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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pt Oct 16. 2021

이때까지 본 영화 중에 뭐가 제일 재밌어?

고공침투, 워터월드, 새로운 발견을 부단히 기대하는 자세

큰 누나와 비디오 플레이어


우리 외가는 이모가 세 명이다. 가장 큰 이모네는 딸이 셋인데, 그 중 제일 큰 누나는 영화 보는 것을 좋아했다. 내가 아주 어릴 때, 사촌들은 종종 우리 집에서 모여, 빌려온 비디오 테잎으로 영화를 보곤 했는데, 가장 나이가 많은 큰 누나가 역시 본 영화도 가장 많았고, 그래서 둘째 이모네 아들들인 사촌 형들도 큰 누나에게 무슨 영화를 빌릴지 의지했고, 내가 봐도 되는 영화인지 아닌지를 정해서 그 영화 관람의 여부를 정하는 것도 큰 누나였다. 물론,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사촌 누나와 형들이 보는 모든 영화를 같이 보게 되었는데, 그 첫 스타트가 3학년 때인지 4학년 때인지 아무튼 그 즈음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아메리카'를 본 것. 이후, 큰누나가 내 적성검사를 끝 마친 것이었는지, 그 뒤로 왠지 모르게 '언터쳐블', '스카페이스', '대부' 등등이 줄줄이 이어졌...

그 당시는 극장에서 '우뢰매' 와 '영구와 땡칠이'를 개봉하던 시절이었다. 외화로는 '나 홀로 집에'. 중학생이 되어서야 '스피드' 나 '트루 라이즈' 같은 스펙터클한 영화를 극장에서 접하게 되었는데, 아무튼 그러니 사촌들과 함께 보는 외화 비디오는 내 맘을 온통 헤집어 놓았고, 그렇게 형, 누나들과 함께 본 영화들은 나를 한껏 우쭐하게 만들었으니, 학교에서 영화 이야기가 나오면, 아이들보다는 선생님들과 대화를 해야 수준이 맞다고 느꼈는데, 그도 그럴 것이, 예를 들자면, 아이들은 '백 투 더 퓨쳐'라는 영화 제목은 고사하고, 내가 그 영화의 내용을 설명해주어도 도무지 이해를 하지 못하니 내가 무슨 이야길 하겠는가. (물론 그 복잡한 시간여행 이야기를 제대로 설명하지 못했을 가능성이 거의 백프로..)


영화 부심


아무튼, 그 영화 부심은 중학교를 거쳐 고등학교 때까지 꾸준히 유지되었는데, 그 당시엔 인터넷이 없었으니 개봉영화에 대한 정보를 알아내려면 아침에 현관문 아래로 던져지는 신문의 한 켠에 실린 극장광고를 확인하거나, 동네에서 암묵적으로 정해진 영화 포스터를 붙여놓는 담벼락으로 직접 가서 보아야 했고, 나와 비슷한 영화 부심 있는 녀석들은 의례히 그 담벼락 앞에서 자주 마주치곤 했다. 그리고, 그 곳에서 얼굴을 익힌 아이들은 극장에서도 자주 마주쳤고, 그들은 항상 영화를 보고 나서 다음날 각자의 교실에 들어서서는, 굳이 돈을 주고 그 영화를 볼 생각은 없지만 내용은 궁금해 하는 아이들에게 실감나게 그 영화의 내용을 전해주는 것이다. 자연스레, 영화 내용 정리와 적당한 과장과, 재미없는 부분을 스킵하는 능력이 길러졌는데, 그게 계속되다 보면, 내가 본 영화보다 내가 지어내고 있는 이야기가 더 낫다 싶을 때도 있을 지경이 되는 것이다.


