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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우시카 Aug 31. 2024

큰 꽃은 커서, 작은 꽃은 작아서 나는 좋더라!

                           - 큰석류풀 / 석류풀










얼추 30년 만에 이사를 하게 되었습니다.

묵혀 둔 살림살이에 버릴 것은 끝도 없이 나오고, 그것들을 정리하면서 잊었던 기억들도 쉴 새 없이 떠오릅니다. 이제 이것이 내 생의 마지막 이사가 되길 바라면서 버려야 할 것들을 다 정리해버리고 싶습니다만, 그 일이 그렇게 쉽지만은 않습니다. 남편도 가진 책을 다 정리한다고 말은 하지만 결국은 거의 버리질 못하는 모양입니다. 아이들에게 전화를 걸어 남겨 두고 간 책, 물건, 사진, 연애편지들을 어떻게 할까 물어보니 다 버리라고 합니다. 그러나 막상 버리지 못하는 것은 나입니다. 그 모든 물건 하나하나에, 그 사진 한 장 한 장에 배어있는 추억이 너무 소중해서입니다. 즐거움도 괴로움도 지금에 와서 되돌아보면 다 소중한 내 삶의 한 장면들이었기에 자꾸 눈물이 나려 합니다. 이를 악 물고 버리는 작업을 오늘도 하고 있습니다. 


무더운 여름날 이사준비를 하는 것은 무척 힘이 드는 일입니다. 지치고 피곤합니다. 하던 일을 잠시 내려놓고 길을 나서서 무작정 걸어봅니다. 늘 다니던 천변에는 사람과 강아지들이 북적거리고, 흐린 날이라고는 해도 한 여름의 내리쬐는 볕을 피할 길 없어 오늘 같은 날은 평소에는 잘 다니지 않는 길을 택해 걸어봅니다. 언덕을 넘어 걷다 보니 큰길을 만납니다. 돌아갈까? 왜냐하면 그 큰길은 바로 터널로 연결되기 때문입니다. 언젠가 눈이 펑펑 쏟아지던 날, 자동차 출근을 포기하고 집을 나섰지만 버스라고 해서 쌩쌩 다니지는 않기에 직장까지 2시간 가까이 걸어서 출근했던 기억이 납니다. 꼭 그래야만 하는 것은 아니었으나 펑펑 내리는 눈을 원 없이 맞으며 걸어보고 싶다는 낭만 가득한 바람 때문이었지요. 그때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이 ‘터널 통과하기’였습니다. 그때만 해도 터널 안에 인도와 차도를 구분해 주는 가림막이 전혀 없었던 터라 터널을 걸어 통과하는 내내 엄청난 자동차 소음에 귀가 먹먹해지고 정신이 없었던 시간. 그날따라 흰색의 반코트를 차려입고 나섰는데 터널을 다 통과하고 나니 거짓말이 아니라 정말로 흰색의 코트가 회색으로 변하기도 했습니다. 다시 그 터널을 통과하고 싶지는 않았습니다. 잠시 주춤합니다. 


터널 앞 길 건너편에는 큰 교회가 있습니다. 큰 교회... 죄 많은 현대인들의 구원에는 그 정도 규모의 교회가 필요할 지도 모르겠습니다. 그 교회 쪽 길로 살살 걸어봅니다. 일요일이 아니라서 교회는 한적해 보였지요. 그때 제 눈에 띄었습니다. 작은 꽃, 희끗희끗한 작은 꽃! 보도블록과 가로수 주변의 흙 위를 기며 꽃을 피운 식물, 그 작은 꽃 사이를 부지런히 들락거리는 개미떼..... 이 힘든 날, 구원은 이렇게 찾아오나 봅니다. 피로와 우울은 순식간에 멀리 날아가 버렸고 나는 그 어여쁜 꽃에 정신없이 빠져 듭니다. 집에 돌아와 카메라를 들고 다시 그 구원의 장소를 찾아갑니다. 다리로 기어오르는 개미떼를 털어내며 숨을 참아가며 사진 찍기에 몰입합니다. 꽃이 너무도 작아서 집중하지 않으면 찍는 것은 고사하고 꽃을 찾아내는 것도 쉽지 않습니다. 사투(?) 끝에 사진으로 담아 온 그 식물의 이름을 내 입술에 올려봅니다. ‘큰 석 류 풀!’  


도시에도 꽃들은 많습니다. 보지 못하고, 혹은 보지 않은 채 지나치는 꽃들... 꽃들은 내 주위에 늘 풍족하게 피어있습니다. 하나의 꽃을 새롭게 알게 된다는 것은 하나의 작은 세상을 새로 만나는 것과 같습니다. 그것이 아무리 하찮게 보이는 꽃이라 하더라도 지금까지 내가 알지 못했던 미지의 세상임에는 틀림이 없으니까요. 거기에 더해 그 꽃의 이름을 불러줌으로써 그 꽃과 나의 내밀한 관계가 시작됩니다. 이제 그 관계는 끊어질 수 없습니다. 내 세상은 이렇게 하여 나날이 넓어지고 나는 나날이 부자가 되어갑니다. 


