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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 이탈리아3_바티칸 투어 중 뛰쳐나와 티볼리로

내 여행시간은 소중하기에, 내가 가고 싶은 곳을 가야 한다!

그날은 오전 일찍부터 교황청(나라 바티칸을 지칭하는 공식 국명; 바티칸 시국으로도 같이 쓰이나 공식 명칭은 교황청이라고 함.) 관광이 있었다. 로마에 왔을 때 같이 알아본 것이 이 교황청 한국어 관광가이드. 많은 로마 여행자에게 필수코스라 할 정도로 이 교황청 관광을 먼저 예약하고, 나머지 시간을 보낸 것. '세계에서 가장 작은 나라인 교황청'은 지리적으로 로마 옆에 있으나, 사실상 행정도 이탈리아와는 다르게 이 '교황청 법'에 의해 다스려진다고 할 수 있다.

노란색이 이탈리아 라치오주 로마 현. 빨간색이 로마시이고, 안에 조그마하게 비어 있는 부분이 교황청 <바티칸 - 나무위키>
교황청 지도 <Google Earth, 2021>

<사진 및 교황청 등 전체 정보: 바티칸 - 나무위키>


바티칸에 대한 재미있는 참고 글
남유럽에 위치한 도시국가이자 이탈리아 로마시에 둘러싸인 내륙국. 로마 주교이자 전 세계 가톨릭 주교단의 단장인 교황을 국가원수로 한다. 워낙 작고 특수성이 강한 국가이다 보니 정치 체제 역시 독특한데, 현존하는 세계 유일의 선거 군주국이자 신정국가라는 비범한 조합을 자랑한다.

2011년 3월 2일 호주 매체에서 보도한 바에 따르면 바티칸의 인구는 여성 32명, 남성 540명으로 총 572명이라고 한다. 그러나 바티칸에 거주하면서 생활하고 있는 실제 인구는 223명에 불과하다. 비록 이탈리아의 로마에 둘러싸인 형태로 존재하지만, 이탈리아와 다른 나라로서 갖출 건 다 갖춘 어엿한 독립국이다. 특히 세계에 퍼진 가톨릭의 위상을 생각하면 국가 규모에 비해 세계에 미치는 영향은 엄청나다. 1984년 도시 전체가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지정되었다.

바티칸 시국은 교황청을 유지하기 위하여 인정된 독립 국가로서의 교황령을 지칭하는 명칭이므로 가톨릭의 최고 통치 기구인 교황청(敎皇廳, Curia Romana, Roman Curia)과는 다른 개념이다. 따라서 국정을 운영하는 조직 자체도 별도의 추기경단이 따로 있다. 하지만 사실상 교황청 또는 심지어 로마(Roma, Rome)라는 말 자체가 바티칸 시국을 지칭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바티칸 스스로는 세속적인 의미가 강한 '바티칸 시국'도 아니고 엄밀한 의미의 '교황청'도 아닌 '성좌'(聖座, Sancta Sedes, Holy See)를 대외적인 공식 국가명으로 채택하고 있으며, 대한민국 정부에서는 이를 경우에 따라 '교황', '교황청'으로 번역하여 사용한다. 따라서 성좌에 파견된 한국의 특명전권대사는 '주교황청 대한민국 대사'로, 성좌가 한국에 파견한 대사는 '주 대한민국 교황 대사'로 칭하고 있다. 한편 교황대사는 영어로 embassador가 아닌 nuncio라고 부르며, 교황대사관도 Embassy가 아닌 Apostolic Nunciature라는 특이한 용어를 사용하고 있다.

광장은 하늘에서 볼 때 열쇠 구멍 모양으로 만들어졌는데 베드로의 상징물이 열쇠, 정확히는 천국 문의 열쇠이기 때문이다. 광장 한가운데의 오벨리스크는 이집트 제12왕조 시대인 기원전 20~19세기 헬리오폴리스에 세워졌던 것으로서, 이후 기원전 1세기 말 로마의 이집트 총독 코르랑넬리우스 갈루스(Cornellius Gallus)에 의해 알렉산드리아의 포룸 율리움(Forum Julium)으로 옮겨졌다가 다시 칼리굴라 황제에 의해 로마시로 이전되었다. (이와 관련한 자세한 내용은 '성 베드로 광장' 문서의 오벨리스크 설명 부분 참조.) 그리고 서로마 제국이 멸망한 후 1586년까지 방치되던 것을 대성당 중앙으로 끌어와서 일으켜 세웠다고 한다. 그러고 나서 예수 그리스도의 승리를 상징하는 거대한 십자가를 위에 달았다.
<바티칸 - 나무위키>

