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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pt Jul 18. 2020

왕조가 끝나도 살아남은 광대

'더 라스트 댄스' 를 보고 로드맨을 생각하다

그들 각자의 농구장


넷플릭스 10부작 다큐 '마이클 조던 : 더 라스트 댄스' 를 보며, 지나가고 흐릿해진, 사무치게 찌릿하는 뭔가가 소환된 이들이 많을 것 같다. 이쯤에서 각자 ‘나도 농구공 쫌 튕겨봤지.’ 포인트를 어필할 여러 얘기를 할 수 있을 게다. 나의 경우엔 286컴퓨터로 동생과 즐기던 nba게임으로 훅슛의 존재를 배웠고, 그 훅슛의 주인공이 이소룡과 함께 ‘사망유희’에 출연한 카림 압둘자바라는 사실을 내가 안다는 게 뿌듯했던 시기를 거쳐, 오락실과 농구장, 그러니까 철권2, 킹오파95, 길거리3on3(우리 동네의 가장 큰 3on3 대회의 고등부 우승 상금은 무려 100만원이었는데 “백만원”이란 이름의 팀이 우승했다. 그들이 기억할진 모르겠지만, 동네 농구장에서 급조된 5:5 풀코트 경기에서 상대팀으로 만난 백만원 팀 주장의 공을 한 번 뺏고 왼손 더블클러치를 한 번 성공한 것으로 난 한 학기 정도 우쭐했...더블스코어로 처참히 발린 건 기억삭제...) 그리고 무엇보다 슬램덩크의 시절을 거쳤다.


여기서 좀 더 흔치 않은 취향으로 뻐기고 싶으면, 이렇게 말한다. ‘난 JFK를 좋아했어.’ 트리플 더블을 밥먹듯 한다는 걔. 제이슨 키드. 아무도 제이슨 키드를 JFK라곤 부르지 않았지만, 난 ‘있어빌리티’를 추구하기 위해 그냥 그렇게 불렀다. 시간이 조금 지난 후엔 ‘런앤건’이라는 오락실 게임으로 ‘샤크’와 ‘페니’의 '올랜도 매직'팀을 편애했고, 앨런 아이버슨을 좋아한다고 말하려면 농구를 좀 심하게 잘해야 될 것 같아 그를 좋아한다 말하길 꺼렸다. 하지만 우린 모두 알고 있었다. 이 세계는 한 명이 새로 만든 신세계란 걸. 나머진 그 공기(air) 아래 숨 쉬는, 횃불에 어른거리는 이데아의 그림자일 뿐.


그 시절 우린, 아무리 그림을 못 그려도 황소머리는 그릴 수 있었다. 내가 알 카포네와 금주법 시대, 스카페이스 탓에 사랑하던 도시 시카고는 이제 살아있는 블랙 지져스의 땅이었다. 그 땐 당연히 그랬다. 미국의 공놀이는, 인터넷도 없던 때에(인스타도 블로그도 페북도 트위터도, 심지어 싸이월드도!) 전세계의 최신 유행이 되었다. 미국 어느 도시의 농구팀 스타디움 점퍼가 대구 동성로에서 수십만원에 팔리는데 중학생들이 신문이나 우유를 배달하고 모은 돈으로 그걸 샀다니까? (신창원이 대히트시킨 ‘미쇼니’ 니트와 쌍벽... 그 니트 입고 농구하면 갑) 발목까지 오는 그 놈의 농구화를 봄부터 겨울까지 일년 내내, 지금으로 치면 스탠 스미스나 반스를 신은 수보다 더 많은 수가 데일리로 농구화를 신고 다녔다. 급기야 나의 MJ(마이클 잭슨)가 시카고의 MJ(마이클 조던)와 뮤직비디오를 찍었다.

누구도 그처럼 할 수는 없다.

그리고 이제 나는 마흔을 넘겼다.
다큐멘터리 내내, 인터뷰에 응한 수많은 사람들이 말하는, 그리고 모두가 인정하는 그 명제, '누구도 조던처럼 할 수는 없다'는 말이, 경외심과 존중 이외에, '그렇게 하지 않아도 된다'거나 '나는 그렇게 살 수는 없다'라는 뜻이 될지도 모르겠단 생각을 처음 해보게 된다.


눈에 띄는 배드 보이


조용하고 소심했던 디트로이트 배드 보이즈 시절의  데니스 로드맨은, 그 악명높은 디트로이트의 조던 맞춤형 수비 전략인 '조던 룰'로 마이클 조던의 시카고 불스를 번번히 좌절시킨 장본인이었다. NBA 최고의 수비수에 뽑힌 그는 눈에 띄는 압도적 재능 없이도 명실공히 탑클래스의 선수가 된 명백한 사례였다. 디트로이트가 두 번의 월드 챔피언이 되고, 가슴 속 진짜 '배드 보이'를 코트에서 맘껏 뽐내던 로드맨은, 그러나 누구도 모를 개인적인 정서적 방황과 이혼 등의 일을 겪으며 데미지를 쌓아갔다. 급기야 훈련을 무단이탈하고 잠적했다가, 소총을 손에 쥔 채 주차장에서 자신의 운전석에 앉은 채로 잠들어 있는 것이 경찰에게 발견된 이후, 그는 지금 우리에게 익숙한 그 모습으로 변했다.


나는 이 다큐멘터리를 보며, 이상하게도 로드맨이 의식적으로 선택한 그의 삶의 태도와 그로 인한 변화에 눈이 갔다. 수시로 새로 칠하는 머리색과 채워넣는 문신으로, 로드맨이 자신의 무엇을 지켜내고자 했는지 알 것도 같다.