참으로 신기한 것은 일단 어떤 꽃을 보고 알게 된 후에는 그 꽃이 자주 눈에 띈다는 것입니다. 이번 경우도 그렇습니다. 큰석류풀을 보려면 언덕을 하나 넘어 한참을 걸어야 가야 했는데 뜻밖에도 늘 걸어 다니는 길, 초등학교 정문 옆의 보도에서 이 꽃 한 무더기를 새롭게 발견하게 된 것입니다. 큰 기쁨...... 워낙 학교 정문 가까이에 있어서 개학이 되면 환경정비라는 이름으로 행여 뽑혀나가지나 않을까, 매일 산책길에 들러 들여다보며 인사를 건넵니다. ‘안녕? 아직은 잘 있구나. 예쁜 모습, 고마워!’ 왜냐하면 장마가 끝나자 이미 크랙 정원의 많은 꽃들이 뽑혀나가 동네의 거리가 말끔(?)해졌기 때문입니다. 도시가 미덕이라고 내세우는 것 중 하나가 바로 이‘깔끔함’이 아닐까도 생각합니다. 크랙에서 피어난 식물들을 다 뽑아내지 않는다는 것은 일종의 게으름이나 심지어는 도덕적인 불감증이라고 손가락질받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나는 크게 속상해하지 않으려 합니다. 몇 주 후면 다시 나의 크랙 정원에는 새로운 꽃들이 자라날 테니까요. 



뜻밖의 만남은 또 한 번 이루어졌습니다.

그동안 한 번도 보지 못했다고 생각했던 꽃, 석류풀을 발견한 것입니다. 이름이 ‘큰’ 석류풀인 걸 보면 석류풀보다는 클 터인데 석류풀을 본 적이 없으니 답답했습니다. 그런데 오래 살던 바로 그 아파트 마당의 한 구석에서 석류풀을 만났답니다. 뭐든지 보고 싶으면 ‘짠~~’하고 내 눈앞에 나타나는 것을 보니 나는 틀림없이 전생에 나라를 구했었나 봅니다. 


얼핏 보기에 같은 이름을 공유한다는 것이 낯설게 느껴질 정도로 내게는 두 식물의 분위기가 퍽 다르게 느껴졌습니다. 그렇기는 해도 이렇게 해서 내 세상으로 새롭게 들어온 석류풀을 소개합니다.             






운이 좋았는지 꽃도 몇 송이 달고 있었는데 무엇보다 기뻤던 것은 석류풀을 보고 나니 왜 큰석류풀에 ‘큰’ 자가 붙었는지 이해가 나름 되었다는 점입니다. 꽃의 크기에 확실한 차이가 보이네요. 큰석류풀의 꽃은 석류풀의 꽃에 비해 상대적으로 크고 모양도 살짝 길쭉 뾰족하여, 보다 더 동글동글하게 보이는 석류풀꽃에 비해 좀 더 선명하고 깔끔한 느낌이었습니다. 나는 그런 깔끔함과 단정함이 마음에 들었지만, 석류풀 꽃의 귀염성에 더욱 끌리는 사람들도 있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이제 꽃 발견의 무용담은 그만하고 꽃 자체에 대해 생각할 시간입니다. 

내 눈에는 석류와 비슷한 점이라고는 없어 보이는데 왜 이름은 석류풀일까요? 아하, 석류나무의 잎사귀를 닮은 모양의 잎을 달고 있어서 석류풀이라고 하기에 석류나무의 잎사귀 사진을 찾아봅니다. 닮았다고 우긴다면 아니라고 말하기도 그렇지만 이 정도의 유사함을 가지고 그런 이름을 붙였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조금 더 깊숙이 들어가 봅니다. 일본에서는 이 식물을 석류초(石榴草)라고 부르는데 아마도 여기서 차용한 이름일 것이라는 자료가 더 그럴듯하게 보입니다. 자 이제 이름에 대한 궁금증은 딱 내 수준에서 해결된 것으로 생각하렵니다.  



석류풀은 우리나라의 자생식물인데 반해, 이 큰석류풀은 귀화식물이라고 합니다. 두 식물을 구분 짓는 가장 큰 특징은 잎차례와 꽃차례입니다. 큰석류풀은 잎이 한 마디에 4-7개가 돌려나는데 비해 석류풀의 잎은 한 마디에 3∼5개가 돌려나며, 윗부분의 잎은 마주난다고 합니다. 또 석류풀은 ‘취산꽃차례’로 피는데 비해 큰석류풀은 꽃들이 잎겨드랑이에서 모여 핀다는 점도 차이라고 합니다. 이 외에도 큰석류풀은 가지를 많이 쳐서 땅을 덮는 특징이 있는데 석류풀은 그렇지 않은 점도 차이라고 합니다. 위의 사진에서도 볼 수 있듯이 석류풀은 곧게 서서 자라는 데 비해 큰석류풀이 땅 위를 기는 듯 덮는 것을 확인할 수 있겠습니다. (1, 3번 사진) 

여기서 잠시 곁길로 나와 새로 나온 낯선 용어인 ‘취산꽃차례’에 대해 조금 더 알고 가려합니다. 한자 치고도 꽤나 어려운 한자라서 그런지 그 의미가 직관적으로 떠오르질 않습니다. 취산꽃차례는 꽃대 끝에 있는 꽃이 먼저 다 핀 다음, 그 아래 가지와 곁가지에 차례로 꽃이 피는 꽃차례입니다. 그림으로 표현해 봅니다.

