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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학기 반장 Mar 12. 2024

외계인에게 지구인의 사랑을 배우다

김동식, <세상에서 가장 약한 요괴>


여섯 단어만으로 소설을 쓴다는 게 가능할까?


<노인과 바다>를 쓴 대문호 헤밍웨이에게 친구가 물었다. "여섯 단어만 갖고도 소설을 쓸 수 있겠어?" 헤밍웨이가 답했다. "한 번도 신지 않은 아기 신발 팝니다.(For sale :  Baby shoes. Never worn.)"


여섯 단어 소설을 통해 무엇이 느껴지는가? 집 없이 떠돌아다니는 한 여인이 있었다. 배가 점점 불러올수록 여인의 근심도 점점 커져갔다. 주머니를 탈탈 터니 동전 두 닢이 땡그랑 소리를 내며 바닥에 떨어졌다. 여인은 전 재산과 맞바꾼 분홍색 아기 신발을 보고 또 보며 미소 지었다. 마침내 진통이 시작됐고 여인은 허리가 끊어질듯한 고통을 느끼며 아이를 낳았다. 유난히도 추운 어느 겨울날, 한참을 기다려도 아기는 눈을 뜨지 않았다.


여섯 단어 소설을 보며 떠오르는 대로 여섯 문장 소설을 써보았다. 여인은 겨우내 얼었던 눈물이 녹아내리고 다시 얼어붙기를 여러 번 반복할 동안 새 신발을 간직했을 것이다. 여섯 단어 소설을 실제로 헤밍웨이가 썼는지는 분명하지 않다고 한다. 그러나 한 번도 신지 않은 아기 신발을 파는 여인의 고통을 단 여섯 단어에 담아낼 정도면 나는 분명 대문호가 쓴 게 확실하다고 생각한다.



이번에는 딱 여섯 문장으로 소설 한 편을 소개하겠다.


어느 날 집채만 한 외계인이 지구에 나타나 한 손으로 사람들을 움켜잡더니 다른 한 손으로 사람들의 머리를 하나씩 뜯어내며 말했다.
"푸르스마, 푸르스마나스, 푸르스마, 푸르스마나스..."
외계인은 대가리를 다듬은 콩나물처럼 머리만 떨어져 나간 사람들을 그대로 버려놓고 사라졌다.
이런 일이 반복되자 공포에 떨던 사람들은 수십 년간 머리를 맞댄 끝에 외계어 번역기를 만들어냈다.
마침내 외계인의 말을 번역기로 해석한 사람들은 그만 충격에 말을 잇지 못했다.
"사랑한다, 사랑하지 않는다, 사랑한다, 사랑하지 않는다..."


김동식 작가의 초단편 소설 <푸르스마, 푸르스마나스>를 읽으며 팔에 있는 털이란 털은 모두 콩나물 자라듯 일렬로 서는 것을 경험했다. 소름 돋는다는 게 진짜로 이런 거구나. 짝사랑의 경험이 있다면 다들 한 번쯤 꽃잎점을 쳐본 적이 있을 것이다. 물론 짝사랑에 빠진 자에게는 떨어져 나가는 꽃잎 하나에 생사가 오가는 심정이겠지만, 실제로 꽃잎의 개수와 사람의 감정이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꽃에게는 머리와 사지가 하나씩 떨어져 나가는 고통일 것이다. 자연에게 인간은 "푸르스마, 푸르스마나스"를 외치는 외계인이나 다름없다.


연애 예능 프로그램 '나는 솔로'를 보면 매 기수마다 빌런이 꼭 한 명씩은 있다. 자기감정에 빠져서 무작정 상대를 향해 액셀만 밟는 부류다. 상대가 부담을 느끼고 있는데도 열 번 찍어 안 넘어가는 나무 없다는 정신으로 계속 찍어대기만 한다. 결국 넘어가지 않는 나무에 열 군데 상처만 남기고 파국을 맞이한다. 사랑의 사전적 정의는 '어떤 사람이나 존재를 몹시 아끼고 귀중히 여기는 마음'이다. 사랑은 상대를 존중하는 것이지 자기감정에 집착하는 것이 아니다.


이기적인 사랑은 폭력이다. 우리나라 성인 절반이 '가스 라이팅'(타인의 심리나 상황을 교묘하게 조작해 지배력을 강화하는 행위)의 일종인 데이트 폭력을 경험했다고 한다. 더 심각한 것은 우리 사회에서 데이트 폭력은 친밀한 관계에서 발생하는 개인 문제로 인식하는 경향이 크다는 점이다. "사랑하는데 어떻게 이럴 수 있어?"라며 상대를 속박하는 행위는 사랑이 아니다. 데이트 폭력은 엄중히 다뤄야 할 사회적 문제이다.



문제가 이뿐이겠는가. 초개인화 사회에서 인간은 파편화되며 더 잘게 쪼개지고 있다. 개인의 자유와 선택이 중요해진 만큼 이기적 사랑의 폭력이 난무할 위험도 크다. 또한, 새로운 사랑의 형태도 등장할 것이다. 인공지능과의 사랑, 가상현실 속 파트너와의 관계 등 기존의 전통적인 사랑의 형태를 파괴하는 변화가 일어날 수 있다. 연결과 공감이 깨진 인간은 지구인을 점차 외계인으로 대할지도 모른다.


'약인공지능'인 AI 시대를 넘어 '강인공지능'인 AGI 시대가 오고 있다. 빅데이터 전문가 송길영 박사는 앞으로 '근근이 먹고사는 시대'가 온다고 했다. 고수익의 산업과 직종을 인공지능이 대체하면 우리는 저수익의 일을 이것저것 해가며 살 거라는 것이다. 그러면 앞으로 우리는 협동조합처럼 작은 마을 공동체를 만들어 연대해야만 생존이 가능하다는 말이 된다.


짝사랑에 병든 외계인의 잔혹함을 보며 인간을 향한 진정한 사랑의 가치를 배운다. 그것은 인간이 인간을 더 깊이 공감하고 존중하려는 노력이다. 나와 연결된 관계를 사랑하려고 발버둥 치는 것이다. 초개인화 사회, 인공지능 시대에"사랑한다"를 외치는 '호모 푸르스마'가 될 때 인간은 여전히 인간으로서 존재할 수 있다. 반대로 '호모 푸르스마나스'를 자처하는 인간에게는 떨어져 나간 콩나물 대가리와 꽃잎 같은 미래가 기다릴지도 모른다.

[이학기 반장 연재]

월 : 이학기 스쿨의 월요일 진로반
화 : 이학기 스쿨의 화요일 독서반
수 : 이학기 스쿨의 수요일 작가반
목 : 이학기 스쿨의 목요일 직장반
금 : 이학기 스쿨의 금요일 고민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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