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해?

by 마른틈

이제 와 말하건대 그녀와 나의 역사는 그리 길지 않다. 그녀는 그녀대로 살아온 것이 서른몇 해, 나의 인생은 이제 서른 해일뿐이다. 어려서 만나 수많은 역사를 쌓아왔을 죽마고우도 별것 아닌 오해에 스러지기 쉽거늘, 그렇게 치면 우리는 얄팍하기 짝이 없을 관계인 것이다.

그런 우리가 어쩌다 이렇게 가까워질 수 있었는지는 아직도 의뭉스럽긴 하다. 나는 사실 먼저 진심을 꺼내 보이는 타입은 곧 죽어도 아닌지라, 얼마쯤은 못돼먹고 싹수가 노란 데다 퉁명스럽게 구는 인간이다. 그 행동과 말속에 숨은 진심을 알아채고 살갑게 대해주는 당신에게 고슴도치 마냥 가시를 세워 경계하다가 나도 모르게 스며들어버리면 마구 허물어져 간이고 쓸개고 다 빼줄 것처럼 멍청하게 굴어버리는 것인데, 그래서 나는 해운대의 어느 신호등을 기다리다가 문득 이렇게 말해버렸다.


“나 언니한테 통장 비밀번호도 알려줄 수 있을 것 같아, 근데 물어보진 않았으면 좋겠다.”

“비밀번호 뭔데?”

“푸흐흐ㅡ 안 알려줄 거야!”


그녀는 아직은 안된다며 그리 엄하게 굴던 내가 항정국밥의 국물 한 모금에 쉽게 무너지는 게 그렇게 웃겼다고 한다. 그 결심이 참으로 종잇장과도 같아서, 살살 꼬시면 꼬시는 대로 훌렁훌렁 넘어오는 내가 재미있었다나. 하지만 나는 꽤 진지했어. 거기서 그걸 거절하면 유죄였다고.


일정표를 한참이나 전부터 나에게 전달한 그녀였으나 그것을 거들떠보지도 않았던 나는 여행 내내 그녀에게 “다음엔 어디 가?”, “이제 뭐 해?”를 물어댔다. 귀찮을 법도 했겠으나 암시롱도 않다는 듯 “다음은 ㅡ에 갈 거고 ㅡ시까지 나가야 해”라고 브리핑해 주는 그녀에게 순순히 응했다. 다만 꽤나 느긋하게 구는 나를 보며 그녀의 눈동자가 마구 흔들리는 것이라 나는 단호하게 말했다.


“언니, 내가 비록 P이긴 하지만 일정을 취소시킬 만큼 답도 없는 P는 아니야. 대신 일정이 취소될 수도 있다는 불안감은 줄 수 있지.”


그녀는 얼마쯤 황당하단 표정으로 쳐다만 볼 뿐이었다. (정말로 우리는 그 어떤 일정도 무리 없이 소화했다.)


우리는 늘 놀러 와서까지 그 충동을 자제시키는 그들에게 잔뜩 뿔이나 있었으니, “배부르면 남기면 돼. 먹고 싶은 거 다 먹어. 하고 싶은 거 다 해. 괜찮아. 아끼지 마.”라며 그 밤 서로에게 면죄부를 쥐여주었다. 그리하여 다음날 일찍 깬 나는 이리저리 수선을 떨다가 입이 심심해 어제 남은 그것들을 좀좀 따리 주워 먹었는데, 뒤늦게 일어난 그녀 또한 어느새 옆으로 와서 주섬주섬 함께 주워 먹고 있는 것이 아닌가.

보통의 내가 아는 여자애들은 이렇게 일어나자마자 어제 먹다 남긴 것을 권하면 입맛이 없다며 ‘여자애’처럼 거절 해야 정석이거늘. 아무 생각 없이 이 말라 비틀어진 걸 주워 먹고 있는 나나, “먹을래?” 하니 좋다고 옆에 와서 함께 먹고 있는 이 언니나. 우린 참, 우아하긴 글러 먹었다 싶으면서도 그 기꺼운 기분에 문득 차오르는 고양감이 마음을 데워주는 것이다.