한 나라, 이 나라의 역사, 정치 및 종교 그리고 문화가 이렇게 연결돼 보이는 게 오랜만에 재미있고 흥미롭다. 내용을 따라 '교황청', '바티칸', '바티칸 시국' 등의 바티칸을 지칭하는 용어들을 적합하게 적용하며, 인용한 글들의 정보 또한 제각각이라는 점도 참고해주시면 좋겠다.


교황청; 바티칸시국  [ Holy See; Stato della Citta del Vaticano ]
요약: 이탈리아 로마 북서부에 있으나, 이탈리아와는 엄연히 다르며 교황청이 통치하는 가톨릭 국가이다. 인구와 영토가 세계에서 가장 작은 나라로, 1929년 2월 11일 이탈리아 왕국과 교황청 간에 체결된 라테란 조약(Lateran Treaty)에 의해 주권을 가진 독립국이 되었다.

면적(㎢): 0.44
수도: 바티칸시티(Vatican city)
종족 구성: 이탈리아인, 스위스인, 기타
공용어: 이탈리아어
종교: 로마가톨릭교
국가원수/국무총리: 프란치스코(FRANCIS) 교황(2013년 3월 선출)
정체: 교황제
통화: 유로화(Euro)
홈페이지: www.vatican.va
인구(명): 1,404(2019년)
인구밀도(명/㎢): 1,818(2011년)

교황청이 주권을 가지는 독립 도시국가로, '바티칸시(Vatican City)' 혹은 줄여서 '바티칸(Vatican)'이라고도 한다. 명칭은 고대 로마 시대부터 전해져 온 오래된 말로, 테베레강 옆에 위치한 '바티칸 언덕'을 뜻하는 라틴어 '몬스 바티카누스(Mons Vaticanus)'에서 유래한다. 영토는 로마 외곽의 카스텔간돌포와 대주교과 성당들을 제외하고 성벽으로 둘러싸인 바티칸궁전과 산 피에트로 대성당을 비롯해 0.44㎢에 불과하다.

전 세계 로마가톨릭교회와 교구를 통괄하는 가톨릭교회의 최고 통치기관인 교황청이 위치해 있어 외교적으로는 '성좌(Holy See 혹은 Santa Sede)'라고 불린다. 바티칸시국은 1929년 라테란(Laterano) 협정을 통해 이탈리아로부터 독립된 물리적 공간의 도시국가를 의미하며, '교황청' 혹은 '성좌'는 세계 가톨릭 신자들의 영적 국가를 의미한다. 바티칸시국의 주권이 교황청의 수장인 교황에게 있기 때문에 바티칸시국과 교황청은 교황에 의해 사실상 통합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바티칸시국 [Stato della Citta del Vaticano] (두산백과 두피디아, 두산백과)


오전 8:47 입구에 도착했는데도 이렇게 많은 줄로 바티칸의 인기를 실감할 수 있었다
좌: <유럽100배즐기기> 책과 바티칸 입장권 / 우: 2시간을 기다린 후 <교황청(바티칸 시국)>에 입장

코로나19 사태 전, 후로 어떻게 변했을지... 지금은 코로나로 관람에 제한이 있을 듯.

확실한 건 관람이 가능할 때, 이 때보다 사람이 엄청 줄어서 좀 더 여유롭게 관람이 가능하다는 점.


입장하고 보니 정말 많은 작품이 있었다.

당시에 본 가이드북에 이 많은 그림들이 보이지 않았고, 내가 크게 관심도 없었지만 이젠 예술에 관심이 높아졌으니 재미있게 감상할 수 있을 거 같다. 지금의 난 교황청이란 나라, 또 교황청(바티칸)이란 곳의 박물관, 미술관 등에 대해 술술 읽으면서 재미있어하는 사람으로 변했으니.


사진들을 보니 바티칸 미술관, 그중 회화관이 있는 피나코테카라는 전시관으로 먼저 들어갔었다.