아무튼, 그러다 보면, 동네 비디오 가게의 영화들은 대충 비디오 케이스만 봐도 대충 어떤 영화일지 감이 오고, 그러다 눈이 가는 배우의 이름을 외우게 되고, 비슷비슷한 분위기나 스타일의 영화를 자기 나름 분류해서 우열을 가려보게 된다. 로드쇼나 스크린 같은 영화 잡지를 사려고 돈도 모으고, 좋아하는 배우를 그려보기도 한다. 그러다 잊지 못할 어떤 깨달음의 순간이 온다. 희한하게 출연진도 장르도 각양각색인데 하나같이 내 취향인 영화들을, 놀랍게도 같은 사람이 만들었다는 걸 알았을 때, 영화에는 보이지도 않는 감독이 그 보이지 않는 손으로 이 세계를 주무른다는 사실이 준 충격이란. 그 첫 대상이 리처드 도너였는지 스필버그였는지 모르겠다.



슬럼프


그 쯤되면, 곧 좌절의 순간이 찾아온다. 감독의 몸은 하나이고, 그들이 영화를 항상 만드는 것은 아니다. 내가 좋아하는 감독의 대표작을 섭렵하고 나면, 그의 차기작이 나오기 전까지, 그 비슷한 영화를 죄다 찾아보게 된다. 그러다 또 다른 감독과 배우가 눈에 띄면 행복한 경우다. 하지만, 비디오 가게 벽면의 왼쪽 제일 위쪽에서부터 오른쪽 가장 아래에 이르기까지, 좀처럼 다음 타자를 발견하지 못하는 경우도 허다하다. 그렇게 되면 비슷한 장르 섭렵 요법에 심각한 부작용이 찾아 오는데, 내가 좋아하는 정도와 관심이 큰 장르일수록, 보고 나서 실망하는 강도가 커지는 것이 당연하므로, 영화를 많이 볼수록 화가 쌓여 가는 것이다. 설상가상, 실망과 화가 쌓이면 쌓일수록, 그 마음을 달랠 수 있는 영화의 완성도에 대한 기대치는 계속 올라간다.


그럴 때 쓸 수 있는 방법이 있긴 있다. 장르를 바꾸는 것이다. 아예 다른 장르로 다시 시작하면, 급한 불은 꺼진다. 오히려 전혀 기대감 없는 장르를 일부러 도전하면 더 좋다. 하지만, 그것도 한계가 있다. 비디오 가게가 넓어봤자, 그 곳에 있는 영화를 다 보는 날이 언젠가는 오기 마련이다. 한 군데만 그렇게 끝장을 내면 다행이지, 인근 동네의 다른 비디오 가게 하나 정도를 더 탈탈 털고 나면, 극복하기 힘든 좌절감을 맛보게 된다.


어떤 영화를 봐도, 도무지 재미가 없는 상태. 정말 단 하나의 영화도 재미가 없다. 심지어, 그토록 기다리던, 특정 감독의 차기작이 드디어 극장에서 개봉을 하거나 비디오로 출시되어도, 그마저 흠 잡을 구석이 눈에 띄어 그런 마음을 가진 자신이 싫어지면서도 그 감독이 너무 미워지는 지경에 이르는 것이다. 농담 같지만 사실이다. 그러니까, 재미있는 영화가 단 한 편도 없는데, 나오는 영화는 다 봐야되는 상태에 놓인다. 그렇게 어찌저찌 고등학생이 되어버렸고, 무기력한 오후를 흘려보내고 있는 어느 주말이었다. 큰 누나가 우리 집에 들렀다.  



최신 영화가 비싼 이유


웨슬리 스나입스가 그나마 내 구원이 되어주던 시기였다. 큰 누나에게, 웨슬리 스나입스가 우디 헤럴슨과 함께 나온 길거리 농구 영화 '덩크슛'을 봤냐고 물었다. 누나는 한동안 바빴는지, 그 영화는 보지 못했다고 했다. 하지만, '데몰리션 맨'은 봤기에 웨슬리 스나입스는 맘에 든다고 말했다. 그리고, 우리는 그날 웨슬리 스나입스의 신작 '고공침투'를 빌려서 봤다. 재미는 있었지만, 내 상태에 따르면 재미가 없는 영화여야 했다. 그렇게 재미없다고 말해야 마땅한 아쉬운 점을 한 두 개 떠올리고 나니 정말 별로 재미가 없어졌다. 누나는 재밌게 본 듯도 하고 그저 그랬던 것 같기도 했다. 마침 그 날엔 큰 누나와 함께 온, 큰 이모네 막내 딸이자 내 사촌여동생도 그 영화를 함께 보았다. 동생은 그런 액션 영화는 처음 본 듯, 엄청 재미있어 했다.

