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에서 ‘ㄱ’ 자 놓고 ‘1’도 모르면 대략 낭패!
바르트부르크에서
by 책 쓰는 중고차 딜러 Jun 20. 2019
입방정 때문에? 덕분에!
“어디 가보고 싶은데 있어요?” 어느덧 우리 부부에게 카셀이 슬슬 고향처럼 느껴지려 하던 타이밍에 목사님이 솔깃한 제안을 해주었다. “아니에요, 목사님. 바쁘실 텐데 신경 써주셔서 감사합니다.”라고 정중히 거절하려 했으나 마음과 생각의 괴리로 머릿속 회로에 문제가 생긴 것일까? “네, 목사님. 종교 개혁 500주년 기념의 해라서 마르틴 루터와 관련된 유적지에 가보고 싶어요.”라며 얼굴에 철판을 깔고 말하고 있는 나를 발견했다.
말실수(?) 덕분에 우리 부부는 처음으로 카셀을 벗어나 2시간쯤 차로 달려 아이제나흐에 도착했다. 아이제나흐에는 음악의 아버지 바흐와 종교 개혁가 마르틴 루터의 생가, 박물관이 있다. 특히 인근에 아이제나흐를 내려다보고 있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지, ‘바르트부르크 성’이 유명하다. 이곳은 로마 교황청에 저항하다 신변의 위협을 받은 루터가 은신하며 성경을 독일어로 번역한 역사적인 장소다. 루터의 번역을 통해 표준 독일어의 기준이 정립되었다.
“나는 2시간 후에 올 테니 천천히 구경하고 와요.” 역사의 현장에 도착한 우리 부부에게 목사님은 이 한마디를 남기고 유유히 사라졌다. 죄송한 마음에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을 줄 알았지만, 우리 부부는 마음 따로 몸 따로 성문을 향해 개선장군처럼 성큼성큼 행진하고 있었다.
처음엔 성이라고 해서 동화책에서 봤던 이미지를 떠올렸다. 으리으리한 성벽과 도르래로 여닫는 커다란 출입문, 내부의 휘황찬란한 장식과 호사로운 생활 등등…. 루터도 멋진 은신처를 누렸을 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성 안에 웬 고시원이?! 이곳이 바로 ‘루터 방’이라고?! 책 몇 권 펼칠 만한 크기의 작은 책상과 불편해 보이는 의자가 놓여있는 3평 남짓한 크기다. 사진으로 봤을 때 루터의 풍채가 대단했었는데 과연 의자에 그의 엉덩이가 들어갔을까 걱정될 정도였다.
바르트부르크 성의 펄럭이는 독일 국기가 인상적이다.(왼쪽) / '루터방'에서 루터가 라틴어 성경을 독일어로 번역했다.(오른쪽)
아내와 연애할 때가 떠올랐다. 결혼 전에 나는 침대 하나, 책장 하나 놓으면 꽉 차는 5평 남짓한 오피스텔에 살고 있었다. 그 비좁은 집(?)에 아내와 막내 처제는 거의 매일 같이 놀러 올 때도 있었다. 사실 내가 맥주와 안주를 사놓고 유인했다는 표현이 더 적합하다. 그저 이야기만 해도 좋고, 유머 코드가 잘 맞아 말만 해도 빵빵 웃음꽃이 터져 시끄럽다고 민원이 들어오기도 했었다. 루터 방을 나와 성 안 복도를 걸으며 우리 부부는 연애 때의 알콩달콩한 추억을 나누며 한참 웃었다.
종교 개혁가와 언어 개혁가
루터 방이 골방이었다는 사실에 한 번, 그 비좁은 곳이 표준 독일어의 탄생으로 독일 역사에 한 획을 그은 장소라는 사실에 또 한 번 놀랐다. 루터는 부패하고 타락한 절대 권력의 로마 교황청을 향해 95개 조나 되는 반박문으로 대항하다 이곳에 은신하게 되었다. 당시 어렵고 복잡한 라틴어는 수준 높은 고위층만이 사용하는 고급 언어로, 체계적이지 않았던 독일어는 하층민이나 사용하는 저급 언어로 널리 인식되어 있었다. 기득권은 민중이 접근하기 어려운 라틴어 성경을 독점하고 자의적으로 해석하면서 통치 수단으로 삼았다. 이에 저항하여 루터는 민중에게 널리 성경의 진리를 알리고 더 이상 기득권이 민중의 눈과 귀를 가릴 수 없도록 이를 바득바득 갈며 번역 작업에 몰입했을 것이다.
언어가 없으면 소통이 될 수 없고, 자기 생각을 쉽게 적을 문자가 없으면 문화가 발전할 수 없다. 어디 문화뿐이겠는가? 정치, 경제를 비롯해 철학에 이르기까지 문자는 시공간의 한계를 넘어 널리 영향력을 미친다. 작은 방에서 시작된 루터의 표준 독일어 정립은 지금의 독일이 유럽의 중심에 서게 한 원동력이 아닐까?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우리나라의 한 왕이 떠올랐다. 맞다, 세종대왕이다. 세계에서 가장 과학적인 문자라 인정받는 한글을 창제한 세종대왕은 우리 역사를 통틀어 가장 위대한 왕이었다. ‘백성을 가르치는 바른 소리’라는 뜻에서도 알 수 있듯이 훈민정음은 민중을 위해 탄생한 문자다. 대부분의 조정 대신들과 집현전의 많은 학자들조차도 훈민정음 창제에 반대할 정도로 기득권은 사대주의와 특권의식에 사로잡혀 있었다.
