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깨풀
'백사마을’이라고 들어 보셨습니까?
서울특별시 노원구 중계본동 산 104번지 일대의 마을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그러나 어떤 이들은 이 마을의 이름을 다르게 해석하기도 합니다. 허허벌판에 세운 마을이라는 의미의 ‘흰모래밭, 백사(白沙) 마을’을 의미한다고요. 백사마을은 서울의 마지막 달동네, 가난과 소외된 사람들의 마을입니다. 이 마을은 1960년대부터 각종 재해를 입은 이재민들이나 철거민들이 모여 살면서 형성되었다고 합니다. 본격적으로는 서울시가 청계고가도로 건설을 위해 청계천변 무허가 판자촌을 철거하자 오갈 데가 없어진 철거민들이 이 마을로 모여들면서 도시 빈민의 이주정착촌으로 자리를 잡게 되었습니다. 그 후로도 1980년대~90년대에 상계, 중계 지구에 대규모 아파트 단지를 조성하기 위한 택지 개발을 할 때 살던 곳에서 쫓겨난 사람들, 1997년 IMF 외환위기로 삶의 벼랑 끝으로 몰린 사람들의 마지막 기착지가 되어 왔다고 합니다. 그렇게 백사마을은 늘 '쫓겨난 사람'들이 모여 살던 곳입니다. 네, 그렇습니다. 해마다 크리스마스나 연말이 되면 온갖 정치인들이 모여들어 ‘연탄 나르기’ 행사를 하며 콧등에 까만 연탄재를 묻히는 퍼포먼스가 행해지는 바로 그 마을입니다. 너무 좁고 가팔라서 자동차로는 연탄을 나를 수 없기 때문입니다.
백사마을은 아직도 예전의 모습, 바로 나만한 나이 때의 사람들이 거쳐 온 가난의 모습, 그것도 농촌보다 더 누추하고 뼈저리게 눈물겨운 도시의 가난한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습니다. 좁고 굽은 골목길, 우체부 아저씨마저도 편지 한 장을 배달하기 위해서는 여러 번 길을 물어야 할 정도였다고 합니다. 그래도 사람이 사는 마을이라 골목마다 화분과 손바닥만 한 화단에는 정성으로 가꾼 꽃이 자라고 있었습니다. 지붕 위에는 호박덩굴이 벋어 자라고 가을이면 거두어들인 채소를 말리며 겨울 먹거리를 준비하는 모습도 흔히 볼 수 있었습니다. 더운 여름날이면 좁디좁은 마당에 올망졸망 식구들이 밥상에 둘러앉아 저녁을 먹는 모습을 훔쳐볼 수도 있었지요.
재개발을 둘러싸고 어떤 논의들과 치열한 싸움이 지나갔는지 나는 잘 알지 못합니다. 어쨌든 애초 서울시가 달동네 지형과 골목길을 그대로 살려 단독주택 형태의 임대주택 단지를 지으려고 했지만, 돈의 위력 앞에서 모든 계획은 백지화되고 그 자리에는 2028년까지 초고층 아파트 34동이 들어설 예정이라고 합니다. 상상만으로도 머리가 아파옵니다. 그렇게 해서 우리들의 과거와 그 아픔, 상처는 시멘트 숲 속으로, 또는 시멘트 저 깊숙이 묻혀 버리는 것이겠지요. 현재 백사마을은 이미 90% 가까운 주민들이 떠나갔고, 올해 안으로 주민 이주를 마무리한 후 빈집 철거까지 진행할 계획이라고 합니다. 이제 이 마을에는 스산한 고요함만이 가득합니다.
내가 아직 초등학교(그때는 아직 국민학교였습니다.) 시절, 이때까지 중학교 입학시험이 있어서 유난히 교육열이 높았던 부모님은 나를 친척집에 맡겼고 가족들은 군인이셨던 아버지를 따라 전방 부대로 옮겨 다녔습니다. 아이러니컬한 일은 부모님께서 이렇듯 눈물겹게 공부를 시켰건만 정작 내가 6학년이 된 그 해 여름방학에 갑자기 중학교 입시가 없어지고 무시험 추첨제로 바뀌었다는 사실입니다. 입시의 중압감에 눌려있던 어린 나는 무척 좋아했지만 지금 생각하면 정말 말도 안 되는 일이 벌어지던 시절이었습니다. 그렇게 중요한 교육 정책이 하루아침에 바뀔 수 있다는 사실, 그리고 그 이유가 어떤 한 ‘아이’ 때문이었다는 소문까지... 요즘 같으면 상상조차 하기 어려운 일이었지요. 역사는 느리고 답답한 속도로 이긴 하지만 그래도 앞을 향해 조금씩 나아가고 있기도 하나 봅니다.