나는, 별 감흥 없어 보이는 누나에게 일종의 동질감을 느끼며, 그리고 나를 구해줄 내가 모르는 단 하나의 재미있는 영화를 기대하며, 누나에게 물었다.


"누나, 이때까지 본 영화 중에 뭐가 제일 재밌어?"


나는, 누나가 고심 끝에 그 영화를 떠올리기만 해도 표정이 밝아지며 신나게 내게 말해줄 어떤 영화 한 편을 그토록 기대했는데, 내가 그 기대감을 키우기도 전에, 그러니까 내 질문이 채 끝나기도 전에, 누나는 대답했다.


"고공침투."

"응?"

"고공침투. 재밌네."

"이거? 재밌었다고?"

"응."

"아니, 본 영화 중에 제일 재밌는 영화가 뭐였냐니깐."

"니는 뭐가 젤 재밌는데?"

"모르겠는데. 너무 많아서... 생각을 좀 해봐야 되는데."


"그러니까, 방금 본 영화가 제일 재밌지."


그러더니, 누나는 내가 아까 말했던 웨슬리 스나입스가 길거리 농구를 한다는 영화제목이 뭐냐고 다시 물어봤다. 다음  쯤이면, 누나가  가장 재미있는 영화는 '덩크슛'이겠지. 누나는  행복하겠다 싶었다. 하긴, 그래서 최신 영화 대여료가    비싼 건가.



이게 재밌는 거면


누나의 그 말은, 일견 일리 있는 이론으로는 인정할 수 있지만, 신앙심이 생길만한 교리로 삼기엔 부족했다.


아니, '고공침투'가 인생 최고의 영화라고? 뭐, 재미가 없다고는 할 수 없지. 하지만, 재미있다고 말하기에도 아쉽지 않아? 아냐, 그럼 '덩크슛'보단 어땠어? '고공침투'가 더 재밌었지. '데몰리션 맨'은? 그건 실베스타 스텔론도 나오잖아. 그게 더 재밌었지. 어? 그럼 '데몰리션 맨'은 재미있는 영화란 거네? 그럼 그 정도로 재미있는 영화는 많지 않아? 아냐, 그렇다고 그게 걸작은 아니잖아. 그저그래도 그냥저냥 재밌는 영화도 있는 거지. 내가 바라는 영화는 그런 정도가 아니라고.


이런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무는데, 극장과는 담을 쌓고 지내는 친구 한 녀석이 내게, 보고 싶은 영화가 있는데 자기는 극장엔 잘 안 가봐서 내가 같이 가주면 좋겠다고 했다. 자기가 돈까스도 사겠다며, 시내 번화가에서 조금 가다보면 나오는 오래된 돈까스집이 있는데 그 가게가 처음 문을 연 것이 우리가 태어난 해라고 했다. 그 돈까스 집은 나도 좋아하는 곳이었다. 그 돈까스집을 좋아하는 다른 녀석도 끼겠다고 했다. 각자 더치페이를 하는 것으로 하고 다 같이 가기로 했다. 그러다 총 여섯 명이 같이 가는 대형 이벤트가 되었다.


