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적응력은 무섭다. 원래는 독일에 도착해서 최소 2주 정도는 적응기간을 거치고 렌터카 여행을 할 계획이었다. 숙소에서 카셀 시내까지 버스로 7~8 정거장 되는 거리를 어느새 산책 삼아 걸어서 다닐 정도로 자신감이 붙은 우리 부부. 독일에서 맞이하는 4번째 아침만에 우리는 렌터카를 이용하기로 결정했다. 1시간 넘게 걸어서 카셀 시내 근처에 위치한 렌터카 매장으로 향했다.
걷다 보면 인상적인 건물이 몇 개 나타난다. 먼저 곳곳에 깨진 유리창과 어두침침한 외벽 때문에 범죄 영화에 나올 법한 포스를 지닌 폐공장이 나타난다. 머리가 헝클어진 미모의 여인이 맨 꼭대기 층에 덩그러니 밧줄에 묶여 있고, 주인공은 1층부터 차례로 악당들을 무찌르며 여인을 구출해야 할 것만 같은 장소다.
이 음산한 길에서 발걸음을 재촉해 얼마쯤 가면 이번엔 벤츠 중고차 매장이 보인다. 입구엔 초대형 벤츠 마크가 위용을 드러낸다. 화려한 연회장에 드레스 코드를 맞춘 귀빈들이 품위 있게 앉아 있는 모양으로 은빛 찬란한 벤츠 마크의 차들이 의젓하게 줄지어 있었다. 중년 신사의 품격이 느껴진다고 해야 할까.
벤츠 연회장을 지나 길을 건너려고 서 있는데 보행자 신호등에 자꾸만 눈이 간다. 우리나라 보행자 신호등에는 8등신의 모델 같은 사람 모양이 그려져 있다. 반면 독일에는 스머프 같은 3등신 몸매에 중절모를 쓴 귀여운 사람이 새겨져 있다. 빨간불에는 '양팔 벌려 옆으로 나란히' 자세를, 초록불에는 무게 중심이 앞으로 쏠린 채 짧은 다리로 서둘러 건너는 자세를 취하고 있다. 바로 '암펠만(Ampelmann)'이라 부르는 독일 신호등 캐릭터다. 암펠만 캐릭터 샵이 있을 정도로 많은 독일인들이 신호등 캐릭터 덕질을 한다고 하니 놀라울 따름이다. 캐릭터는 심플하면서도 귀엽고, 어색하면서도 호감이 간다. 아내는 연신 귀엽다고 난리다.
눈길을 끄는 귀요미 암펠만 신호등
렌터카 매장에 드디어 도착하다
초록불 암펠만의 자세로 길을 건너 큰 도로변을 따라 한참 가다 보면 ‘AVIS 렌터카’ 매장이 보인다. 독일에는 Hertz, AVIS, Europcar, enterprise 등 다양한 렌터카 업체가 있다. 나는 미리 온라인 사이트 rentalcars.com에서 예약을 하고 방문했다. 수령지는 이곳 AVIS 매장, 반납지는 프랑크푸르트 공항으로, 차종은 소형 폭스바겐 오토매틱으로 예약했다. (한글로 번역도 되는 사이트라서 예약이 어렵지 않다.)
심호흡을 한번 하고 매장 문을 열었다. 50대로 보이는 마르고 키가 큰 남자 직원이 우리를 맞이했다. 혹시나 소통이 잘 안 되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예약번호와 이름을 말하자 직원은 잠시 기다리라면서 영어로 시원시원하게 안내해주었다. 좋은 직원을 만난 것 같아 안심이 되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당시 신혼부부로서 독일에서 한 달 살기는 처음이자 마지막일 수 있는 정말 소중한 시간이라 생각했다. 나는 아내에게 최고의 추억을 선물해주고 싶었다. 허튼 시간을 보내지 않도록 다음 일정에 대해 인터넷으로 샅샅이 검색하고 계획을 세웠다. 전날 밤도 아내가 곤히 잠든 사이, 나는 독일에서 렌터카 이용 시 주의할 점에 대해 검색했다.
