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화에서 이어지는 글입니다)
늘 먹을 생각뿐이다.
아침을 먹으면 점심이, 점심을 먹으면 저녁이, 저녁을 먹으면 다음 날 메뉴가 궁금해진다. 정하는 사람이 따로 있는 것도 아닌데 그런다.
그러한 면에서 남편과 나는 다행스러울 정도로 입맛이 잘 맞는다.
같이 평양냉면을 먹을 수도 있고, 핸드드립 커피를 마실 수도 있다.
어느 날은 무얼 사 먹을지 한참 고민하다가 결국 장을 보아서 집으로 돌아왔다. 재철의 본연의 맛이 살아있는 음식들을 더 선호하여서, 상대적으로 조미료의 힘에 기댈 수밖에 없는 음식들이 별로 당기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우리는 당장의 고픈 배를 채워줄 주전부리를 입에 문 채로, 힘을 합해 상을 차렸다. 그러고는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 맛에 고개를 끄덕인다.
맛에 대한 이야기들이 식탁에 오른다. 나는 육류에 남편은 해산물에 혀가 더 특화된 탓에 갈리는 부분이 있지만 크게 문제가 되지는 않는다. 도리어 같은 식탁에 앉아서 먹어온 음식들의 수만큼, 먹기의 행위가 나날이 풍요로워진 기분이다.
하지만 어떤 말들은 도통 입 밖으로 나오질 못한다.
가령, 어떤 데자뷔.
어느 아침. 수영을 다녀온 나는 부랴부랴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어떤 남자가 서 있는데 문이 닫힐 때까지 타지 않길래 다른 볼 일이 있구나 싶었다.
그런데 닫혀가던 문이 다시 열렸다. 하지만 남자는 타지 않았다.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닫힘 버튼을 눌렀다. 두어 번쯤 그 일이 반복되었고, 저 멀리서 유모차를 밀고 오는 여자가 올라탔다. 나는 그제야 상황이 파악되었다.
남자가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르고 있었던 것이었다. 선의로 한 일이었다. 하지만 엘리베이터 안에서 밖을 볼 수 없는 사람에게 양해를 구했다면 별다른 오해를 사지는 않았을 테다. 아주 짧은 시간이었지만, 나는 그가 엘리베이터의 버튼에 집착하는 성인인 줄 알았다.
뭐, 사소한 실수일 수도 있고, 따지고 보면 그다지 큰 불편을 겪지도 않았기 때문에 그것은 머리에 남을만한 사건은 아니었다. 하지만 나는 어떤 순간들이 주마등처럼 스치며 남편이 떠올랐다. 스스로에게는 선의이지만 나에게 당혹스러운 일일지 모를 것들을 유발하는 남의 편.
나는 그런 일을 겪을 때마다 남편에게서 한 걸음씩 멀어졌다.
이야기해 보았자 다투기 일쑤였고, 결국은 두세 걸음 즈음 더 멀리하게 되었다. 우리는 가깝지 않은 곳에 서 있었다. 나는 한결 편안해지기도 했지만, '과연 우리는 적당한 거리에 있는 걸까, 부부라고 하기에는 조금 먼 것은 아닌가. ' 하는 의문을 품기도 했다.
나는 긴 고민 끝에 하루 중 몇 분은 티브이를 끄고 각자 심리학 책을 읽고 자신을 돌아보는 시간을 보내자고 말했고, 석 달 정도가 지났다.
폼나지도 않고, 되는 둥 마는 둥 지지부진한 시간이다. 영화를 보면 갈등이 극에 달한 상황에서 서로의 마음을 돌릴만한 결정적 대사를 던지며, 불완전한 서로를 구하지만, 현실은 냉혹하다.
그래도 꾹 참고, 거듭 성실히 문장들을 읽어나가다 보니, 다음에 올 대사가 무엇이어야 할지 알듯도 했다. 하지만 무리다.
어느 꿈 속이었다.
감은 두 눈 안에 빛이 차오르고, 불행의 나라에서 불행을 먹고 자란 우리가 보인다. 언어라는 것이 산을 오르고 바다를 건넌다. 모든 것이 순조롭다. 산들도 바다도 비단처럼 매끄럽기만 하여서, 나는 능숙한 화자가 된다. 쉽지 않은 말들을 쉽게 해온 사람처럼 말을 시작한다.
"결혼 기념이라는 건 참 신기해. 나는 그날이 돌아올 때마다 또 일 년이 지났구나 하고 감탄해. 날마다 등교를 했다는 이유로 받게 되는 개근상장 같아서 성실성을 부인할 수 없게 되거든. 그런데 그 감정이 다는 아니야."
잠시 회상을 이어나간다.
"일 년 정도가 지나면 자연스럽게 이별을 고하던 시절이 그립기도 했어. 보통 사계절을 넘기기 힘들었지. 의도한 적은 없는데 결국 항상 그런 식이더라고. 그걸 이상하게 생각해 본 적은 없었어. 그럴 수도 있는 일이잖아. 정직하기도 했고. 그런데 서른 즈음이 되니까, 평생 혼자 살 수도 있다는 생각이 문득 들더라고. 그러다 결혼을 했고, 마침내 반복을 멈추었어. 뿌듯하기도 했는데 불안하기도 했지. 도대체 뭘까. 수천 번은 물었던 거 같아. 아주 긴 시간 끝에서야 알 수 있었었어."
멈춘 말을 다시 시작한다.
"종이 달을 상상해 봐. 가위로 오린 둥그런 달이야. 모가 난 데가 없는 곡선에 둘러싸인 영토가 노랗게 빛나. 남편이 좋아하는 네덜란드 토끼가 살 것만 같아. 나는 신비로운 그곳에 가고 싶어 져. 행복할 것 같거든. 그런데 온갖 걸 이겨내며 겨우 도달한 곳이 회색이야. 누군가 반대쪽으로 뒤집어 놓은 것처럼 빛이 존재하지 않아. 실망스러운 일이었지. 그래도 나는 그대로 머물러. 공기가 존재하지 않아서 두툼한 보호복을 입어야 해도 상관없어. 그래야 했어. 어렸거든."
나는 설명들을 이어나간다. 하지만 꿈에서도 꿈을 꾼다는 남편은 머뭇거린다.
잠에서 깨어난 방으로 아침 볕이 들이닥친다. 나는 평소대로 수영가방을 챙기다가, 문득 멈추어 집안을 살폈고, 공간에 머문 것들을 돌아보았다. 그러고는 '우리가 공포를 고백한다면, 그 기억들이 달라질까.'하고 묻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