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사와 감사 사이, 글멍에서 별멍으로

feat. 편성준 <나를 살린 문장, 내가 살린 문장>

[간사와 감사 사이, 글멍에서 별멍으로]

2014년 10월 27일, 서울 시청 앞 광장에서 이색 대회가 열렸다. 보통 대회라고 하면 치열한 경쟁 끝에 우승을 쟁취하는 그림을 떠올리기 마련이다. 그런데 이 대회는 달랐다. 90분 동안 아무것도 하지 않는 '멍 때리기'였기 때문이다. 심박측정과 시민 투표를 합산한 결과, 가장 치열하게 아무것도 하지 않은 9살 초등학생이 우승을 차지했다.

멍 때리기 대회는 단 1초도 낭비하지 않으려는 바쁜 도시의 중심에서 낭비의 가치를 침묵으로 외친 기념비적인 행사였다. 그 후로 각종 멍 때리기 신드롬이 일어났다. 대표적인 불멍을 시작으로 물멍과 숲멍, 비멍과 소리멍, 구름멍과 별멍에 이르기까지, 초점이 풀린 '동태눈깔'이 어느덧 현대인의 뇌를 쉬게 하는 '힙한 눈빛'으로 격상되었다.

원시시대에는 남자들이 하루 종일 사냥하며 지친 몸을 불멍으로 달랬다고 한다. 그래서 남편들이 회사에서 전쟁을 치르고 퇴근 후 TV 앞에서 멍 때리는 거라는 말도 있다. 생존을 위한 목숨 건 사투에 경직됐던 세포들이 사르르 녹는 시간인 것이다. 남편들이 화장실에만 들어가면 함흥차사가 되는 것도 비슷한 이유가 아닐까. (이건 '똥멍'이라고 칭해야 하나?)



지난해 아내와는 특별한 친구로서 각자의 방향으로 새로운 동행을 시작했다. 나는 SNS를 모두 끊고 강원도 홍천의 해발 800m 산촌에서 자연인으로 살며 다양한 육체노동을 했다. 최저 시급을 받으며 밭에서 농사를 지었고, 육가공 회사에서 배송을 하다가 허리 디스크가 터지기도 했다.

처음엔 육체적으로 훨씬 더 힘든 일을 하는데, 왜 월급은 사무직으로 일할 때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초라한지 의문이었다. 하지만 육체노동은 잡생각을 잊게 해 주었고, 퇴근하면 머릿속이 상쾌해졌다. 그때 '돈은 스트레스에 비례해서 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파리만 날리는 이달과 다르게 지난달은 고객이 몰아쳤다. 지난해 10월에 '책 쓰는 중고차 딜러'가 된 이후로 처음 있는 일이었다. 역시나 돈을 버는 만큼 스트레스가 쌓였다. 김현중이란 사람은 그대로인데, 직업이 중고차 딜러라는 이유로 나를 하대하는 고객도 겪어야 했다. 일면식도 없는 고객이면 그러려니 하겠지만, 태도가 돌변한 지인을 대할 때는 가슴이 멍해졌다. 또한, 가장 높은 수익을 안겨줬던 차에서 가장 큰 문제가 생기며 가장 쓰라린 손실을 겪기도 했다.



감사한 동시에 간사한 생각이 올라왔다. 아, 좀 쉬고 싶다. 나는 아주 잠깐만 쉬면 되었는데, 이달 내내 이렇게 쉴 줄은 몰랐다. 간사함 대신 감사함을 더 많이 채워가야겠다고 느꼈다. 쉬면서 우연히 들린 집 근처 양평 스타벅스 DT점. 이곳엔 세계 최초로 침묵의 공간인 '사일런트 룸'이 있었다. 이제는 나의 아지트가 되었다.

이곳에서 나는 제대로 멍 때리기를 세트로 누린다. 창밖으로 한강을 바라보며 물멍과 저 멀리 산을 보며 숲멍, 공간을 채우는 음악을 들으며 소리멍까지 다채롭다. 아, 사람 구경하는 사람멍도 빼놓을 수 없다. 여기서 끝이 아니다. 독서로 책멍도 하고 글쓰기로 글멍도 때린다. 이 정도로 때려대면 거의 종합격투기 수준이다.