먹고 살기에도 급급한 민중에겐 교육의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았고, 그런 민중이 어려운 한문을 익힌다는 것은 상상도 못 할 일이었다. 교황청의 통치 수단이었던 라틴어처럼 한문은 조선에서 기득권의 전유물로써 무지몽매한 민중을 마음대로 주무르는 무기였다. 루터가 종교개혁을 일으켰던 독일과 세종대왕이 한글을 창제했던 조선의 시대 상황이 크게 다르지 않았다. 암울했던 배경 속에서 세종대왕은 언어 개혁가로서 나라 발전의 초석을 다졌다. 한글은 지금의 대한민국이 아시아를 넘어 세계로 비상하도록 한류 열풍을 빚어낸 원천이 아닐까?
이것들이 우릴 눈탱이 맞히려고?!
바르트부르크 성에서 한글의 위대함에 취한 것도 잠시, 시계를 보니 목사님이 오시려면 아직 1시간 30분이나 남아있었다. 성 안에 안내소가 보여 안으로 들어갔다. “혹시 성 내부를 볼 수 있는 가이드 투어가 있나요?”라는 내 질문에 직원은 귀찮다는 듯 말 대신 종이에 숫자를 적었다. 가장 빠른 가이드 투어는 ‘3’ 시 정각에 있고 가격은 성인 두 명에 ‘78’ 유로라고 썼다. ‘엥? 잠깐! 30분 정도의 가이드 투어 가격이 성인 두 명에 78유로라고?! 아니, 관광지라고 동양인한테 눈탱이 맞히나?!’ 순간 기분이 확 상해서 아내에게 남은 시간 동안 사진이나 더 찍고 가자고 했다.
안내소를 나와 성 안 뜰에서 사진을 찍으며 돌아다니다 아내가 무언가를 발견했다. 가이드 투어의 가격이 나와있는 안내판이었다. 성인 한 명 당 9유로라고 적혀 있었다. 그럼 두 명이면 분명 18유로다. 확실한 물증을 통해 78유로라고 했던 안내소 직원의 사기극이 밝혀지는 순간이었다. 우리 부부는 따지기 위해 다시 그 직원을 찾아갔다. 그때 결혼 후 처음으로 알게 된 재미있는 사실이 있었다. 우리 부부가 동시에 영어를 해야 완전한 의사소통이 되는 것이었다. 눈치껏 잘 알아듣는 아내는 귀, 눈치껏 단어로 말하는 나는 입이 되어 서로 합력하여 안내소 직원과 대화했다.
“밖에 있는 안내판에는 분명 가이드 투어 가격이 성인 한 명에 9유로라고 되어 있어. 그러면 두 명이면 18유로잖아. 근데 너는 왜 78유로라고 적었어?” 직원이 오히려 더 황당해하며 대답했다. “18유로 맞아. 내가 ‘18’이라고 쓴 거야.”라며 종이에 ‘18’을 ‘78’처럼 다시 썼다. 그제야 모든 의혹이 풀렸다. 독일에서는 ‘1’을 ‘ㄱ’ 자에 가깝게 쓰기 때문에 ‘7’처럼 보였던 것이었다. ‘7’은 가운데 작대기를 그어 ‘7’로 쓴다. 그러고 보면 서양에서 숫자 ‘0’에도 작대기를 그어 표기하는데 알파벳 ‘O’와 헷갈릴 수 있기 때문이다. 낫 놓고 ‘ㄱ’ 자는 모르더라도 독일에서 ‘ㄱ’ 자 놓고 ‘1’을 모르면 대략 낭패다.
중세 음유시인들의 목숨 건 경연이 열렸던 ‘성악 연주홀’
기다려라, 성이여!
우여곡절 끝에 정해진 시간에 맞춰 성 내부 가이드 투어를 할 수 있었다. 인솔자를 따라 이 방, 저 방을 구경했다. 예배당과 기사들의 방을 비롯해 모자이크로 가득한 성녀 엘리자베스의 방 등 생각보다 단출하고 작은 규모였다. 루터 방에 이어 또다시 실망감이 엄습하려던 순간, 눈 앞에 동화책에서 튀어나온 듯한 방이 나타났다. 중세 음유시인들의 경연이 열렸던 ‘성악 연주홀’이었다. 화려함과 아름다움에 눈호강 제대로 했다. 바르트부르크 성을 중부 유럽 봉건 시대의 뛰어난 건축물이라 일컫는 이유를 이제야 알 것 같았다.
‘기다려라(Wart)! 이 곳에 나의 성(Burg)이 선다’라고 말했던 어느 영주에 의해 바르트부르크(Wartburg)라는 이름이 유래했다고 한다. 우리 부부는 바르트부르크 성에서 보낸 2시간 동안 가깝게는 연애 시절을, 멀게는 중세와 조선 시대를 오가며 시간 여행을 했다. 아쉬운 발걸음을 옮기며 우리 부부는 손을 꼭 잡고 다시 언덕길을 따라 내려갔다. 기다려라, 성이여! 우리가 다시 올 때까지!
#덧.
바르트부르크 성에 펄럭이는 독일 국기가 인상적이었다. 검정, 빨강, 금색으로 이뤄진 3색 국기는 어떻게 만들어졌을까? 이 또한 바르트부르크 성과 연관이 있다. 1800년대 독일에서는 통일을 위한 학생운동이 활발히 일어났었다. 당시 학생운동연합 본부가 바르트부르크 성에 있었는데 이들이 공화국 수립을 위해 3색 깃발을 흔들며 민족주의 행사를 개최했다. 이로부터 30년 만에 독일은 1차 통일을 달성한다. 바이마르 공화국에서 삼색 깃발의 색으로 국기를 만듦으로써 지금의 독일 국기가 탄생하였다.
(참고 : <유피디의 독일의 발견>, 유상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