피나코테카 회화 미술관(Pinacoteca Art Gallery)
바티칸 미술관은 1932년 10월 27일에 회화 갤러리인 피나코테카 미술관을 새로운 건물로 이전하여 재개관하게 된다. 새 회화관은 교황 비오 11세를 위해 건축가 벨트라미(Luca Beltrami)가 19세기에 지은 건물 안에 있으며, 이 건물은 스퀘어 가든에 위치하여 여타 건물과 인접하지 않고 사방이 트여 있어서 채광이 좋은 것이 특징이다. 이로 인해 새 피나코테카 미술관은 회화 작품의 보관이 용이하고, 심미적으로 최적의 상태에서 작품을 감상할 수 있는 조건을 갖추었다. 당시 바티칸 교황청은 이 건물을 오랫동안 찾아왔던 회화 전시를 위한 최적의 장소라고 평가했다.

바티칸 미술관의 첫 회화 컬렉션은 1790년 교황 비오 11세가 준비한 118점의 작품으로 시작되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1797년 톨렌티노 조약(Treaty of Tolentino)에 따라 1백 여점의 걸작들이 루브르 박물관으로 옮겨가고 만다. 피나코테카가 본격적인 회화 작품을 전시하는 갤러리로 거듭난 것은 1817년으로 볼 수 있다. 나폴레옹의 몰락으로 거의 모든 교회 소유의 그림들이 되돌아왔기 때문. 그 후 회화 컬렉션은 기증, 구입 등의 방법으로 계속 증가하였고, 현재는 12세기부터 19세기에 이르는 회화 작품을 약 4백60점 보유하고 있다. 작품들은 18개의 전시실에 연대순, 학파 순으로 전시되어 있으며 이탈리아 회화 역사를 통해 등장했던 많은 대작들을 다수 포함하고 있다. 조토(Giotto)의 [스테파네스키 추기경의 주문으로 그린 제단화(Stefanesch Triptych)], 라파엘로(Raphael)의 [폴리뇨의 성모(Madonna of Foligno)]와 미완성 작 [그리스도의 부활(Resurrection)], 바티칸이 소장하고 있는 레오나르도 다 빈치(Leonardo da Vinci)의 유일한 회화 작품인 [히에로니무스 성인(St. Jerome)], 카라바조(Caravaggio)의 [예수의 매장(The Entombment of Christ)] 등 대가들의 걸작들을 감상할 수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바티칸 미술관 [세계의 미술관(송혜선)]

그림들에 금이 붙어있는 것처럼 고급스러운 게 특징이었던 회화.


그리고 아마, 이 아래의 작품들은 거의 라파엘로 그림들이 아닐까 싶다. 그림체가 비슷해 보여서 추측해본다.

라파엘로 [ Raffaello Sanzio ]
요약: 이탈리아 전성기 르네상스의 가장 중요한 인물 중 한 명. 궁정화가 조반니 산티의 아들로 태어난 라파엘로는 교황청에 그린 프레스코화로 크게 성공했으며 그중 대표적인 작품이 <아테네 학당>이다. 서른일곱에 죽음을 맞이했으며 매우 존경받는 인물이었기에 판테온에 묻혔다.

출생-사망: 1483년 4월 6일 ~ 1520년 4월 6일
예술 양식: 고요한 조화, 조화로운 채색과 구도, 아름다운 얼굴 표정, 성모와 성가족상, 부드럽게 표현된 인물들

이탈리아 전성기 르네상스의 가장 중요한 인물 중 한 명인 라파엘로는 우르비노 공작의 궁정화가 조반니 산티의 아들로 태어났다. 문화의 중심지였던 우르비노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며 받은 문화적 혜택과 매력적인 그의 성품 덕분에 라파엘로는 쉽게 높은 지위에 오를 수 있었다. 라파엘로가 어렸을 때 아버지 산티가 죽었지만, 죽기 전에 천재인 아들을 가르쳤을 것이다.

1500년경에 젊은 라파엘로는 페루자 부근에 있는 피에트로 페루지노의 공방에서 도제 수업을 받았다. 이 무렵에 라파엘로는 시스티나 예배당의 프레스코를 완성했다. 제단화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1502~1503경)와 같은 라파엘로의 초기 작품들에서는 페루지노의 유려하고 우아한 양식이 엿보인다. 이미 페루지노보다 더 생기 넘치고 정교한 작품을 선보였고 페루자에서 독보적인 유명세를 얻은 라파엘로는 레오나르도 다 빈치와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가 미술의 경계를 확장시키고 있던 피렌체로 갔다.

