염려하느라 웃지 못하는 어른과는 다르다. 절망뿐인 나치 강제수용소에서도 살아남은 이들이 있다. 현재의 삶이 어떤 모습이든 그들에게는 확고한 삶의 이유와 의미가 있었다. 사랑하는 그 무엇이 있었기 때문이다.


현재 나의 삶은 무엇으로 가득한가? 우리는 원래 하루에 400번 큰소리로 웃던 사랑스러운 존재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 이학기 반장의 저서 <서른, 진짜 나를 알아가기 시작했다> 중에서 일부 내용을 재구성한 글입니다.




[이학기 반장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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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 : 이학기 스쿨의 화요일 독서반
수 : 이학기 스쿨의 수요일 작가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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