신혼의 열정과 패기랄까. 나는 아내에게 멋진 모습만 보여주고자 (아내가 잘 때 몰래 열심히 공부했다는 사실은 숨긴 채) 렌터카 계약을 능숙하게 하고 싶었다. 이것이 매장 입구에서 심호흡을 한 이유다. 일종의 부담감과 책임감, 설렘과 두려움의 표출이랄까.
독일에서 렌터카 대여 시 국제 운전면허증과 국내 운전면허증, 여권과 신용카드 4가지가 필수다. 또한 가장 중요하게 체크해야 할 사항은 ‘운행 거리 제한 여부’이다. 렌터카 업체에 따라 거의 새 차를 렌트해주는 대신 운행 거리 제한을 두는 경우가 있다고 한다. 우리 부부는 독일 주변국들까지 장거리 여행 계획을 갖고 있어 반드시 운행 거리의 제한이 없는지 확인해야 했다. 다행히 여기까진 문제가 없었다. 아내는 나를 절대적으로 신뢰한다는 눈빛을 보내고 있었다.
흔들리는 멘탈을 붙잡고, “이봐요, 아저씨!”
직원 : “자, 너희 차가 배정되었으니 확인해봐!” 나 : “오케이, 좋았어! 엥?? 이거 뭐야!!” 아내 : “오빠, 우리 폭스바겐으로 예약하지 않았어요?” 나 : “아저씨, 이거 우리가 예약한 차가 아닌데요. 뭐야, 게다가 스틱이네!” 직원 : “너가 예약한 차보다 더 크고 좋은 차야. 그냥 이걸로 해.” 아내 : “여보, 난 스틱 운전 못하는데….” 나 : “아, 뭐지? 분명 오토매틱이라고 체크했는데…. 아저씨, 이거 보세요. (예약한 화면을 촬영한 사진을 보여주며) 분명 오토매틱으로 체크했잖아요! 우린 스틱 운전 못해요. 오토매틱으로 바꿔주세요!”
사실 나는 스틱 운전을 할 수 있었지만, 아내와 번갈아 운전을 할 경우와 장거리 운전을 할 경우, 피로도를 줄이려면 자동 변속기가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그보다 호인처럼 보였던 직원의 얼렁뚱땅 태도에 나는 적잖이 당황했다. 합리적이면서도 합법적일 거라 예상했던 독일에서, 원리원칙대로 일사불란하게 일을 처리해 줄 거란 기대감이 와르르 무너졌다. 직원은 다른 차로 바꿔주겠다며 잠시 기다리라고 했다.
직원 : “자, 이제 너가 찾던 차야!” 나 : “엥?? 아니잖아요! 우린 폭스바겐을 원한다구요!” 직원 : “아, 너가 예약한 건 폭스바겐이 아니라, 폭스바겐 급의 소형차인 거야. 폭스바겐은 예약 페이지의 대표 사진일 뿐이고.” 아내 : “여보…. 우리 폭스바겐 못 타는 거예요….” 나 : “(땀을 삐질삐질 흘리며) 오케이. 그건 알겠는데 지금 다시 보여준 차도 크잖아요. 우린 소형차를 원해요.” 직원 : “왜? 이 차가 더 좋은 건데…. 알았어. 근데 시간이 좀 걸릴 수 있으니 기다려봐.”
직원의 태도에 언짢았던 터라 나도 쉽게 물러나고 싶지 않았다. 게다가 장거리 운행을 하려면 아무래도 소형차가 기름값을 아끼는데 유리했다. 2~3시간 같은 20~30분이 흘렀을까, 새 차로 보이는 낯익은 차가 눈에 들어왔다. 세상에! QM3였다. 자동차의 왕국, 독일에서 한국 차를 렌트하게 될 줄이야! 나를 향해 신뢰하는 눈빛을 보였던 아내는 이내 시무룩해 있었다.
우리가 묵었던 숙소. 2층엔 호스트가 산다.(왼쪽) / 우리가 렌트한 QM3. 르노 마크가 달려있다.(오른쪽)
더 이상 시간을 낭비할 수 없었다. 그래도 새 차에 오토매틱이고 연비도 좋은 차라 나는 다행이라 생각했지만, 아내는 실망한 눈치였다. 이번엔 내가 렌터카 직원처럼 아내를 얼렁뚱땅 설득하기 시작했다. 드디어 출발! 도망치듯이 렌터카 매장을 떠나 도로로 진입했다.