라파엘로는 피렌체에 4년간 머물면서, 자신의 대표작인 성모 마리아 그림들 중 몇 작품을 그렸다. 그는 미켈란젤로의 작품에서는 인체 해부학에 대한 지식을 배웠고, 레오나르도로부터는 간결한 피라미드 구조와 효과적인 빛의 사용, 친밀감, 부드러운 색조 변화로 형태에 입체감을 주는 스푸마토 기법 등을 익혔다. 이를 통해 라파엘로는 호소력 짙은 고요하고 평온한 작품을 창안해낼 수 있었다.

1508년에 교황 율리우스 2세의 부름을 받아 로마로 간 라파엘로는 교황의 화가로서 눈부신 활동을 시작했다. 그는 곧 엄청난 명성을 얻었고 여생을 로마에서 보냈다. 라파엘로는 화가로서 뿐만이 아니라 매력적인 개성을 지닌 미남으로서 사람들이 부러워하는 평판을 얻었고, 놀라운 속도로 작품을 제작해나갔다. 그에게 큰 성공을 가져다준 작품 중에는 바티칸 교황청의 방들에 그린 프레스코들이 있다.

그중 하나인 <아테네 학당>(1510~1512경)은 이야기와 구성을 최상으로 구사할 줄 알았던 그의 재능을 보여준다. 로마에서 작업한 다른 작품으로는 새로운 심리적 깊이를 보여주는 초상화들과 매력적인 바티칸 태피스트리 연작이 있다. 서른일곱 살이라는 이른 나이에 죽음을 맞이한 라파엘로는 매우 존경받는 인물이었기에 가장 화려한 장례식으로 치러졌고 판테온에 묻혔다.

연애를 몹시 좋아한 화가
라파엘로는 가장 빛나는 표현으로 묘사되었다. 16세기 이탈리아 작가 로도비코 도미니치는 라파엘로를 "비범하고 가장 뛰어난 화가"라고 묘사했다. 미술가들의 삶을 기록한 동시대의 전기 작가 조르조 바사리는 "재능이 있을 뿐만 아니라 상냥하고 유쾌한 태도를 지닌 우아한 사람이었다"라고 평했다. 라파엘로는 확실히 적을 두지 않았던 것 같다. 세간의 평에 의하면 라파엘로는 많은 여인들을 사랑했다. 바사리에 따르면, 연애가 그를 죽음에 이르게 한 열병을 초래했다고 말해도 될 정도로 절제하지 않고 연애에 몰두했다고 전했다.
[네이버 지식백과] 라파엘로 [RAPHAEL] (501 위대한 화가, 2009. 8. 20., 스티븐 파딩, 위키미디어 커먼즈)

이렇게 다시 내용을 찾아봐도 그림, 문화, 역사 등으로 이어지는 재미있고 고귀한 예술 작품들이 넘치는 곳인데 당시 난 이런 것들에 대해 별로 흥미가 없었다. 이제 12시 정도가 돼서 점심시간이 됐을 즈음, 난 이때 과감한 결정을 내리고 가이드님께 말씀을 드렸다.


"가이드님, 해설은 재미있으신데, 전 여기까지만 듣고 다음 일정으로 가겠습니다. 감사했어요!!"


오후 5시까지나 되는 투어 일정에 내 발을 묶을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난 그때 빨리 <티볼리>로 가고 싶었던 거 같다.

멋진 장면의 단골 장소로 나오는 계단
지금이라면 이 곳의 작품들을 다 볼 거 같다


이 길로 나와서, 바로 로마 근교의 작은 도시인 티볼리로 향했다!