번호는 꽃이 피는 순서입니다.  

중심이 되는 꽃대(화축)의 끝에서 1번 꽃이 핍니다. 그 다음으로 갈라진 꽃자루(화경)의 중심에서 2번 꽃이 피지요. 그리고 나서 그 주위의 꽃들이 피어납니다. 만약 다시 또 한 번 더 갈라진 꽃자루(소화경)에 꽃이 핀다면 똑같은 원리의 순서로 꽃이 피어나는 것이지요.  왜 이렇게 복잡한 순서로 꽃을 피울까요? 꽃이 순서 없이 피어날 때 보다 좌우 균형이 잘 맞아 가느다란 꽃대나 꽃자루에서도 더 많은 꽃을 피울 수 있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꽃 중에는 큰석류풀처럼 ‘큰’이라는 접두어가 붙은 것은 꽤 많습니다. 큰개미자리, 큰개별꽃, 큰개불알풀, 큰괭이밥, 큰까치수염, 큰땅빈대, 큰바늘꽃, 큰방울새란, 큰벼룩아재비, 큰애기나리... 열거하자면 끝이 없을 것 같습니다. 대부분 원종에 비해 그 몸체가 큰 것도 사실이고요. 물론 게 중에는 몸체 자체가 큰 것이 아니라 잎사귀가 크거나 꽃의 크기가 큰 경우도 있으니 무조건 크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그 ‘큰’이라는 글자를 곧이곧대로 받아들인다면 때로 실물을 보고는 웃음이 빵 하고 터질 수도 있답니다. 큰벼룩아재비와 큰개미자리가 얼마나 큰(?)지 한번 볼까요?             





위쪽 사진은 누군가의 무덤 위에서 피어난 ‘큰벼룩아재비’입니다. 아래쪽은 ‘큰개미자리’, 다른 식물들과 비교해 보면 그 꽃이 얼마나 작은지 짐작이 되시지요? 크다, 작다는 단어 자체에 함몰되면 안 되는 이유입니다. 큰석류풀도 마찬가지입니다. 크랙 정원의 꽃을 보려면 모든 식물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편견 없는 시선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언제든 행복해져야겠다는 마음의 준비만 있으면 됩니다. 큰 꽃은 커서 예쁘고, 작은 꽃은 작아서 어여쁩니다.  



이삿짐을 꾸린다는 것이 사실은 낡은 짐들을 버린다는 것을 뜻합니다. 이미 낡아 먼지만 푸석거리는 책들, 어쭙잖은 논문을 쓸 때 초고로 만들어 놓았던 노트, 어디에 넣어 둔 것인지 까맣게 잊고 있다가 갑자기 튀어나온 옷, 젊은 시절 받았던 월급 명세표... 새록새록 추억은 내 시선을 따라 머릿속으로 들어갔다가 심장으로 내려가는가 싶더니 끝내는 다시 내 눈을 비집고 나와 눈물로 변합니다. 


무엇보다도 아이들이 자라면서 만들어냈던 온갖 잡동사니 앞에서 이걸 버려야 할지 또 한 번 짐으로 꾸려서 보관해야 할지를 망설이게 됩니다. 며칠을 망설이다 결심했습니다. 버리자! 이 물건들을 버린다고 기억이 사라지는 것도 아니고, 꼬꼬마 시절의 모습에 못 박혀 이미 어른이 된 그 아이들을 똑바로 바라보며 새로운 관계를 만들어 가야 하는 당위를 잊을까 걱정이 됩니다. ‘관계’란 고정된 것이 아니기에 늘 새롭게 만들어가야만 하는 것이지요. 석류풀이나 큰석류풀이나 각각 나름대로의 아름다움으로 존재하는 것처럼, 아기 때나 어린 시절이나 훌륭한 어른으로 큰 지금이나 아이들은 언제나 소중한 존재였고 지금도 소중한 존재입니다. 사랑의 마음으로 본다면 크다든가 작다는 것은 큰 의미를 가지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굳이 그 아이들이 어릴 때의 추억에 사로잡혀 있을 이유도 없습니다.  



이제 담담한 마음으로 버리고 또 버리고 다시 또 버려서 가볍게 새로운 거처로 옮겨 가고 싶습니다. 그러니 앞으로도 며칠간은 조금 울고, 많이 웃고, 그리고 지칠 만큼 일을 해야 할 것 같은 예감이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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