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개불알풀
독감에 걸려 1주일째 골골거리고 있습니다. 그 사이 봄도 또한 곱고 조용한 발걸음으로가 아니라 절뚝, 절뚝거리며 오고 있습니다. 눈이 내리는 가 했더니 다음 날에는 한 여름의 기온이 되기도 하고, 태풍처럼 강한 바람으로 겁을 잔뜩 주는가했더니 아니나 다를까 그 다음 날에는 다시 기온이 곤두박질치고... 매화꽃 향기가 가득해야 할 저 남녘에서 들려오는 거센 산불 소식은 우울에 우울을 더하기만 합니다. 가슴이 부풀어 오르다가도 다시 오그라드는 그런 이상한 봄날입니다.
기예르모 델 토로 감독의 판타지 영화 ‘판의 미로(Pan's Rabyrinth)’를 보았습니다. 기대를 훨씬 웃도는 감동, 문득 오래전 보았던 같은 감독의 작품 ‘물의 형태 (The Shape of water)’를 떠올렸습니다. 동화가 가능하지 않은 세상이야말로 동화가 절실하게 필요한 것일까요? 두고두고 찬찬히 음미하며 다시 보고 싶은 영화 2편이 주머니 속에 몰래 감춰 둔 사탕처럼 내 맘을 설레게 합니다.
며칠 후에는 소설 <인어 남자>(칼요한 발그렌 지음, 최세진 옮김, 현대문학)를 우연히 읽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복지국가의 모범이라고 생각하는 스웨덴의 한 구석에서 살고 있는 열다섯 소녀의 이야기입니다. 부모의 무관심과 학대, 학교 폭력, 한 끼 밥마저 해결 불가능할 정도의 가난... 소녀가 겪는 고통은 사회적 문제이기도 하지만 일부는 인간의 근원적인 악마성과 맞닿아 있습니다. 학교 폭력의 문제가 바로 그렇습니다. 소름이 돋을 정도로 사실적이면서도 눈을 감고 고개를 돌려버리고 싶을 만큼 잔혹한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그런 환경 속에서도 장애를 가진, 잔인한 학교 폭력의 희생자인 동생을 부모를 대신해 거두어 먹이고 보호하며 사랑해 줍니다. 인간이 가진 다른 하나의 특성, 약자를 돌보고 공감하는 모습입니다. 벗어날 수 없을 것 같은 삶의 진창 속에서 간신히 하루하루를 살고 있던 소녀는 우연히 인어 남자와 만나게 되고 그 만남을 통해 삶의 희망을 갖게 됩니다. 읽으면 읽을수록 영화 ‘물의 형태’와 그 느낌이 겹쳐지는 소설이었습니다.
깊은 울림을 갖는 두 장르의 예술작품을 접하며 우울한 봄날을 견딥니다. 그러나 판의 미로나 인어 남자 모두 결코 행복한 결말로 끝나지 않는다는 점에도 주목합니다. 현실은 동화와 같지 않기에 ‘그 후로 오랫동안 그들은 행복하게 살았다.’라는 결말은 절대 가능하지 않습니다. 아무리 동화라 해도 진실의 일부를 담고 있지 않다면 그것은 예술이 될 수 없기 때문일 것입니다.
길을 걷다 새로운 꽃을 발견합니다. 화사한 색과 크기 때문에 이른 봄이면 눈에 쉽게 띄는 ‘큰개불알풀’이 아니라 작은 꽃, ‘개불알풀’을 우연히 만나게 되어 무척 반가웠습니다.