나는 거리를 걷다 마주친 캐리커쳐를 그려주던 상점에 무작정 그녀의 팔을 이끌고 들어갔다. “이런 건 한 번도 안 해봤어”라며 어딘가 어색해하던 그녀는, 막상 받아 든 그 그림에 들뜬 표정을 가감 없이 드러냈다.


“오늘 날짜 써드릴게요, 따로 원하는 문구 있으실까요?”


사실은 나 또한 바람과 마음이 이끄는 대로 들어갔을 뿐이라, 예상 못한 질문에 ‘우리의 우정 여행’ 따위의 흔한 문구나 써야 할까 고민하던 찰나였다. 잠시 고민하더니 이내 단단한 음성으로 대답하던 그녀의 말에 나는 무방비하게 허를 찔린 기분이 되고 말았는데.


“J&P라고 써주세요”

“푸하하ㅡ 누가 보면 우리 이름 스펠링인 줄 알겠어.”




사실 내가 무계획적인 인간임은 반박할 수 없는 사실이나, 어찌 되었든 이 사회에서 멀쩡한 사람의 탈을 쓰고 살아가는 인간으로서 '함께'하는 일정에 이렇게까지 무계획적으로 구는 인간은 아님을 이쯤에서 밝힌다. 계획형 인간들만큼이나 철저하고 아름다운 계획을 세우는 재능은 없겠지만 적어도 적당히 관심 있는 척, 호응하는 척, 의견 내는 척은 할 수 있는 인간이라는 뜻이다.


허나 이번 여행에 있어 시작은 바쁘다는 핑계로, 끝은 속상하다는 핑계로 그 어느 것도 신경 쓰지 않은 나는 그녀에게 퍽 미안한 것이 솔직한 심정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나의 그 지난한 마음을 모두 아는 것처럼, 그 어떤 것에도 섭섭해하지 않았다. 그저 순순히 따라와 주는 동생을 귀여워하고, 예뻐하고 고마워했다. 나는 그 호수같이 잔잔한 마음에 그저 폭 안겨 부유했다.


여행 내내 나는 다음 일정을 궁금해하며 서프라이즈 같은 그 시간을 마치 아이처럼 기뻐했다. 그녀는 그런 나를 보며 꽤나 자주 물었다.


“행복해?”


그 질문에 나는, 매번 최선을 다해 그렇다고 대답했다. 마치 그렇게 대답했기에 행복한 것처럼.


문득 궁금해졌다. 나는 그녀가 준비한 이 선물 같은 시간에 그저 감사해 넘치도록 행복했는데ㅡ 그녀 또한 나와 함께한 이 여행이, 제법 대책 없고 황당한 데다 조금은 귀찮았을지도 모를 이 시간이 행복했을까? 내가 그녀에게 그런 사람이 되어주었을까?


부디, 그랬으면 좋겠다.


나이 서른이나 먹고 ‘죽’이 잘 맞는 사람을 만난다는 건, 어쩌면 로또 당첨보다 어려운 일이라고 생각했다. 어린 날 함께한 추억 하나 없는 사이에, 차 몇 번 마셨다고 갑자기 친근해질 수 있는 것도 아닌 데다 단 몇 가지의 취향이 겹친다고 그 속내를 쉽게 털어놓을 수도 없는 거였다.

각자 사는 것이 바쁘고 우선순위가 달라지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니, 서운해할 겨를조차 없어서 함께 맞춰가려는 마음마저 무색해지는 게 당연한 나이였다. 그렇다면 나에게 찾아온 이 행운 같은 인연은, 눈빛만 봐도 알아챌 그 마음은, 얼마나 큰 기쁨이고 소중히 아껴야 할 가치일까. 나는 이 벅찬 마음을 오래도록 접어 고이 간직하고 싶었다.



이제는, 우리가 돌아가야 할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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