근처 지하철역 - 시외버스 정류장 - Tivoli 역 근처로 향했던 거로 기억. 바티칸쪽에서 2시간 정도 걸렸다


티볼리 [ Tivoli ]
요약: 티볼리는 이탈리아 중부 라치오주에 있는 도시이다. 로마에서 북동쪽으로 약 30km 떨어진 곳에 있다. 도심 북쪽 사비니언덕에서 발원한 아니에네강이 흐른다. 아름다운 정원으로 유명한 '빌라 데스테'는 르네상스 문화를 상징하는 건축물이다. 유럽의 정원 설계에 큰 영향을 주었으며 2001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시는 말하는 그림이요, 그림은 말없는 시'라는 말로 유명한 시인 호라티우스의 사비니 농장이 있다.

1550년 이폴리토 데스테의 추기경이 티볼리 지사로 임명받아 이곳에 머물렀다. 추기경은 약 10년에 걸쳐 토지를 사들이고 기존 건물을 해체했으며 이전 수도원을 저택으로 개조했다. 아니에네강에서 물을 끌어와 정원 지형의 높낮이가 만든 중력을 이용해 분수와 연못을 만들고, 전체 경관을 조성하는 공사를 시작했다. 완공된 '빌라 데스테'는 르네상스 문화를 상징하는 건축물이 되었다. 이후 유럽의 정원 설계 발전에 큰 영향을 주었으며 2001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티볼리'는 18~19세기 화려한 조명 장식, 불꽃놀이, 마술공연 등을 즐길 수 있는 놀이공원이나 카페에 붙은 명칭이기도 하다. 16세기 티볼리의 빌라 데스테 정원과 분수대를 연상시킨다는 뜻에서 이 같은 이름이 붙여졌다.
[네이버 지식백과] 티볼리 [Tivoli, Tivoli] (유럽 지명사전 : 이탈리아)

쌍용차의 티볼리가 이 도시의 이름을 차용해서 만든 것. '차 내에서 즐거움을 즐길 수 있는 장소'로 차명을 지은 듯하다.

티볼리 시내
아름다운 정원으로 유명한 '빌라 데스테'로 가는 길
짜잔!!

이렇게 탁 트인 광경이 보고 싶었다. 이따금 돌아보면 당시 내 유럽여행의 테마는, ' 한 폭의 그림같이 탁 트인 멋진 풍경'을 보는 것에도 목적이 있었다. 이런 곳들을 사진으로 남겨와선지 그 순간의 장소와 내가 느낀 감정을 떠올릴 수 있고, 갔던 곳은 다시 찾아보면서 더 깊이 있게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르네상스 문화의 진수요, 이탈리아 정원 예술의 걸작으로 평가되는 이곳이어선지 와보고 싶었던가. 유럽으로 여행을 왔으나 멋진 곳들을 보면서도 한 편으론, 바쁘게 열심히 보내다 간 대학생활 중 '쉬고 싶다'는 생각도 있었던 것이었다. 그게 바로 이런 풍경을 보고 싶었다는 그때 나의 내면을 이렇게 확인할 수 있었다. 결국 내가 가는 곳은, 내가 생각하는 대로 날 이끌기 때문이다.


이렇게 빠르게 관광을 마치고 서둘러 로마에 있는 숙소로 향했다. 그날, 숙소에서 사람들과 저녁 약속이 있어 더 늦지 않게 들어가야 했기에.

비어타임

이날 밤에도, 숙소에서 만난 사람들과 이야기꽃을 피우는 시간을 가졌다. 그날 이야기꽃의 단연 화제는 바티칸에서 투어 도중에 나온 나였다. 이야기를 듣던 사람들 중엔 역시, 바티칸이 재미없었고 도중에 나가고 싶다는 사람도 있었다고 했지만 그러지 못했다고 했다. 그런 사람은 일행이 있어 혼자 나갈 용기가 없어서, 투어가 끝나는 저녁 즈음까지 그냥저냥 시간을 보내고 온 것에 대한 후회가 묻어나는 하소연을 했다. 여기서 또 느낄 수 있었던 건, 귀중한 시간과 돈을 들여 로마 바티칸까지 갔는데 생각보다 별로였는데도 계획한 일정대로만 한 것에 대한 그 사람들의 아쉬움. 그래서 난, 그 귀중한 시간에 '내가 가고 싶은 곳을 다녀올 용기'를 낸 것에 대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선지 후회는 없다. 물론 바티칸의 그 많은 작품들은 이제 유튜브 등의 미디어, 또 4차 산업의 기술로 다가온 NFT 등으로 다시 보게 되겠지만 말이다. 그러면 되는 거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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