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내는 쓰지만, 그 열매는 달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명언이다. 플라톤의 수제자였던 그도 참고 견디며 무언가를 계속해나가는 과정이 힘겨웠나 보다. 그래도 결실을 맺어 인내의 과정을 잊을 만큼의 단맛을 경험해 봤으니 이런 명언을 만들었겠지? 싶자, 부러움이 앞섰다. 조금 비겁하지만, 결실이 아주 달콤하다는 보장만 있다면, 인내.. 나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보장되지 않는다 해도 별수 있나? 쓰고 싶은데? 그렇다면 인내해야겠지.. 후..
이런 생각을 하게 된 이유가 바로
‘될 수 있으면 5,000자를 채우세요.’라는 글을 읽은 후였다. 소설을 올리기 위해 내가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사이트는 네이버였다. 나처럼 도전을 위한 사람들 모두가 아이디만 있다면 글을 올릴 수 있었기 때문이다. ‘글을 올릴 수 있어서 다행이다.’라고 생각하며 열심히 필명을 짓고 이때까지 쓴 소설을 올리기 위해 분주하게 손가락을 움직였다. 그런데 미처 생각하지 못한 것이 있었다.
바로 분량.
어느 정도의 분량을 올려야 하는지 알지 못했다. 너무 긴 글을 올리면 혹시나 소설을 읽을 사람들이 부담을 느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너무 짧은 글은 성의가 없어 보이지 않을까 싶었다. 그래서 검색을 했고, 딱 저렇게 적혀 있었다.
“5,000자를 채우세요.”라고. 처음이 중요한 나는 저 말이 교과서가 되어서 5,000자의 늪에 빠지게 되었다. 5,000 자라고 정확한 수치가 나와 있다는 건 표준이기 때문일 거라 생각했다. 그랬기 때문에 더욱 5,000자의 강박에서 벗어날 수 없었는지도 모른다.
사실, 처음엔 괜찮았다. 어느 정도 글을 써놓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준비해 둔 회차가 모두 나간 후부터는 조금씩 글자 수에 대한 압박이 시작되었다. 글을 쓰는 중간마다 글자 수를 세어주는 사이트에 들어가 몇 자를 썼는지, 앞으로 몇 자를 더 쓰면 되는지를 계산하고 확인했다. 하.. 그냥 넘어가면 되는데 왜 그게 안 되는지, 왜 스스로 자신을 들들 볶는지. 이런 생각이 드는 순간마다 매번 이 지랄 맞은 성격에 회의가 들기 시작했다. 글을 쓰며, 연말에나 했을법한 자아 성찰에 돌입하고 있을 때쯤, 어느 블로그에서 글을 하나 읽게 되었다.
그는 하루에 4,000자의 글을 쓴다고 한다. 더도 아니고 덜도 아니고 딱 4,000자. 그 분량을 다 채우고 나면 일상을 산다고 했다. 괜히 일본 문학의 대가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정말 멋있었다. 글에 대한 자신감이 대단하다고도 느꼈다. 그러고 나서 드는 생각이 하나 더 있었다.
“어쩌면 나... 무라카미 하루키를 이길 수 있을지도 모르겠어. “
어처구니없을 거라 생각한다.. 글을 잘 쓰지도, 창의력도 뛰어나지도 아니, 뭐 하나 그에게 비빌 수 있는 재능 하나 없는 사람이 이런 생각을 하고 있으니 말이다. 하지만 오늘 하루 내가 5,000자를 쓰게 된다면 그보다 1,000자를 더 많이 쓰게 되는 것이니 이기는 게 아닌가?라는 생각을 했다. 물론, 양보다 질이겠지만 어쨌든 양으로는 생각해 볼 수 있는 일이 아닌가.
그날부터 혼자만의 경쟁이 시작되었다. 적어도 그보다 한 글자라도 더 쓰겠다는 마음을 달았다. 하루하루를 그렇게 보내다 보니, 어느 날은 ”오늘 나는 무라카미 하루키를 이겼다. “라고 흡족해하면서 혼잣말도 해보고, ”뭐야. 나 또 이겼어? “라고 거들먹거리기도 해 봤다.
”그래서 5,000자 쓰기가 쉬워졌나요? “라고 묻는다면 대답은 ‘아니요.’이다. 쉬워질 수가 없었다. 결국, 인내하며 계속한다면 찾아온다는 달콤한 결실은 나에게 오지 않았다. 내가 원한 결실은 글쓰기가 힘들지 않은 것이어야 하니까 말이다. 하지만 그래도 날마다 내가 이길 수 있는 하루키와 함께한다고 생각하며 견딜 수는 있었다.
사실, 인내의 열매가 단지는 이 글을 쓰고 있는 이 순간에도 잘 모르겠다. 아직도 난 결실을 얻은 적이 없으니 말이다. 하지만 미래의 언젠가 지난한 과정이 모두 지나가게 된다면 그 열매가 달기를 바라본다.
참! 깜빡 잊을 뻔했다.
“내 소설의 첫 인내의 순간 당신이 있어줘서 고마웠어요! 무라카미 하루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