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듭 말하지만 나는 대문자 P다. 분명 나도 언젠가는 보기 좋게 정렬된 표 속에 30분 단위의 빼곡한 일정을 적어 넣던 때가 있었던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기억도 흐릿할 언젠가부터는 ‘계획 따윈 어찌 되든 상관없어’를 외치고 다니게 됐다. 그리고 나의 P력은 날로 비대해져 가는 듯하다.
유일하게 J와 가깝다고 느끼던 순간이 식당을 컨택하는 일이었는데, 이번 8박 9일의 일정에서는 단 한 끼도 계획하지 않았다. 배가 고프면 주변의 식당 중 적당해 보이는 곳으로 들어가서 수더분한 사장님들과 살갑게 대화를 나누었다. 물론 약간의 재수가 따라주지 않아 불유쾌한 일을 겪기도 했지만, 그들은 대체로 여행객에게 친절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번 여행에서 단 하나, P스럽지 못한 바람이 있었다면, 그건 바로 ‘모닥치기’였다.
모닥치기는 떡볶이, 김밥, 튀김류를 마구 섞어 먹는 제주도의 분식이다. 평소 떡볶이를 썩 좋아하지 않는 나였다면 ‘아, 그런 게 있구나’ 하고 흘려보냈을 것이나 ‘마라탕처럼 제주의 여고생들이 친구들과 자주 모여 먹는 음식’이라는 설명을 듣는 순간, 참을 수 없이 먹고 싶어졌다. 혼자가 아니라, 친구랑.
"E, 나 부탁이 있어요."
"네, 말해봐요."
"제주에 모닥치기라는 게 있다고 들었어요. 혹시… 그거 나랑 같이 먹어주지 않을래요?"
정 작가님께서는 문체와 영 따로 노는 나를 볼 때마다 "아이고… 애기네, 완전 애기야… 어쩜 좋아…"라며 유난스러워하셨다. 하지만 하얗고 동글동글한 얼굴, 예쁘게 고이 접히는 눈웃음의 E를 처음 보자마자 나는 생각했다.
‘우와… 진짜 애기는 여기 있는데?’
그녀와의 인연은 내가 맡고 있던 가을 매거진에서 시작됐다. 남의 글을 썩 자주 읽지 않는 나는, 제주의 소담한 일상을 담아 쓰는 그녀의 이야기를 대충 쓱 훑고는 ‘젊은 나이에 제주에서 1년 살기라니 대단하네… 용감한 건가, 겁이 없는 건가…’하며 넘겼을 테다.
그러던 어느 날, 의도치 않게 다시 읽게 된 그녀의 글에서 나와 비슷한 상처를 마주했다. 나는 그날, 그녀의 글을 처음부터 다시 읽기 시작했다.
뜬구름 같던 제주의 일정이 확정되고, 나는 제일 먼저 그녀에게 연락했다.
"아직 날짜는 모르겠어요. 눈이 많이 오는 때에 가고 싶어요. 그리고 E, 당신을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요."
내가 그녀의 글을 읽으며 내적 친밀감을 키워온 것과는 별개로, 그녀에게 나는 지독한 타인일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잘 쳐봐야 함께하는 프로젝트의 총괄 디렉터 정도였겠지. 그녀의 경계를 허물고 싶었던 나는 대뜸 근래의 마음을 고백했다.
사실은 나도 당신과 같아요. 나, 나쁜 사람 아니에요.
E는 정말 특별한 사람이었다.
밤길 운전 중, 예상치 못하게 쏟아져 내리는 함박눈을 바라보며 그녀는 미끄러운 도로의 상황을 걱정하기보다, 이렇게 물어봐 주는 다정을 가졌다.
"눈이 정말 예쁘게 내려요. 우리 잠시 세워서 눈 맞을래요?"
"눈이 쌓인 한라산에 등반해보고 싶어요."라면서도, 대책 없이 어떤 도구도 챙기지 않은 내게 겨울 산행 세트를 빌려주겠다고 굴었다. ‘그래봐야 발 사이즈가 안 맞을걸.’ 속으로 코웃음을 치던 나는, 짜 맞춘 듯 그녀가 말한 발 사이즈 숫자 ‘230’을 듣고 깜짝 놀라고 말았다. 그런 나를 보며 그녀가 말했다.
"이 정도면 운명인 것 같은데요. 발목을 다친 제 대신, 눈 마음껏 밟고 와주세요."
무엇을 할지만 정하고 천진하게 웃는 나와 함께 웃어주면서도, 그녀는 늘 나를 숙소까지 데려다줄 경로를 미리 찾아두었다. 그런 그녀에게 MBTI를 묻자 T와 P라고 했다.
나는 제주에 오면 매일매일 바다를 볼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내가 지내는 곳은 해변에서 조금 떨어진 외진 항구였고, 어느 방향에서든 불어오는 바당바람에 연신 옷깃을 여며야만 했다. 그녀는 그저 뚜벅뚜벅 걷던 나를 태워 천백고지로, 해변으로 달렸다.
우리는 정말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비슷한 상처, 비슷하게 느꼈던 감정들, 그 감정들에 대한 수많은 자책과 정의. 그럼에도 불구하고 앞으로 살아가야만 할 날들.
‘잘’ 살고 싶다는 내 말에 그녀는 말했다.
"꼭 ‘잘’ 살 필요 없어요."
이곳에 온 이후로 맞는 바당바람은 늘 조금 서글펐지만, 햇볕이 내리쬐는 사계 해변은 잔잔하고 아름다웠다. 마치 그녀의 머리를 간질이는 포근한 바람처럼.
E와 나는 끊임없이 이야기했다. 그녀의 글과 나의 글에 대해. 우리는 서로의 문장에서 해답을 찾고 싶어 했다.
