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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학기 반장 Apr 09. 2024

존재하지 않는 존재의 존재감

손원평, <서른의 반격>


나의 첫 직장은 패션 유통 회사였다. 신입 사원 교육으로 코디 강의를 들을 때였다. 전날 과제로 밤을 새웠던 나는 무거운 눈꺼풀과 씨름하다 강사의 말에 눈이 번쩍 뜨였다. 색깔에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그중에는 ‘색깔이 없는 색깔’도 있다는 것이었다. 색깔은 색깔인데 색깔이 없는 색깔의 이상야릇한 정체는 무엇일까? 


바로 무채색이었다. 하얀색, 회색, 검은색을 분명 색이라고 부르지만, 색으로 취급하지 않는다. 만일 상의는 노란색과 하얀색, 하의는 파란색과 검은색으로 된 옷을 입으면 몇 가지 색으로 코디를 한 걸까? 무채색인 하얀색과 회색을 제외하고 파란색과 노란색만 색으로 인정하여 ‘2도 코디’라고 부른다. 분명 존재하지만 '존재하지 않는 존재'가 있는 것이다.


우리 주위에서도 존재하지 않는 존재를 발견할 수 있다. 출퇴근 길에 마주치는 인파 속에서 ‘왜 이리 사람이 많아!’라며 인상을 찌푸리는 사이에 수많은 개성은 그저 ‘사람’이라는 보통 명사에 묻혀버린다. 누군가에게는 특별한 존재가 나에게는 스쳐 지나가는 배경에 지나지 않는다. 나 역시 그중 하나일 뿐이다.

  




<서른의 반격>은 무채색으로 살아가는 보통사람의 이야기를 담담하게 풀어낸다. 1988년생 김지혜는 보통사람을 대변하는 소설 속 주인공이다. 흔한 이름만큼이나 평범한 지혜는 마라톤 행렬 속에 파묻혀 떠밀려가듯 서른이 된다. 지혜는 정직원 자리가 없다면 그 옆에 간이 의자라도 앉아서 기회를 엿볼 셈법으로 인턴이 된다.


꼰대인 김 부장과 일하며 지혜는 세대 갈등에 몸서리친다. 사수인 유 팀장을 통해서는 유리 천장과 경단녀 문제, 젠더 갈등을 실감하며 전율한다. 온몸으로 사회 구조의 모순들을 하나씩 맞닥뜨리며 지혜는 보통사람으로도 모자라 아무 목소리도 내지 못하는 ‘없는 사람’이 되어간다. 그때 동갑내기 규옥이 인턴으로 들어온다. 행동파 규옥은 무명의 시나리오 작가 무인, 인터넷 먹방을 하는 남은과 연대하여 지혜의 저항심리를 자극한다.      


억울함에 대해 뒷얘기만 하지 말고 뭐라도 해야죠. 내가 말하는 전복은 그런 겁니다. 내가 세상 전체는 못 바꾸더라도, 작은 부당함 하나에 일침을 놓을 수는 있다고 믿는 것. 그런 가치의 전복이요.

 

그렇게 작은 체 게바라들은 다소 장난스러운 반격을 단행한다. 상사 면전에서 할 수 없는 말을 쪽지에 적어서 붙여놓는다든지 국회의원에게 달걀을 던진다든지 하는 소심한 복수의 형태로 말이다. 애초에 반격은 거창한 것이 아니었지만, 시간이 지나며 밈이 되어 퍼지기도 했다.


하지만 이마저도 점점 시들해지다가 결국 작은 체 게바라들은 해산하기에 이른다. 책 제목처럼 서른의 ‘반격’을 기대하고 이 책을 펼친 나는 보통사람으로 시작해 특별한 사람을 꿈꾸다 다시 보통사람으로 끝나버린 스토리에 맥이 풀렸다. 진짜 반전은 따로 있었으니 저자가 밝힌 <서른의 반격>의 초고 제목이 사실은 <보통사람>이었다고 한다.     





이 책을 관통하는 보통이라는 단어의 의미를 곱씹어보았다. ‘보통’사람에서 보통‘사람’으로 귀결된 플롯에 진정한 울림이 있었다. 저자는 ‘보통’사람의 의미를 이렇게 풀어냈다. 

“나는 수많은 사람들이 참여한 마라톤 행렬 중 어딘가에 속해 있었다. 숨이 턱에 닿도록 뛰면서도 중간에 포기하지 않기만을 바라며, 어딘지도 알 수 없는 목적지를 향해 모두의 틈에 섞여 바쁘게 발을 옮기고 있을 뿐이었다. 그것이 특별히 슬프지 않다는 것이, 가끔은 담담히 미소를 지을 수도 있다는 것이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보통’사람이 용기를 냈지만, 한낱 소동으로 끝나버린 소심한 반격을 통해 지혜는 깨닫는다. 존재의 무게를 보통이라는 단어에 가볍게 담을 수 없다는 사실을. 마침내 지혜는 ‘보통’사람이 아닌 보통‘사람’으로서 자신의 존재 가치를 발견한다. 

“내가 우주 속의 먼지일지언정 그 먼지도 어딘가에 착지하는 순간 빛을 발하는 무지개가 될 수도 있다고 가끔씩 생각해 본다. 그렇게 하면, 굳이 내가 특별하다고, 다르다고 힘주어 소리치지 않아도 나는 세상에서 하나뿐인 존재가 된다. 그 생각을 얻기까지 꽤나 긴 시간과 노력이 필요했지만 조금 시시한 반전이 있다. 그렇게 애쓰지 않아도, 애초에 그건 언제나 사실이었다는 거다.” 





나의 서른은 평범하게 살기 싫은 이상과 평범하게 사는 현실의 괴리를 실감한 시기였다. 심지어 평범하게 살지도 못할까 봐 두려워 끊임없이 ‘반격’을 꿈꾸기도 했었다. 서른은 자기 존재를 현실 속에서 자각하게 되는 시기이다. 서른에는 뭐라도 되어 있을 줄 알았는데 녹록지 않은 현실 앞에 자신의 존재는 초라하게만 느껴진다.     


그러나 존재는 문제보다 크다. 수많은 별이 따로 또 같이 빛나며 광활한 우주를 수놓는 것처럼 ‘보통’이라는 사회적 정의에 매몰되지 않고 나만의 빛을 발할 때 우리는 유일한 존재가 된다. ‘보통’사람이 아닌 보통‘사람’이 되는 것. 존재의 가치를 재발견하는 기회가 서른에 깃들어있다.     


무채색은 그 자체로는 튀지 않지만, 어느 색깔에나 다 잘 어울린다. 무채색의 아름다움은 특별함이 아닌 뽐내지 않는 평범함에 있다. 그렇기에 무채색에서는 되바라지지 않은 품격이 느껴진다. 물질 만능주의는 존재를 무기력한 소유로 치환하고 전체주의는 개성과 주체성을 말살한다. 이 세상 속에서 보통의 사람으로 존재하는 것. 그 자체가 세상을 향한 반격이 아닐까.




[이학기 반장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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