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내용은 무조건 넣어야 해.”
“으응?”
무조건이라는 단어가 이렇게 생경하다니. 분명 수없이 들었고, 또 수없이 말했을 텐데 말이다. 그러고 보니 박상철 님의 ‘무조건’이라는 노래도 있다. 한창 유행할 때, ‘무조건 무조건이야. 무조건 달려갈 거야!’라는 후렴구를 아무렇지도 않게 술술 잘도 불렀었는데 이제는 자꾸만 의식하게 된다. 마치 봉준호 감독의 이름이 준호라는 걸 의식하게 된 것처럼 말이다.
그전에는 수학공식이나, 법, 규칙 등에 무조건이라는 단어를 붙이며 살았다. 수학 머리가 없으니 수를 이해하는 것은 포기한 지 오래. 그러니 문제를 풀기 위해 무조건 공식을 암기했었고, 법이나 규칙은 지켜야만 하는 것이니 무조건이라는 단어가 거슬리지 않았다.
그런데 왜 소설을 쓰면서 ‘무조건’을 의식하게 되었을까? 그건 하나의 의문에서 시작했다. 로맨스에는 애정표현이 무조건 들어가야 하는가? 였다. 그리고 생각의 고리를 돌고 돌아 내가 얻은 결론은 “그렇다.”였다. 로맨스 소설 자체가 남녀 간의 사랑이야기인데 애정표현이 들어가지 않는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다.
그런데 왜 무조건이 붙으니 또 하기 싫은 것인지. ‘무조건이 어딨 어?’라고 딴마음을 먹고 소심하게 중얼거리는 걸 보면 나는 정말 쓸데없는 반골기질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하는 수없이 나는 나를 설득해 보기로 했다.
추리 소설을 보자. 추리 소설에는 미스터리 한 사건이 있어야 하고 그 사건을 일으킨 범인이 있어야 한다. 그리고 그 사건의 수수께끼를 풀어나갈 등장인물도 필요하다.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건 바로 ‘반전’. 책을 읽는 동안 우리는 작가와 밀당을 하게 된다. 이런저런 추리를 하며 범인이 누군지 윤곽을 잡고 확신을 하게 되는 단계까지 가게 되면 ‘확실해. 분명해! 내가 범인을 찾았어.’라고 뿌듯해하지만, 한편으로는 ‘어.. 설마 진짜?’라는 생각을 하기도 한다. 그러다 엄청난 반전을 달고 진짜 범인이 ”짜잔 “ 하고 나타나면 “와! 이거지!”를 외치며 추리소설의 제목을 한 번 더 보게 된다.
”반전 중요하지. 하지만 어이없는 반전으로 추리의 과정까지 폄하되는 추리소설들도 있어. 그러니까 나는.... “
반전을 좋아한다. 핑거스미스를 읽으면서 느꼈던 반전의 짜릿함은 아직도 잊을 수 없다. 추리소설에 반전이 없어도 상관은 없겠지만, 그래도 반전이 없다면 팥이 없는 개피떡을 먹는 것과 같다. 그렇다는 건, 애정표현이 없는 로맨스도 꿀 없는 꿀떡을 먹는 것과 같으리라. 흠흠. 하지만 벌써 설득되고 싶지 않은데. 어쩌지?
그렇다면 이번엔 고전소설을 보자. 고전 중에서도 로맨스를 다룬 소설이 꽤 있는데, ‘로미오와 줄리엣’과 ’ 오만과 편견‘이 가장 먼저 떠오른다. 셰익스피어와 제인 오스틴도...
“야! 글쓴이! 다 필요 없고, 거장 셰익스피어와 제인 오스틴도 사랑의 언어를 썼어. 로미오가 줄리엣을 보며 읊었던 사랑의 세레나데를 기억하지? 다아시는 어떻고! 얼음왕자 같고 오만했던 그가 엘리자베스에게 자신의 마음을 구구절절 표현했던 것 기억하고 있잖아! 분명 너 기억할 거야. 그때 너 설렜었어. 내가 알아. “
알고 있다. 로미오와 줄리엣을 읽을 때 나는 줄리엣이었고, 오만과 편견을 읽을 땐 엘리자베스였다. 물론, 책을 읽으며 내가 선택한 상황은 원작의 주인공들과 달랐지만 그래도 멋진 남자 주인공들에게서 들은 사랑의 말은 변함이 없었다. 그런데 내 소설의 주인공들에게는 “썸만 타다 끝내자.”라고 말하고 있으니. 어불성설이 따로 없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표현하고 싶은 건 당연한 일인데 나는 그걸 잊고 있었다. ‘무조건’ 꽂혀서 큰일 날 선택을 할뻔했다.
“알겠어... 내가 애정표현을 무조건 쓰지 않을 명분이 없다. 명분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