"E의 글은 감정이 넘치지도, 부족하지도 않은 글이에요. 사유와 깨달음이 예쁘게 정리된 글. 내가 생각하던 ‘책’의 정석 같아요."
"저는 틈씨 글을 보면서 늘 조금 더 드러내도 된다는 용기를 얻어요. 솔직하게 자신의 감정을 인정할 수 있는 게 부러워요."
우리는 ‘다정’에 대해서도, 글을 쓰는 일에 대해서도 오래 이야기했다.
“제가 브런치에서 어느 글을 봤는데요. 본인의 아이가 ‘느닷없이’나 ‘눈 깜짝할 새’, 혹은 ‘대체로’ 같은 ‘부사어’를 능수능란하게 구사하는 게 수학과 영어를 잘 하는 것보다 자랑스럽다는 어떤 아버지의 글이었어요. 저는 그 말에 아주 많이 동감했어요. 언어를 잘 다룬다는 건 정말 매력적이고 다정한 일이라 생각해요”
“그러네요, 그 아이도 참 사랑스럽지만 저는 그 애의 장점을 빠르게 알아채 준 그 아버지가 정말 다정하고 멋진 것 같아요.”
“맞네요. 그 아이는 그런 아버지 밑에서 온정하게 자라, 또 다른 사람의 장점을 찾아내는 다정한 사람으로 자라겠죠?”
“정말 멋지네요.”
“확실히 글을 쓰는 사람은 쓰는 단어와 표현의 폭이 다르다는 걸 느껴요.”
“맞아요. 가끔 깜짝 놀라는 순간이 있는데, 알고 보면 일기든, 무엇이든 생각을 옮겨 적는 사람들이 대체로 그렇더라고요.”
“글을 쓰다 보면 더 괜찮은 사람이 되고 싶다는 생각을 많이 해요. E는 어때요?”
“저도 그래요. 글 속의 ‘나’처럼 행동하고 생각하려 노력하게 되는 것 같아요.”
“맞아요. 누구도 글 속의 나와 현실의 나를 비교하지는 않겠지만, 우리 스스로는 알잖아요.”
“그렇죠, 나의 글이 거짓이 되지 않았으면 싶은 마음이요.”
“글을 정말 사랑하나 봐요, 우리.”
“와, E 있잖아요. 지금 우리 대화, 지나가는 사람이 들으면 ‘쟤넨 뭐 이런 심오한 얘기를 이렇게 신나게 하나’ 싶겠다, 그쵸?”
“그러니까요, 그런데 저 이런 얘기를 즐겁게 주고받을 수 있어서 너무 행복해요”
“정말요? 저도 그래요. 제가 어디 가서 이런 이야기를 해보겠어요. 아, 오늘 정말 좋아요.”
잔잔한 파도소리 사이로, 문득 그녀가 말해왔다.
“틈씨, 제주에 놀러 와요. 도망치고 싶을 때, 힘들 때, 죽고 싶다는 생각 말고 제주로 도망쳐와요.”
나는 조금 눈물이 났다. 도망쳐 제주로 오라니.
‘도망’과 ‘제주’는 어쩐지 어색하기 그지없는 단어였지만, 그것들을 나란히 놓자 무척이나 아름다운 문장이 되었다.
"정말 그래도 돼요? 나 재워줄 거예요?"
"틈씨 한정 무한정으로요. 꼭 와요. 진짜로요"
나는 "속옷도 빌려줄 테니 몸만 오라"는 그녀의 말에 무방비하게 웃음을 터뜨리면서도, 이 예쁜 섬에 단짝 친구가 생겼다는 사실에 몹시 든든해졌다. 어쩐지, H에게 말했던 ‘작은 미련’ 하나가 더 생긴 기분이었다.
"E, 우리 이거 우정 반지 해요! 절대 빼지 말아요!"
그녀와 나는 예쁘게 핀 꽃반지를 하나씩 노나 끼며 밤의 항구를 거닐었다.
아주 온화한 다정을 가진 E는 한때 붐비는 지하철과 꽉 막힌 도로 속에서, 맞지 않는 옷을 입은 채 조금 다르게 흘러가는 시간을 살아내다 지쳐갔다. "도망치라"고 말하던 그녀의 말처럼 훌쩍 떠나 내려온 제주에서, 그녀는 이제 1년 살기를 마무리하며 이렇게 말한다.
"이곳이 좋아요. 도시로 다시 돌아가고 싶지 않아요."
모든 것이 빠르고 편리한 도시보다, 조금 느리고 불편한 제주를 택한 그녀에게는 아직 ‘제주에서의 안정적인 직장’ 같은 현실적인 문제가 남아 있다. 그럼에도 나는 아주 안온한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며, 부디 그녀가 이곳에서 자신만의 터전을 무사히 가꾸어가길 함께 소망했다. 그녀가 원하는 것이 무엇이든, 그것이 현실로 이루어지기를.
마지막 인사를 나누며 넘치는 미련을 주워 담지 못하던 나는, 몇 번이고 그녀를 끌어안았다.
"제주에서 어쩌면 조금 외로웠을 나랑 놀아줘서 고마웠어요."
"제주까지 와서 나를 찾아줘서 고마웠어요ㅡ"
"이 제주가 당신에게도 다정했으면 좋겠다."던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나는 이제 정말 살고 싶다고 생각했다. 여전히 나의 밤은 칠흑같이 어두워 막연하고 두렵지만, 살아서 언젠가 이 소중한 순간들을 더 맞고 싶어졌다.
"제주에 와서 공짜 귤 한번 못 먹으면 친구 없는 거래요"라며 그녀가 쥐여주던 귤 봉지를 나는 소중하게 감싸 안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