아무튼 이때 나는 부모님의 기대에 부응하고자(?) 어린 나이에 서울 변두리 친척집에 살면서 도심 한복판의 학교까지 버스로 1시간 넘게 통학했습니다. 그러는 가운데 본의 아니게 서울 개발의 역사적 현장을 많이 목격할 수 있었습니다. 물론 그 당시에는 그 의미를 전혀 알지 못했지만요. 가장 대표적인 사건이 바로 막히는 길, 답답한 버스 속에서 긴 시간을 버텨낼 수밖에 없었던 청계고가도로 건설이었고, 또 광화문 지하도가 개통되는 것도 경험했습니다. 아마 광화문 지하도 개통일이었던 모양입니다. 늘 건너 다녔던 길이 막혀버리고 경찰 아저씨들께서는 막무가내 지하로 들어가라고 하니 어린 나는 너무 당황스러웠는데, 어쨌든 학교는 가야 하겠고... 지하도 바깥에서 내가 가야 하는 방향을 노려보며 행여 방향을 잃을까 전쟁터에 나선 병사와 같은 마음, 죽음을 무릅쓴 심정으로 지하도를 용감하게 건넜던 기억이 납니다. 도시화, 선진국으로 가는 길이 어린 나에게는 쉽고 좋은 것만은 아니었습니다. 그런 시간 속에서 내 어린 시절의 서울 풍경을 서서히 사라져 가고 있었던 셈이지요.
오랜만에 서울에서 근무하시게 된 아버지와 함께 온 가족이 한강변에서 살던 그 짧았던 기간, 어느 해 홍수가 나서 불어난 한강물 위로 집채가 떠내려 오던 기억, 친구들과 함께 진흙 더미를 헤집으며 칡뿌리를 캐내어 씹고 까마중 열매를 따서 먹으며 새파래진 입술로 마냥 웃던 기억, 주전자를 주시며 도가집에 가서 막걸리를 받아오라시던 아버지의 심부름, 달달한 막걸리 맛에 마음을 빼앗겨 한 모금 슬쩍 마시며 집으로 돌아오던 추억... 내게 옛 서울은 그런 곳이었습니다. 전방 부대로 부임하는 아버지를 따라 다른 식구들이 떠난 후 4대 문 안 서울의 복판에 있는 이모 집에 잠시 맡겨졌을 때에야 나는 비로소 서울의 핵심부(?)에 도달했고, 그곳의 모습은 변두리의 그것과는 많이 달랐습니다. 좁은 골목길의 양쪽에 늘어선 마당이 있는 한옥들, 나무로 만든 그 대문들 사이 골목에서 딱지치기하는 이종 오빠의 소중한 딱지상자를 들고 있기도 했지요. 오빠의 친구들은 서울의 명문 국민학교 아이들이라 그들 사이에서 나는 촌뜨기였습니다. 그래도 괜찮았습니다. 나는 공부를 제법 잘했고, 거기에 부모님과 떨어져 친척집에서 맡겨진 아이였으므로 특별한 고아, 동화 속의 고아처럼 언젠가는 부자 아버지가 날 찾아올 아이였기에 가난도, 촌스러움도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물론 외로웠던 어린아이가 ‘나’를 주인공으로 하여 혼자 써내려 간 <소공녀> 이야기였습니다.
누군가에겐 아파트의 숲, 비싼 집값, 복잡한 거리, 약삭빠른 서울내기들의 지옥이라는 이미지로 받아들여지고 있을지 모르겠지만 서울의 모습이 항상 지금과 같지는 않았습니다. 시골이 고향인 사람들과 똑같이 서울에서 자란 사람에게 서울은, 예전의 서울은 늘 그립고 아쉬운 마음의 고향입니다.
이제 노년의 나는 다시 내 눈앞에서 사라져 가는 아스라한 옛 시간을 바라봅니다. 사람들이 떠나고 껍데기만 남은 마을, 그러나 어쩌다 아직 떠나지 않고 사람이 버티고 사는 집은 티가 납니다. 골목길에는 비질을 한 흔적이 있고, 잡초가 뽑힌 화단에는 여전히 꽃이 피고 있으며 마당에는 빨래가 걸려있습니다. 이유도 없이 눈물이 나려 합니다. 산다는 것은 그런 것인가 봅니다. 먹는 자리, 눕는 자리를 깨끗이 정리하고 예쁘게 꾸미고 나만의 공간을 확보하려 애쓰는... 마을 높은 곳에 매달린 십자가보다도 그런 사소한 흔적이 더 구원에 가깝게 느껴집니다. 마침 멀지 않은 곳에 살고 있기도 해서 나는 자주 그 마을을 근처를 서성대며 쓸 데도 없는 상념에 젖곤 합니다.