그 날 극장에서 우리가 다 같이 본 영화는 '워터월드'다. 영화가 끝나고 극장 문을 나서서 돈까스 집으로 걸어가는 내내, 나는 왜 이 영화가 이 지경인지에 대해 납득하기 위해 자신과의 싸움을 벌이고 있었다. 돈까스 집에 도착했을 때, 아이들은 인상 깊었던 장면을 하나하나 말하며 서로 맞장구를 쳐주고 있었다. 아이들은 영화 부심에 쩔어있는 내가 한 마디 보태길 바랬는데,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한껏 신이 난 그 녀석들 얼굴에 침을 뱉는 기분이 될 것 같으니 닥치고 있자고 마음 먹었다. 하지만 그러기는 힘들었다. 친구들은 돈까쓰를 썰어 먹으면서도 계속 영화 이야기를 했고, 내게도 계속 말을 붙였다. 나 또한 맞장구를 쳐주었다. 방금 보고 나온 영화라 기억이 생생하니 할 이야기도 많을 수 밖에. 그런데, 나와 단 한 번도 영화를 같이 보러 온 적은 없지만, 그 친구들 중에 나와 가장 오래 알고 지낸 친구가, 갑자기 아무도 섣불리 묻지 않던 질문을 던졌다.


"와? 재미 없드나?"

"아니..뭐."


웅성웅성. 왜? 재미가 없다고? 뭐가? 왜? 나는 재밌던데..


그 친구가 다시 물었다.

"그럼 니는 재밌는 영화가 뭔데? 나도 함 보게. 말해봐라."

"솔직하게?"

"응."

"재밌는 영화가 없다."

"하나도 없나? 내한테 말해줄만한 것도 없나?"


떠오르는 영화가 정말로 한 편도 없었다. '고공침투'를 얘기하면, 내용이 좀 어렵다고 할 것 같고, '덩크 슛'을 보라고 하면, 차라리 농구를 하러 가자고 할 거 같고... 그런데 갑자기 그 친구가 이렇게 말했다.


"나는 재밌던데, 이거. 워터월드. 나는 잘 모르지만, 뭐 이 정도면 재밌는 거 아니가?"

"뭐...영화를 많이 안 보면, 재밌을 수 있지. 응. 재밌다고 해도 되지."

"이거 보고 우리끼리 이만큼 떠들었으면 재밌다고 해야지. 이것도 재미가 없으면 뭐가 재밌노? 그냥 재밌다 해라."


그 친구의 그 말에, 큰 누나에게도 털어놓지 못한 진심이 툭 튀어나왔다.


"이걸 재밌다고 하면...내가 저번에 실컷 욕한 영화들은 걸작이다, 걸작. 본 영화들 전부 싹 다 재밌다고 해야 된다고."

"그라면 안 되나? 누가 뭐라 하나?"



다 재밌는 거


"응?"

"나는 영화는 그냥 다 재밌던데. 그라면 안 되나?"


안 될 게 뭐가 있겠나?

돈까스를 먹고 나와서 포스터 담벼락 앞으로 향한 녀석들은 벽에 붙은 영화 포스터를 하나씩 가리키며 내게 끊임없이 질문을 퍼부었다. 이건? 저건? 이거랑 이거 중에는? 뭐가 더 재밌는지, 얼마나 더 재밌는지, 어떤 내용인지, 하나만 보라고 추천할 거면 뭘 고를 건지, 그 이유는 뭔지.


그러는 동안 내가 대답을 망설이거나 고민을 하면, 워터월드에서 재미있었던 장면이 하나도 없었는지 물어봤다. 재밌는 장면이 하나도 없을리 없잖아. 결국 나는 인정했다.


"재밌더라. 재밌다고!"

"그럼 여기 있는 거 다 '워터월드' 만큼 재밌다고? 진짜?"


영화에 별 취미 없던 애들이 진심으로 눈이 반짝거렸다. 이들에겐 '워터월드'가 그 정도로 재미있었단 말인가. 그날 이후로, 맨 처음 내게 영화를 보러 가자고 했던 녀석은 나만큼 극장에 자주 가게 되었고, 가끔은 내게 영화를 추천해주기까지 했다.


그래, 다 재밌는 거 맞다. '워터월드'와 '케빈 코스트너'에겐 미안한 말이지만, 나는 정말로, 그 날 그 녀석들 앞에서 '워터월드는 재미있는 영화다.' 라고 억지로 소리내서 말하고 나서, 놀랍게도 정말로 그리 생각이 되더니 마침내 슬럼프를 벗어났다. 진짜로.


아직도 그 날의 대화가 생생하다. 이 매거진은 그래서 쓰기 시작했다.


재미 있으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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