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셀 시내로 진출하다
독일에서 맞이한 두 번째 아침. 쌀쌀한 2월의 독일 아침 공기가 청량하게 느껴졌다. 우리 부부는 자연스럽게 빵과 과일로 요기한 후 마을 길을 따라 느리게 걸었다. 고요한 마을이 주는 평온함 속에서 낯선 듯 익숙한 발걸음을 옮겼다. 특히 마트로 향하는 길은 그 어느 길보다 반갑고 친숙했다.
마을을 크게 한 바퀴 돌다가 한 지점에 멈춰 섰다. 버스 정류장이었다. “여보, 우리 버스 타고 카셀 시내로 나가볼까?” 우리 부부는 호기심 가득한 눈알 네 개를 반짝이며 정류장에 붙어있는 버스 노선도를 살폈다. 탐험가의 빛나는 눈빛은 이내 암호 해독가의 심각한 눈빛으로 변해갔다. ‘에니그마(제2차 세계 대전 때 사용했던 독일군의 암호 기계)’ 암호를 해독하듯이 노선도를 보고 있던 우리 부부 옆으로 독일 대학생이 지나갔다.
금발의 여대생의 도움으로 우리 부부는 32번 버스에 올랐다. 인당 2.90 유로, 2명의 버스비로 환화 8천 원에 가까운 돈을 내고 카셀 시내에 도착했다. 굳이 한국과 비교하자면 명동에 가까운 느낌이었지만, 훨씬 더 여유롭고 한적한 거리를 걸으며 상점, 행인, 건물 등을 천천히 눈에 담았다. 숨은 그림 찾기를 하듯 우리 부부는 각자 발견한 신기한 광경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카셀 시내로 가는 32번 버스 노선도(왼쪽) / 인당 2.90유로 버스표(가운데) / 카셀 시내에서 기념샷(오른쪽)
그때 시내 한복판에 전차가 지나갔다. ‘트람’이라고 부르는 노면 전차(트램)였다. 샌프란시스코, 파리, 홍콩 등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트램은 독일이 최초로 발명했다. 우리나라에도 트램이 다녔던 때가 있었다. 일제강점기를 배경으로 한 영화를 보면 독립투사의 추격신, 연인의 이별신 등에 트램이 심심찮게 등장한다. 우리나라에서 트램은 1899년 서울 서대문과 청량리 사이에 처음 개통되었으나 1968년을 기점으로 자취를 감췄다. 독일에서 만난 트람은 뭔가 디지털과 아날로그 감성의 교차를 일으키는 신기한 매개체였다.
음식점에서 흐르는 시간의 속도
트람 길을 따라 시선을 이동하니 레스토랑이 보였다. ‘아웃백’ 같은 패밀리 레스토랑이었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한국처럼 “몇 분이세요? 이쪽으로 안내해 드릴게요. 자리는 괜찮으신가요?”라는 신속하고도 친절한 안내는 없었다. 그렇다고 불친절하다는 느낌 또한 없었다. 그저 직원은 묵묵히 자기 할 일을 순서대로 하고 난 후 새로 온 고객을 맞이했다.
금발의 직원이 가져다준 메뉴판을 펼쳤다. 또다시 에니그마 암호를 해독해야 할 것 같은 두려움이 엄습했으나 다행히 음식 사진이 있었다. 아내가 좋아하는 치킨 요리와 특이해 보이는 파스타를 시켰다. 독일에서는 맥주가 물이니 자연스럽게 맥주도 시켰다. 한국에서 평일엔 즐길 수 없는 낮술이었다.
직원은 차분하게 여러 테이블을 응대했고 고객들 또한 재촉하는 이가 없었다. 한국에선 주문과 동시에 기다릴 틈을 주지 않고 물, 빵, 애피타이저, 메인 메뉴, 디저트가 줄지어 나오는 모습과 대조적이었다. 패밀리 레스토랑은 그나마 양반이다. 점심시간에 회사 주변 음식점에선 진풍경이 펼쳐진다. 우주 최고의 회전율을 자랑하며 음식을 거의 삼키듯이 먹도록 부추긴다. 분명 같은 시간인데 독일에서는 시간이 다른 속도로 흘러가는 느낌이었다. MSG를 좀 치면 만화 ‘드래곤볼’에 나오는 ‘정신과 시간의 방’ 같았다. (그 방에서의 1년은 지구의 하루와 같다.)
맥주가 먼저 나왔다. 아내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맥주를 마시며 여유롭게 기다리니 주문한 음식이 나왔다. 오래 기다리다 허기져서 맛있는 건지, 진짜 음식 자체가 맛있는 건지 헷갈리게 만드는 맛집의 마법에 빠진 것일까? 치킨 요리도 맛있었지만, 진짜 대박은 모듬 파스타였다. 모듬 파스타는 다양한 파스타 면들의 종합 선물 세트였는데 익숙한 스파게티 면, 리본과 튜브 모양의 면, 꼬불꼬불한 나사 모양의 면 등이 한 데 어우러져 있었다. 파스타를 크게 좋아하지 않는 나도 지금 다시 독일에 간다면 가장 먼저 먹고 싶을 정도로 모듬 파스타의 맛은 일품이었다.
