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호주로 떠난 뒤로 동생과 더 자주 연락하게 되었다. 호주와 한국의 시차는 고작 1시간 30분이었고, 나는 할 일 없는 어학원 학생이었으며 한편으로는 나 또한 호주에서 작은 고립을 마주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주일에 한인 교회에 나가 한국인 친구들을 만난다던가, 평일에도 종종 약속을 잡긴 했지만 한국만큼 내 바운더리가 아니었기에 홀로 있는 시간이 늘어났다. 나에게는 더없이 가장 평화롭고 행복했던 시간. 나는 그 작은 고립을 자유라고 느꼈다.
아무도 나를 모르는 곳에서,
내가 원하는 시간에 아침을 맞이하고,
먹고 싶은 음식을 직접 요리해 먹고,
원하는 관계만 맺을 수 있는 자유로운 곳, 호주.
작은 외로움마저 반가웠다. 조금 외로워진다는 것은 아주 아름다운 노을을 보거나, 바다에 나가 파도치는 것을 볼 때 함께 호들갑 떨 사람이 없다는 정도였다. 터치 몇 번으로 사진을 찍어 공유하고, 영상통화를 걸면 되는 일이었기에 큰 문제가 될 외로움은 아니었다. 딱 적당했다. 동생에게 사진을 찍어 공유하고, 영상통화를 걸면서 산책하며 한참 수다를 떨고... 오히려 한국에서보다 더 돈독해졌다. 나는 아주 안온한 생활을 즐겼고, 나는 내가 원할 때 언제든 그 애와 통화할 수 있었다.
동생은 조금 달랐다. 그 애의 삶은 대전에서의 고립 그 상태로 변한 것이 없었다. 동생은 이모의 눈을 피해 이모가 한창 일하고 있을 시각에만 배달음식을 시켜 먹으면서 스트레스를 풀었다. 그 시점의 동생은 피해의식이 심했기에 얹혀사는 자신의 존재가 이모에게 짐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내가 보기에 동생은 또다시 식모살이를 시작한 것 같았다. 다만 이모는 동생에게 약간의 용돈을 준 것만 빼면 원주에서의 생활과 크게 다를 바 없었다. (원주에선 그 약간의 용돈도 받지 못했지만 한마디 불평이 없었던 너.)
새벽 4시에 출근하는 이모를 위해 새벽 3시에 일어나 김밥을 싼다던가, 그날의 점심 도시락을 싸주고, 이모가 나가면 다시 한숨 자고 일어나서 아무도 없는 집을 청소하고, 유튜브에서 유행하는 음식을 두어 번 시켜 먹어보고 하는 것이 다였다. 그 사이 달라진 것이라곤 조금 더 자주 전화하는 언니와 수다 떠는 시간이 늘었다는 것이겠지.
우리는 통화하면서 꽤 많은 유대감을 느꼈다. 그 어떤 친구랑 얘기하는 것보다도 더 깊은 공감과 유대를 느낄 수 있었다. 그것은 우리가 같은 부모 밑에서, 같은 트라우마를 가지고, 같은 공간의 추억을 갖고 있기 때문이었다. 동생은 종종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어린 시절의 일들을 꺼냈다. 나는 동생만 기억하는 그 어린 시절의 추억을 다시는 듣지 못한다는 사실이 굉장히 안타까웠다.
좀 더 자주 물어볼걸.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추억들은 영원 속으로
추락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