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필로그
우리는 기차를 타는 그 순간까지도 영락없는 J와 P처럼 굴었다.
“헉 나 손목이 휑해. 시계 어디 있지?”
순간 싸늘해진 공기에 그녀는 눈알을 도로록 굴리다가 이내 나를 설득했다.
“일단 지금 타야 해, 포기해.”
“그렇지만… 그거 중요한 건데…”
잃어버린 처지에 할 말은 아니겠으나, 나는 누군가에게 선물 받은 물건은 가능하면 매일 착용하여 스치는 순간마다 그 선물이 선택되기까지의 과정을 상상한다. 그러다가 결국 그 마음에 사랑에 빠져버리는 것이 나의 애정법인 것이다. 사뭇 아쉬운 마음에 뒤를 돌아 머뭇대고 있으니 그녀가 확신에 찬 어조로 말한다.
“아냐, 내가 아침에 숙소 나올 때 침대 밑까지 샅샅이 봤어. 그거 가방에 있어, 나 믿어”
다행스럽게도 그 시계는 정말 가방 속 안주머니에 있었다. 금세 기분이 좋아진 나는 이 여행의 밀린 수기를 쓰기 위해 테이블에 주섬주섬 태블릿을 꺼내는데, 복병은 갑작스레 찾아온 체기였다.
아… 돌아가는 길 위에서 아쉽고도 행복한 이 마음을 담아서 꾹꾹 눌러낸 그 문장만큼 예쁜 건 없을 텐데…
급히 오른 체기에 식은땀을 주륵 흘리고 있으니 그녀가 한숨 자라고 토닥여주는 것이라, 나는 자못 아쉬운 마음을 삼켜내고 눈을 감았다.
광명역에 도착한 우리는 마치 깜짝 선물처럼 기다리고 있던 그녀의 남편을 마주했다. 평소에는 그렇게나 자존심이 센 인간이 그녀 앞에서는 퍽 순한 레트리버처럼 구는 꼴이 나는 꽤 재미있다고 생각했다.
그는 언젠가 술자리에서 나에게 사소한 말실수를 한 적이 있는데, 그로부터 아주 오래 지나고서야 나는 그 이야기를 그녀에게 꺼냈다. 뒤늦은 사과를 받고 싶은 마음은 절대 아니었고, 그냥 ‘음ㅡ 그분 그렇지. 자기 사람 아니면 대중없이 던지는 스타일이긴 하시지’ 라며.
그녀는 그것이 못내 미안했던 걸까. 최근에는 정말 웃자고 한 농담마저 그 남편이 갑작스레 사과를 해오는 통에 나는 적잖이 당황해 버린 것이다. 뭐야, 왜 사과해요? 당신 이런 인간 아니잖아요.
뒤늦게 받은 그녀의 사과 연락에 이 상황을 비로소 눈치챈 나는, 문득 마음이 한껏 부풀어 올라 맥락 없이 터져 나오는 웃음을 주체할 수 없었다.
그 남편의 장난에 기분이 상했냐고 묻는다면 단언컨대 네버. 털끝만큼도 그렇지 않았다. (사실 그 당시 다른 상황에 매몰되어 있는 상태라 그의 말을 귓등으로도 듣지 않았다) 나는 다만, 평소에 꽤나 자기주장을 뚜렷하게 비치는 그 남편에게 어느 정도 맞춰주며 따라가는 듯 보였던 그녀가, 고작 별 의미도 없을 말 따위에 혹여 사랑하는 동생이 상처받았을까 싶어 단단히 화를 냈을 모습을 상상한 것이다. 나는 마음이 썩 일렁여서는, 자못 떨리는 기분에 그녀에게 고백하고 말았다.
“나는 언니의 그 마음이 너무너무, 고맙고 기뻐.”