내비게이션에 숙소 주소를 입력하자 독일어로 안내가 시작되었다. 들어도 알아들을 수 없었기에 형편없는 그래픽의 내비게이션 안내를 눈으로 힐끗힐끗 보며 조심스레 첫 주행을 했다. 기분이 풀렸는지 아내가 내비게이션에서 반복적으로 나오는 독일어 안내 멘트를 흉내 내는 바람에 우리 부부는 빵 터졌다.
산 넘어 산이네!
‘렌터카 멋지게 계약하기’엔 실패했으니 이번엔 아내에게 ‘주유 멋지게 하기’를 시연하며 만회를 하고 싶었다. 전날 밤에 검색한 정보에는 셀프로 주유하고 정산은 계산대에 가서 주유기 넘버를 말하면 된다고 했다. 물론 맞는 정보였다. 그런데 문제는 무려 5가지나 되는 기름 종류 중 어느 것을 넣어야 하는지 모른다는 것이었다.
그제야 아까 그 얼렁뚱땅 직원에게 디젤차가 맞는지 미처 확인하지 못했다는 사실을 인지했다. 게다가 주유구 오픈 버튼은 아무리 찾아도 보이지 않았다. 한참 고민하다 결국 뒤따라 들어온 독일 아주머니께 도움을 청했다. 주유구는 어떻게 열고, 이 차에 어떤 기름을 주유해야 하는지 묻자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품질 검사원들처럼 아주머니와 함께 한참 살펴본 후에 주유구는 직접 손으로 열어야 하고, 휘발유를 넣어야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런데 아주머니가 알려주신 기름 종류는 나중에 알고 보니 가장 비싼 고급유였다. 그것도 모르고 우리는 한참 동안 고급유를 넣고 다녔다. (‘Super’라는 글씨가 휘발유인데 그 뒤에 높은 숫자가 붙을수록 비싸진다.)
기름값 아끼겠다고 쇼를 해놓고는 휘발유 차에 고급유라니…. 당시에 얼마나 억울했는지 생생한 감정선이 되살아 날 것만 같다. 멋있어 보이려고 힘주었다가 망신만 당한 그 날의 기억은 시간의 필터로 치환되어 지금은 웃을 수 있는 추억이 되었다.
그 날 따라 독일 맥주는 왜 그렇게 맛있는지. 무장해제된 나는 아내에게 자초지종을 실토했다. 멋있고 보이고 싶어 준비했던 것들을 다 망친 것 같아 속상하다고. 그러자 돌아온 아내의 말, “오빠는 원래 멋있기 때문에 멋있어 보이려고 하지 않아도 돼요.” 이게 말이야 맥주야? 시원한 아내의 말 한마디에 흠뻑 취하는 밤이었다.
#덧.
추억의 프로그램, 이경규의 ‘양심 냉장고’를 기억하는가? 나는 ‘차량 정지선’ 편이 인상적이었다. 이경규는 차량 정지선을 잘 지키는 운전자가 나타나길 한참 기다린 끝에 한 운전자에게 양심 냉장고를 선물할 수 있었다.
우리나라에서는 교통신호등이 길 건너편에도 있기 때문에 정지선을 지나쳐 정차해도 운전자가 충분히 신호를 볼 수 있다. 심지어 보행자 건널목을 침범하는 경우도 다반사다. 신호를 보는데 전혀 지장이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독일에서 차를 타고 교차로에서 신호 대기를 하다 한 가지 놀라운 사실을 발견했다. 차가 정지선을 넘어가면 신호가 보이지 않았다. 즉 정지선을 지켜야만 신호를 볼 수 있는 위치에 교통신호등이 설치되어 있었다. 교통신호등이 길 건너편이 아닌 운전자 가까이에 있어 정지선을 안 지킬래야 안 지킬 수가 없다. 독일에선 ‘양심 냉장고’라는 프로그램이 필요 없는 이유를 알게 되었다. 역시 이런 부분은 선진국 시스템 다웠다. 보행자와 운전자 모두를 고려한 사람 중심적인 설계에 감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