어느 날 그 마을의 골목에서 낯선 꽃을 발견합니다. 부서진 대문과 버려진 가전제품들, 동댕이쳐진 화장실 문짝, 역시 허물어져 가는 담장 밑에 소복하게 피어난 꽃!
처음 보는 꽃이라 사진에 담아두고 와서 도감을 찾아봅니다. 한참을 끙끙대다가 그 이름이 ‘깨풀’ 임을 확신하게 됩니다. 하지만 흥분했던 탓인지 사진의 핀이 흐려서 꽃의 모습을 선연하게 볼 수가 없네요. 도감을 보며 이 꽃은 암수한포기이지만 암꽃과 수꽃이 따로 있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각각의 모습이 상당히 특이하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고요. 다시 나갑니다. 하지만 이번에는 결코 서두르지 않을 작정입니다. 마치 보물을 발견하고 숨겨둔 아이처럼 내 마음은 설렙니다. 아껴두고 천천히 그 보물을 탐사할 작정입니다.
수꽃은 잎겨드랑이에서 긴 꽃대가 올라와서 작은 꽃들이 다닥다닥 붙는 ‘이삭꽃차례’를 가지고 있습니다.
<위가 수꽃, 아래가 암꽃입니다.>
암꽃은 자세히 보아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수꽃 아래쪽에 애기포대기 같은 꽃싸개잎에 싸여 피어있는데 빨간 암술도 살짝 볼 수 있습니다. 시간이 지나면 이 꽃싸개잎 속에 소중한 아기처럼 씨앗이 들어앉아 있는 모습을 볼 수도 있을 것입니다. 아기를 가진 여성을 보호하듯 암꽃을 소중하게 보호하고 있는 이 식물의 모습이 더욱 아름다워 보입니다.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일단 이 꽃을 알게 된 후 살펴보니 사방이 이 꽃들 천지입니다. 그 기세가 강해서인지 크랙 정원만이 아니라 웬만한 공터의 넓은 구간을 온통 독점하다시피 하고 있었습니다. 농사를 짓는 분들에게는 이미 널리 알려진 잡초라고 하네요. 어떤 식물이든 지나치게 번성하여 다른 식물들과의 평형을 깨는 것은 좋지 않을 듯한데 앞으로도 이 꽃의 거침없는 전진을 눈여겨봐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도시 공간은 척박하기는 하지만 일단 그곳에 자리를 잡게 되면 다른 식물들이나 다른 경쟁자가 없는 데다가 사람들마저 떠나 뽑아내는 손길마저 뜸해지면 이토록 무성하게 자라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깨와는 크게 닮지도 않은 것 같은데 왜 하필 깨풀이라는 이름이 붙었을까요? 냄새를 맡아봐도 딱히 깨 냄새는 나지 않았습니다. 우리 땅에 피는 꽃들 중 ‘깨’라는 글자가 들어간 식물로는 ‘들깨풀’, ‘쥐깨풀’, ‘산들깨’ 등이 있습니다. 이들은 다 ‘꿀풀과’에 속하는 식물들이어서 ‘대극과’에 속하는 깨풀과는 거리가 상당히 멀고 생김새도 완전히 다른 식물들입니다. 그런데 이 식물이 왜 ‘깨풀’이 되었을까요? 가장 믿을만한 얘기는 이 식물의 잎사귀가 어린 깻잎을 닮아서 그런 이름이 붙여졌다는 것입니다. 그러고 보니 깻순나물로 먹는 그 어린 깻잎과 많이 닮았다는 생각도 드네요. 식물 이름을 붙일 때 가장 중요한 포인트는 그 식물의 꽃이나 잎 등 식물의 모습(외양) 일 테니까요. 분류학적 근연 관계야 전문가들의 몫이겠지요.
깨풀은 샐러드로, 김치로 만들어 먹을 수 있고 다른 나물들과 마찬가지로 깨끗이 씻어 끓는 물에 데쳐 물기를 뺀 후 간장, 참기름, 다진 마늘 등을 버무려 나물로도 먹을 수 있다니 내년에는 한번 시도해 봐야겠습니다.
농사를 지으시는 분들에게는 귀찮게만 생각되는 풀이겠지만 사람들이 떠난 자리, 그 쓸쓸하고 황폐한 곳에서 자라나 꽃을 피운 깨풀은 다른 곳에 피어난 모습과는 또 다른 느낌으로 비칩니다. 할 일 없는 사람에게 남은 마지막 한 조각의 낭만일까요? 얼마 후면 그곳에 시멘트로 만든 아파트의 숲이 들어서고 세상은 빠르게 변해 가겠지만, 변해가는 세상에서도 여전히 변하지 않고 남는 것들이 있을 것임을 아직도 나는 믿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