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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nythingbut Oct 05. 2023

영화로운

(8화에서 이어지는 글입니다)




잠이 오지 않는 밤에는 시간이 흐르지 않는다.


강렬한 햇살에 드리워지는 그림자 같은 것이 없다. 어디까지나 검게 물들어 있다.


버스도 택시도 지하철도 잠들어 버린 도심은 고요하다. 가려고 해도 갈 수가 없으며 움직이려 해도 움직일 수가 없다. 누워있기를 바라는 침대 안에 갇혀버린다. 시간의 흐름은 더욱 더디다. 


그런 밤들에는 대게 무언가를 보게 된다. 책이기도 하고 티브이기도 하다. 나의 경우는 영화이었다.






(다소 갑작스럽겠지만) 한 밤 중에 텅 비어있는 공중전화 부스에 들어가는 한 사람을 상상해 보라.


그는 외롭다. 그런 마음을 알아챈 그의 손가락들이 분주하다. 두터운 전화번호부책을 펼치고는, 무작위로 번호를 누른다. 난생처럼 보는 아니, 살며 한 번도 스치지 않을, 혹은 어쩌면 바로 옆집에 사는 인물일지도 모를 사람이 전화를 받는다. 음성이 흘러나고 그것들이 쌓여 이야기를 이룬다. '통화'라고 정의하기에는 다소 일방적으로 상대에게 이끌린 감이 있지만, 외로운 그는 듣는 행위에 빠져든다. 뒷 이야기가 궁금하여서 수화기를 놓을 수가 없다. 아침이 되어서야 공중전화 부스를 떠난다. 


내가 영화를 보기 시작한 행태가 그와 다를 바가 없었다. 






밤을 지새우는 일이 한 달 정도 지속될 무렵이었다.


나는, 어느 밤. 영화 속에 등장하는 한 남자를 따라서 무턱대고 걷고 말았다. 그는 아들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세상과 분리되어 버렸다. 제자리로 돌아가려고 애를 써도 마음이 뒤따르지 못한다. 차라리 슬픔 안에 갇힌 편이 자연스럽다. 그는 이제 벽면에 튀어나온 부끄러운 돌출물이다. 가만히 멈추어 되돌릴 수 없는 지점들을 돌아본다. 반복적으로. 불가한 일을 바랄 수 밖 없는 그는 점점 더 작아진다. 원래의 크기보다 조금 더 작아진다. 그런 그가 멈추어 섰다. 우연히 도달한 어느 물가였다. 반대편에 도달하려고 해도 거대한 물줄기가 가로막는다. 파랗게 물든 화면 끝에 작게 서성이는 그가 보인다. 


그리고는 검은 화면 위로 하얀 글자들이 올라오며 브라이언 이노의 ‘by the river’가 흘러나왔다. 


나는 그 엔딩을 기억하려는 사람처럼 그 노래를 반복해서 들었다. 그러다 잠에 들었다.


신기하게도 그 밤 이후로, 한 달간 지속되었던 불면이 사라졌다. 분명 깊은 위로였다.


나는 잠들지 못하는 밤이면, 자연스레 영화를 보았다. 이야기에 등을 기대면 도롱도롱 잠이 찾아들었다. 






테두리가 검은 노트북 속의, 영화 속 인물들을 살아 숨을 쉬었다. 그들을 쫓는 카메라의 시선 아래서라면 어떻게든 서사를 부여받았고, 이해가 가능한 인간이 되었다. 그러한 시공간 속에서라면, 제 감정을 알지 못하는 동물의 슬픔마저 누그러들었다. 


무척이나, 너그러운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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