고작 하루 만에 본 나의 남편은 꽤나 반들반들해져 있었다. 혼자 재미있는 시간이라도 보냈는가 싶어 기특했다고 하면 너무 정 없어 보이려나. 허나 그는 평소에 분리불안이 있는 강아지처럼 나를 졸졸 쫓아다니는 것이기에 글을 쓸 때 귀찮게 좀 굴지 말라고 하면 “네가 글 안 쓸 때가 도대체 언젠데!”라며 반문하는 것이다. 그런 그에게 어쩐지 할 말이 없어진 나는, 굳이 집 앞의 카페로 피신해 글을 쓰는 사람이 아니겠나.
내가 없는 시간, 새삼 멀쑥해진 그 얼굴이 문득 귀여워 나는 헤실헤실 웃으며 그의 머리를 토닥였다.
하여간에 새벽같이 출발하던 그날도, 깜짝 선물처럼 나타난 오늘도, 사실은 원치 않았을 텐데 마지못해 보내주던 마음을 모를 수는 없는 거였다. 편안한 여행의 시작과 끝을 선사해 준 데다, 사랑하는 그녀와의 온전한 시간을 보내도록 양보해 준 그 남편에게 감사의 마음을 담아 다 함께 저녁을 먹자고 청했다.
형부 밥은 제가 살게요ㅡ
그 유명하다고 소문난 나의 주먹고기 맛집에 귀인들을 모시니, 동시에 쌍 따봉을 날려주는 것이라 나는 푸스스 웃으며 물었다.
“그래서 형부는 이틀간 뭐 하면서 시간 보내셨는데요?”
“뭐 하긴 뭘 해. 그냥 모기나 잡고 놀았어…”
그 하릴없는 신혼의 남자가 피로를 꾹꾹 눌러 담아 말하는 모습이 너무 웃겨서 우리는 그만 무방비하게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우리는 그 여행에서 얼마나 많은 것을 보고 느꼈는지, 어떤 사람들을 만났는지, 그래서 얼마나 즐거운 시간이었고 얼마나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는지 각자의 남편에게 열정적으로 쏟아냈다. 그들을 내팽개치고 갑작스레 떠난 그 여행에 얼마쯤은 반발하고 걱정했겠으나, 신이 나서 행복하게 떠들던 우리를 보던 그들은 피로한 얼굴을 쓸어내리곤 그저 이렇게 말할 뿐이었다.
“… 그래 너희가 즐거웠으면 됐다.”
그날의 고기는 특히나 더 맛있었기에 무르익어가는 그 자리에 한잔이 빠지면 또 아쉽다고 생각했다. 받아 드는 술잔에 “아, 내일 출근해야 하는데…” 라며 당신들이 고민하건대. 나는 그들의 한숨 섞인 웅얼에 피식 웃으며 대꾸했다.
“난 출근 안 하는데.”
나의 모든 사정을 아는 그들은 얼마쯤의 당혹감과 얄미움에 아무 말도 잇지 못하는 것이라, 나는 한마디를 더 덧붙였다.
“많이들 드세요. 제 마지막 피땀이니까”
이틀 만에 돌아온 집은 당연하게도 나가기 전 모습 그대로였다. 다만 아주 망부석 같은 사랑하는 나의 고양이가 울며 안기는 것이라, 그 무거운 걸음에 황송한 기분이 되었다. 이 여행의 끝에 나는 문득 생각만 해도 피로해 미뤄두었던 그 일에 대한 해답을 얻은 듯했다.
그 어떤 결말도 감히, 오만하여 내가 단정할 수는 없겠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나를 사랑하는 방법을 찾아야겠다고 생각했다.
그 누구도 나에게 상처 입히게 두지 않겠다고 결심했다.
눈치도 없이 “직장이라는 것도, 넓게 보면 주식시장의 숏이랑 같은 이치 아닐까? 숏 쳤다고 생각해~”라고 떠드는 그의 머리를 단단히 쳐버리고 싶은 충동이 들었지만,
이건 정말로, 당신과 나의 비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