"싱글의 행복은 다른 곳에서 찾아왔다. 느릿느릿 아침을 맞이하는 홀가분한 나날의 달콤함 같은 것. 나만의 작은 공간에서 맞이하는 은밀한 시간들. 그리고 내가 좋아하는, 적당히 낯익고 편안한 공간에서 시작하는 하루들이 좋았다. 숙소 근처에는 입맛에 맞는 식당들이 더러 있었고 편하게 시간을 보낼 수 있는 카페들이 있었다. 책 한 권 들고 찾아가 시간을 보내다 보면 나를 둘러싼 평온함이 감사의 마음에 닿았다. 지루할 때면 고개를 들어 사람들을 바라봤다. 창 너머의 사람들, 카페 안의 사람들, 분주히 일하는 사람들, 대화에 열중하는 사람들, 나처럼 아무것도 하지 않는 사람들"

- 이서희, <이혼일기> 중에서 (아토포스, 2017)


어쩌면 내 상황과 마음을 이리도 적확하게 문장으로 담아냈을까. 게다가 이 문장을 비롯해 여든한 개의 주옥같은 문장을 섬세하게 큐레이션 하여 책을 쓴 작가의 감각에는 또 어찌 감탄하면 좋을까. 책멍에 그치지 않고, 필사하며 글멍에 빠지니 정말로 머릿속이 기분 좋게 멍해졌다. 내게 이런 종합선물세트 같은 행복을 안겨준 책은 바로 편성준 작가의 <나를 살린 문장, 내가 살린 문장>(메디치, 2024)이었다.

이 책의 부제는 '편성준과 함께 읽고 쓰는 세상에 하나뿐인 필사책'이다. 나는 그와 함께 세상에 하나뿐인 필사책을 만들며 진정한 멍의 세계에 빠져들 수 있었다. <이혼일기>의 문장을 선택한 편성준 작가는 "상실이나 취소는 돌이킬 수 없는 수렁이 아니라 그저 인생에 난 또 다른 길일뿐임을 깨닫게 해주는 글"이라며, 이미 갖은양념으로 맛을 낸 문장에 깨소금까지 솔솔 뿌려준다. 미슐랭 스타 셰프의 요리가 부럽지 않다.



감사를 담아 편성준 작가에게 카톡을 보냈다.

"좋은 장소에서 좋은 책과 함께 행복한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나를 살린 문장, 내가 살린 문장> 덕분에 제가 살 것 같습니다. 좋은 책을 써주셔서 감사드립니다."

그에게 답장이 왔다.

"앗, 너무 감사합니다. 작가님. 어떤 구절이 좋으셨는지 두세 가지만 알려주시면 더더욱 뛸 듯이 기뻐질 것 같습니다."

그가 섬세한 감각으로 고른 여든한 개의 문장 중에 어떻게 두세 가지만 고른단 말인가. 마치 티니핑 월드에 푹 빠져 있는 일곱 살 딸내미한테 150마리 티니핑 중 마음에 드는 두세 마리만 고르라는 것과 같았다. 고심 끝에 나는 이렇게 답했다.

"모두 주옥같은 큐레이션이었지만, 고영재 시인과 이서희 작가를 알게 된 것, 그리고 제가 가장 좋아하는 <이방인>을 또 만날 수 있어 행복했습니다. 아, 작가님의 '별똥별'은 가장 위트 있는 문장이었습니다."

'별똥별'의 전문은 짧지만, 강렬하다. <살짝 웃기는 글이 잘 쓴 글입니다>라는 책도 쓴 작가답게 단문으로 재미와 의미, 감동을 다 잡은 '원 펀치 쓰리 강냉이'의 정석을 보여준다.


꿈에 별똥별을
보면서 생각했다.
별은 아내를 주고
똥은 내가 가져야지.
그래도 별이 하나 남네.

- 편성준, '별똥별'


'하나 남은 별'을 나는 <나를 살린 문장, 내가 살린 문장>에서 발견했다. 책멍과 동시에 글멍으로 힐링하고 싶다면 당장 펼쳐보길 바란다. 반짝반짝 빛나는 문장들이 수놓는 별멍을 체험할 수 있을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