정말 작은 꽃이었습니다. 특히 초봄 아직 어린 개체일 때에는 꽃이 너무 작아 땅을 기는 줄기에 묻은 먼지인지 낙엽의 부스러기인지 구별조차 어렵습니다. 사랑받지 못하는 못난이, 척박한 저 구석에서 간신히 피어나는 꽃... 그러나 놀랍게도 이 꽃의 주변에는 개미들이 부지런히 들락거리고 있었습니다. 아직 화려한 나비들이나 힘 센 벌들이 나타나기 전인데 이 겸손한 꽃 곁에는 눈에 띄지 않는 작은 생명체들이 모여 나름대로의 삶을 가꾸고 있었습니다. 누군가에게는 이토록 소중한 꽃, 그 구석에서 자잘한 생명들을 지키고 있는 꽃... 이 봄 나를 감동케 한 바로 그 작품 속의 주인공들과 같은 꽃입니다.
패배자, 주변인, 소수자, 핍박받는 사람, 사회적 약자... 그래도 그들은 남몰래 작은 사랑을 이어가고 용기를 내어 연대하고 변화를 실현해 냅니다. 그러기에 그들이 항상 불행한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승리자, 다수, 강자, 핍박하는 자들보다 더 자주, 더 긴 시간 행복할 지도 모릅니다. 봄날의 백일몽일까요? 작은 꽃을 앞에 두고 나는 한낮에도 꿈을 꿉니다.
영화와 소설의 주인공들이 만났던 인어나 괴물이 일반인들의 눈에는 결코 아름답지 않았던 것처럼 이 꽃도 한 눈에 ‘예쁘다!’라고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러나 조금 확대해 보면 나름의 아름다움이 눈에 들어옵니다. 큰개불알풀이나 선개불알풀처럼 꽃부리(흔히 꽃잎이라 불립니다.)는 네 갈래로 갈라져 옅은 분홍 내지 보라색으로 그러데이션 되어 있습니다. 꿀이 있는 꽃의 한 가운데로 곤충을 안내하는 허니 가이드와도 같습니다. 그리고 세 종(種)의 꽃 모두 1개의 암술과 2개의 수술을 가지고 있습니다.
확대해서 볼까요?
잎과 줄기에는 잔털이 있음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또 꽃자루와 잎자루가 거의 없는 듯 짧은 선개불알풀과는 달리 꽃자루와 잎자루의 길이가 길어 제법 우아한 모습입니다
개불알풀의 원산지는 동아시아이며 큰개불알풀은 유럽이 원산지인 귀화식물입니다. 귀화한 정확한 연도는 알 수 없으나 개불알풀이 우리나라에 들어온 것은 좀 오래전인데 비해 큰개불알풀은 훨씬 늦게(개항 이후?) 귀화한, 상대적으로 새로운 꽃이라고 합니다.
이 한 무리의 꽃들의 이름이 이토록 요상한 까닭은 무엇일까요? 그리고 이들의 이름을 둘러싸고 꽃의 이름을 다시 붙여야 한다는 익숙한 주장에 더해, 식물의 이름에도 남아있는 일제의 잔재를 청산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높아지고 있는데 그 사연이 궁금해집니다.
뜨거운 이 논란에서 문제가 되고 있는 것은 크게 두 가지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하나는 그 이름 자체가 부르기 참 민망하다는 것입니다. 왜 하필 수컷개의 성기(性器)를 갖다 붙였느냐는 것이지요. 이런 논의는 이미 여러 번 다뤘으므로 지금쯤이면 익숙하게 느껴지실 것 같네요.
개불알풀이라는 이름은 열매의 모양이 개의 불알을 닮았다 데서 유래했다고 합니다. (중대가리풀에서 한번 언급했던 ‘개불알꽃’과는 다른 식물이라는 사실에 주의를 기울이셔야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 이름이 상당히 민망하다는 것이지요.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민망한 이름이야 다른 여러 식물명에서도 확인이 되고, 또 우리 사회 곳곳에서 더욱 민망한 현상들이 밝은 대낮에도 일어나고 있는 마당에 유독 이 꽃의 이름만이 그렇게도 민망한 것인지 나는 선뜻 동의하기 어렵습니다. 누군가에게 민망한 이름이면 옛사람을 포함한 모든 이에게 다 민망한 이름이 되는 것일까요? 그리고 민망하면 맥락도 알 길이 없는 어여쁜 이름으로 그냥 바꿔도 되는 것인가요? 중언부언이 되겠지만 이런 물음이 다시 한 번 떠오릅니다.
