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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nythingbut Oct 13. 2023

15. epilogue

(14화에서 이어지는 글입니다)




멈추어 글을 쓰게 되었다. 좁고 긴 터널 안에 있는 것과 다름없는 시간이었기에 나는 별 다른 할 거리가 없었다. 의욕도 삶의 기쁨도 멀기만 한 했다. 정면을 보고 쭉 걸어 나가도 괜찮을 것 같았지만, 망설여졌다. 더듬더듬 손을 뻗어 벽면에 글자를 새기며 뒤를 돌아보았다.  


그러자 아프다면 아프고, 그렇지 않다면 그렇지 않은 일들이 차례로 기억을 밝혔다.






맨 처음으로 토해낸 글자들은 초라했다. 무작정 화만 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아무리 애를 써도 나의 존재를 알리는 글자들은 그러했고, 나는 낙담했다. 거울을 마주하고도 차마 자화상을 그리지 못하는 슬픈 화가가 되어버렸다.


그러나 멈출 수는 없었다. 같은 글자들이 같은 기억을 불러냈고, 같은 감정이 쓰였다. 헤어 나올 수 없는 지옥의 굴레였다. 그런데 멈추어지지가 않았다. 이마저도 하지 않으면 끝내는 스스로를 알 수 없게 될지 모른다는 절박함이었는지, 아니면 그저 동작의 습관처럼 쓰기만 하였는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나는 지지부진한 반복을 이어갔다.


때로는 아무도 볼 수 없는 곳에 글자들을 묻었지만, 글자들은 땅에 묻혀도 소릴 내는 생명처럼 굉음을 지어냈다. 생생히 감정을 드러냈다. 글자들은 나보다 용감했다. 인생에서 무슨 일이 닥쳐도 있는 그대로 느껴낼 태세로 앞서 나갔다. 어느 순간, 나는 내가 적어둔 글자들에 이끌렸다. 자음과 모음을 살피며 쉼표와 마침표를 찍으며 문장들을 완성했다. 주어를 명시한 의미들이 부락을 이룬 하나의 세상을 그려낼 즈음에서 이르러서야 나는 어떤 사실을 깨달았다.


나의 글자에는 발이 없었다.


누군가 단호히 양 발을 내리친 것처럼 뭉툭했다.


나는 소통의 기능을 상실한 글자들이 안쓰러워, 발을 그려 넣어주었다. 발가락은 셋이지만 균형을 잡기에 불편함이 없도록 넷을 달아주었다. 글자들은 머뭇머뭇 발가락을 꼼지락 거리더니, 불쑥 일어나 뛰쳐나갔다. 유년시절에 잠들어버린 감정들이 무리를 지어 작은 야생동물처럼 뛰어올랐다. 모양새를 볼 수 없을 정도로 빠르게 역동하는 탓에 나는 그것이 슬픔인지 그리움인지 분간할 수가 없었다. 그저 어디론가 향하고 싶던 마음을 꾹 참아왔다는 사실만 이해할 수 있었다.


도착한 곳은 익숙한 글더미였다.


‘무얼 느꼈으나 결국에는 적당히 축약된 글자들이 풀더미가 되고, 곧게 하늘을 올려다보며 쓴 글자들이 잎사귀가 되어서 하늘을 이룬 영토.’


야생동물을 닮은 글들이 내가 시시때때로 손끝에 힘을 주어 밀어낸 나만 아는 진실들 앞에 멈추어 서서, 길게 포효했다. 구슬픈 울음이 바람에 실려 글사귀에 닿았다.






터널 끝에 도달하자 시야에 푸르름이 담겼다. 어둠을 빠져나온 것이 나인지, 글자인지 모를 정도로 코끝에 풀내음이 진동했다. 지나온 풍경을 뒤로하고 서보니, 나는 주인공이 되었다. 그럴만한 사정이 있는 화자가 되어서 야생동물들을 어루만지고 있었다 - 그것은 내가 아는 ’가장 너그러운 사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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