왕조에서 자신을 지키는 법


정작 코트와 훈련장에서는 말수가 적었던 로드맨. 플레이오프 중간에 훈련장을 무단이탈해서, wcw 이적 후 더욱 말수가 많아진 헐크(헐리우드) 호건과 함께 체어샷을 날리며 시가를 피던 로드맨. 깊은 눈, 요염한 표정, 순진하고 수줍은 리바운더. 점프할 때 에어 조던이 그러하듯 멋진 실루엣을 염두해 그런 것이 아닌, 부여잡은 두 손 끝에서 놓치지 않은 공 이 외엔 아무 것도 염두해 두지 않아 그렇게 되어버리는 쩍벌린 그 다리.

(단체 사진 속, 로드맨. 롱리와 조던 사이, 가지런히 모은 두 무릎. 그의 자리, 그의 자세. 비약일지언정, 나는 이걸 보고 지금에야 뭔가 깨달은 느낌을 받았다.)

그가 온 몸으로 내는 목소리.  


"이러이러하지 않아도 돼. '넌 이러이러하다'는 남의 말들이 나인 건 아니야. 난 내가 되고 싶은 존재가 될거야. 억지로 '척' 하지 말자. 나는 내게 달려있어. 남을 신경쓰지 말자. 이해되기 위해 일관성을 유지하려 노력하지 말자. 그냥 그때그때의 나로 살자. 이래도 저래도 돼. 나는 내게 거리낌이 없어."


조던의 다큐를 보다가, 뜬금없게도, 오해로 편애하던 로드맨을 다시 발견한다.


거인의 그림자에 가려 지워지지 않고, 조명을 받으면서도 상처받지 않고, 남으로부터 오는 동기 말고 스스로에 몰입해서 성취할 수 있는 법을 찾고, 롤모델이 되지 않으면서도 영감을 주는 존재가 되는 길을 보여준 사람이었구나. 어릴 때 내가 오해하고 흠모한 지조때로 악동 언터쳐블이 아니었구나. 소심하고 취약하고 천부적이지 않은, 미숙하고 무책임하다고 오해받을지언정 남과 다른 자기를 결코 없는 셈 칠 수는 없었던, 그리고 그런 자기 자신을 받아들이기로 한 사람이 그릴 수 있는 가장 멋진 실루엣을 그리며 서 있었구나.


언제나 놀이마저 전쟁이 되는 왕국이라지만


왕조가 끝나고, 늙었으나 더 지혜로워진 망국의 황제가, 쓰러진 제국의 거대했던 영토를 추억할 때, 빛 바랠리 없는 그의 제국의 업적을 모두가 기리며 아쉬워 마지 않을 때, 국경 너머 변방 어느 곳에서라도 여전히 변치 않게 내키는대로 피어싱과 문신을 더 하고 어릿광대 짓을 계속 할 수 있는 광대는, 늙지 않고 살아남겠구나. 누구도 그의 노쇠를 아쉬워하며 과거를 추억하지 않겠구나. 그는 지금도 똑같구나. 그는 자기를 지켰구나.


농구의 신이 농구를 완전하게 만들고 온전히 농구와 동의어가 되었을 때, 코트의 악동은 자신의 농구를 하고, 그걸 그만 두었을 때 온전히 자기가 남았다.

덧,

내가 2005년 빰쁠로냐에서 로드맨과 같은 투우장에서 같은 소뿔을 피해 달린 적 있다는 사소한 친분관계가, 엄중하고도 지엄하기 그지 없는 일이 아닐 수 없는, '넷플릭스에서 핫한 최신 다큐의 리뷰' 끄적이기에 개인적 차원으로 작용한 것은 결코 아니다. 나는 조던과 다르기 때문이다. (당연히 다르지. 넌 니가 대체 뭐라고 생각하냐, 나 자식아.) 조던은 모든 승부를 '개인적'인 것으로 치환하여 자신을 활활 타오르도록 동기부여하는데 천부적인 자질이 있다. (그러니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소인배'란 말도 있었던 게다. '조던이 XX 땜에 빡쳐서 56득점 했다.'는 식이었지.) 그에 반해, 나는 나의 일도 선택적으로 유체이탈하여 먼 산 보듯 하는 것에 더 자질이 있다 하겠다.


덧2,

로드맨과 나는 굳이 옛 추억을 그렇게 끄집어내 자랑할만한 사이도 아니다. 뭐..그냥 죽음의 위협을 같이 느꼈으니, 따져보자면 전우일 뿐이다. 중요한 농구 경기에 나서며 전쟁 운운하는 시카고 황소들보다야 스페인 투우들 피해 함께 달아나 본 적 있는 우리 사이가 더 불스에 어울리지 않나 싶긴 하다. 같은 해 빰쁠로냐의 '산 페르민'축제에 있던 이들은 안다. 와인과 계란과 피가 눌러붙은 축제 티셔츠를 걸친 서로를 유럽 다른 어딘가에서 우연히 지나칠 때의 그 눈빛은 라스트댄스 라스트 작전타임 때 피펜이 허리통증을 참으며 지은 그 눈빛보다 더 전사답다... 라고 계속 지껄이고 싶지만 그만하자.


덧3,

이게 다 그냥 15년 전 로드맨이랑 사진 찍은 거 자랑. 그 때 만난 게 로드맨인게, 그를 만난 게 거기였다는 게 너무 안성맞춤이다.

덧4,

로드맨 '답다'. 매순간 자기 이름 뒤에 '답다'라는 수사가 붙는 것으로 충분한 삶.


덧5,

그런 점에선, 조던도 물론 그 답다. 미래나 과거를 정말이지 생각하지 않는 능력. 정말로 눈 앞에 집중하는 능력. 지금 이 순간에 언제나 전부를 거는 능력. 점프나 슈팅이 아니라 그게 정말 그의 초능력이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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