두 번째 문제는 새로운 논쟁거리로서 그것이 일제에 의해 억지로 개명을 당한 이름이라는 주장입니다. 일종의 창씨개명의 피해자라는 것이지요.
그런 주장을 하는 사람들에 의하면 이 꽃의 일본명은 ‘이누노후구리(イヌノフグリ, 犬の陰嚢)’로 19세기 중엽에 이런 이름이 붙여졌는데, 이 일본 이름을 우리말로 직역하면 개불알풀이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흉측한 이름은 원래 우리의 것이 아니라 순전히 일본 이름을 그대로 직역하면서 붙여진 것이라는 주장이지요. 일리 있는 주장이라는 생각은 들지만 한편으로 그렇다면 이 꽃의 원래 이름은 무엇이었을까 하는 의문은 남습니다. 개명 전의 이름을 모르니 이 주장이 정말 맞는 것인지 확신을 갖기 어려웠습니다.
자료를 더 찾아보니 이런 주장이 있네요.
개불알풀이라는 우리말 표현은 해방된 이후인 1949년의 <조선식물명집>에서 처음 발견된다고 합니다. 즉 일제강점기에 발생한 일은 아니라는 점에 주목해야 합니다. 일본명의 영향을 받은 것은 맞지만, 해방 이후에 이 식물을 가리키는 우리말을 찾기 어려워 기존에 존재하던 우리 꽃의 이름인 ‘개불알꽃’을 함께 참고하여 만든 이름이라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개불알풀’이라는 이름에 대해 굳이 창씨개명 운운하는 것은 타당성이 크게 떨어진다는 것입니다. (https://www.thecolumnist.kr/news/articleView.html?idxno=2730에서 인용)
이런 사정을 알고 나니 많은 이들이 새롭게 사용하는 ‘봄까치꽃’이라는 이름이 사랑스럽기는 하지만, 정식 개명은 조금 더 조심스럽게 접근해야 할 문제로 보입니다. 게다가 개불알풀이 봄까치꽃으로 그 이름을 바꾸게 된다면, 큰봄까치꽃, 선봄까치꽃, 눈봄까치꽃, 좀봄까치꽃들도 덩달아 생겨나야 할 테니 문제가 생각보다 더 복잡하게 전개될 수도 있을 것 같네요. 개인적으로 나는 개불알풀이라는 이름이 그리 민망하게 느껴지지 않습니다. 오히려 정겹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사람마다 취향과 생각이 다른 법입니다. 내 취향이 너무 저급하다고 꾸짖으시는 건 아니겠지요?
최근 들어 서울의 곳곳에서도 이 개불알풀 집안의 꽃들이 자주 관찰됩니다. 그만큼 적응력이 좋고 그 기세가 강하다는 얘기가 되겠지요. 그 일부 원인은 기후 변화일 테지만 이들 식물의 효율적인 번식 전략 때문이기도 합니다. 즉 별꽃이나 닭의장풀, 제비꽃처럼 개불알풀도 일단은 딴꽃가루받이를 먼저 시도합니다. 하지만 여건이 불리하면 꽃잎을 닫고 수술의 꽃가루를 자신의 암술머리에 붙여 제꽃가루받이도 하지요. 플랜 B의 준비! 그렇다 보니 이처럼 빠른 번식력을 보이게 되는 것입니다. 크랙 정원의 꽃들은 정말 대단합니다.
마지막으로 양지쪽에 무더기로 피어난 큰개불알풀도 소개해 봅니다. 꽃의 크기나 색에서 개불알풀과는 큰 차이가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 봄이 개불알풀처럼 조용하고 다정한, 그리고 큰개불알풀의 모습처럼 화사하고 풍성한 그 본래의 모습을 되찾게 되기를 간절히 기다려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