카셀 시내에 있는 레스토랑 (왼쪽) / 모듬 파스타의 맛에 완전 반해버렸다 (오른쪽)
나중에 한인교회 목사님께 들어서 알게 된 사실인데 독일인은 보수적이라 유행을 별로 좇지 않는다고 한다. 음식점도 가던 곳을 계속 가기 때문에 평생 단골 고객이 되는 경우가 많다. 게다가 상권 보호가 되어 경쟁하듯 음식점들이 들어서지 않는다. 유행 따라 수많은 음식점이 우후죽순처럼 생겨났다 사라지는 한국의 모습과는 많이 다르다. 경쟁이 없으니 독일에선 고객을 왕으로 모시려는 과잉 친절 서비스가 필요 없는 게 아닐까? 마트 물가는 독일이 한국보다 확실히 저렴했지만, 외식비는 비슷했다. 서울에서 단련된 우리 부부, 단순히 물가만 놓고 봤을 때 독일에서도 살 수 있을 것 같은 자신감 장착!
사고 싶다면 무작정 기다려라
목사님과 사모님이 유심칩 구매를 도와주기 위해 카셀 시내로 왔다. 유심칩을 구매하면 해외 로밍보다 훨씬 저렴하게 데이터와 통화를 이용할 수 있다는 꿀팁을 얻었다. 층 하나가 전부 전자 제품으로 가득 찬 어느 쇼핑센터로 들어갔다. 그중에서도 눈에 바로 들어온 반가운 글자, ‘SAMSUNG’. 반가움과 뿌듯함으로 삼성 제품을 구경했다.
목사님은 우리 부부에게 맞는 모바일 유심칩을 찾기 위해 꼼꼼히 독일어로 된 제품 설명을 읽고 있었다. 보통 안내하는 직원들이 곳곳에 있기 마련인데 이건 뭐 서울에서 김서방 찾기, 카셀에서 토마스 아저씨 찾기였다. 유심칩 사용을 위해서는 등록 절차가 필요했는데 도무지 직원이 나타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겨우 직원 한 명을 어렵게 찾았는데 먼저 온 고객을 안내하고 있었다.
이미 30분 동안 기다린 터라 사모님은 그 직원에게 다가가 말을 건넸다. 독일어를 알아들을 순 없었지만, 직원의 제스처로 짐작해 볼 때 순서대로 기다리라는 것 같았다. 또 그렇게 30분이 흘렀다. 하지만 우리 차례는 아직 오지 않았다. 많이 당황스러웠다. 우리나라 같았으면 벌써 “여기 책임자 나오라 그래!”라고 소리 지르고도 남았을 텐데 세월아 네월아 여유 넘치는 직원도, 그걸 당연하게 기다리고 있는 고객들도 이해가 안 갔다.
목사님은 익숙한 일인 듯 “인내심을 갖고 기다려야 해요. 사기 싫으면 관두라는 식이니 기다릴 수밖에…. 한국이면 벌써 난리 났겠죠? 하하하.”라며 웃었다. 거의 1시간 반 만에 우리 차례가 왔고 목사님 덕분에 유심칩을 잘 구매할 수 있었다. (유심칩이 없었으면 정말 큰일 날 뻔한 일이 있었다. 아찔했다. 이 에피소드는 나중에 어느 목차에 소개할 예정이다.)
누가 왕이냐? 뭣이 중헌디!
독일에서 고객은 왕이 아니었다. 우리나라의 서비스가 얼마나 친절하고 신속한지 새삼 깨닫게 되었다. 우리 부부는 독일 입국 심사관, 마트, 식당, 상점을 거치며 독일의 두 얼굴에 일희일비하는 한편, 한국의 새로운 얼굴도 발견해갔다.
눈치 보지 않고 일하는 독일 직원의 모습을 보니 고객 관점에서는 불편했지만, 노동자 관점에서는 부럽다는 생각도 들었다. 신입사원 때 “고객은 왕이다! 고객 앞에서 언제든 무릎 꿇을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라고 배웠던 기억이 떠올랐다. 실제로 친한 입사 동기 중 한 명은 진상 고객 앞에 무릎 꿇고 굴욕을 당한 끝에 견디지 못하고 6개월 만에 회사를 떠났다. 나도 백화점 플로어 매니저로서 수많은 진상 고객을 상대했었고, 그런 고객들에게 상처 받은 수많은 직원들과 함께 울기도 했었다.
결국 고객도, 직원도 왕이 아니다. 사람 위에 사람 없고, 사람 밑에 사람 없는 법이다. 같은 인간이기에 고객도 직원도 존중받아 마땅하다. 그날 밤 우리 부부는 철학의 나라에서 배운 기다림의 미학을 안주삼아 곱씹으며 독일 물(맥주)을 들이켰다. '독일'은 '독'하게 '일'처리가 느리지만, '독'일 맥주가 '일'단 싸고 맛있어서 참 좋다.
#덧.
나는 다행히 현지에 계신 목사님의 도움으로 유심칩을 독일에서 구매했는데 독일어가 잘 통하지 않을 경우 유심 설치에 애를 많이 먹는다고 한다. 따라서 미리 안전한 방법으로 유심칩을 구매할 수 있는 꿀팁을 소개한다.
'유럽 EE 유심칩'은 독일뿐 아니라 유럽에서도 쓸 수 있는 선불유심이다. 가격이 저렴하고 속도가 빠르다는 장점이 있다. 유럽 EE 유심은 2기가, 6기가, 10기가 중 선택할 수 있다. 택배 수령과 직접 수령이 있다. 직접 수령은 인천공한 1터미널, 인천공한 1터미널 공항철도, 인천공항 2터미널에서 가능하다. 구매는 ‘말톡’ 사이트에서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