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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광래 Jul 10. 2021

노 프라블럼으로 대화를 시작하는 나라

인도에서 깨달은 최선의 전제조건

오후 2시의 김포공항 출국장

  오후 2시의 공항 출국장이었다. 이직 성공의 기쁨을 누리고자 빠르게 퇴직원을 제출하고 바로 제주도행 티켓을 끊었다. 세상에, 전국민이 다 제주도를 가기로 작정한 것을 나는 몰랐다. 보안 검색에 무려 1시간이 걸렸다. 문제는 내게 주어진 시간이 50분 밖에는 없다는 사실이었고, 나는 그렇게 비행기를 놓치고 말았다.


  약간의 당황을 다스리고 항공사 카운터로 향해 사정을 말했다. 그러자 행운이 찾아왔다. 바로 한 시간 뒤의 비행기, 마지막 좌석을 예매할 수 있었다. 조금만 늦었다면 4시간 이상 기다릴 뻔 하셨다고 직원분이 말씀해주셨다. 엄청난 행운! 이 사실이 너무 기뻐서 친한 친구에게 말했더니 그는 이렇게 말했다. "에휴... 속 편한 놈."


  맞는 말이다. 나는 속 편한 놈인 것 같다. 롤모델이라고 부르긴 부끄럽지만 장항준 감독을 좋아한다. 언젠가 김은희 작가같은 사람을 만나서 평생을 사랑하고 자랑하며 살고 싶으니까. 정확히는 주변인의 기쁨을 진심으로 축하할 수 있는 여유와 관록을 지닌 사람이 되고 싶다. 자신감을 넘어, 그렇게 되고 있다는 체감이 든다. 분명 몇년 전만 했어도 전혀 반대의 성향이었는데. 참 웃긴 일이다. 시도때도 없이 걱정이 많고, 계획대로 되지 않으면 짜증이 솟구쳐서 여러 사람들에게 날을 세우는 사람이었는데 말이다.(물론, 최근에도 이런 적은 있지만. 조금 힘든 시절이 있지 않은가. 웃으면서 넘어가 주시길 바란다. ㅎㅎㅎ)


  많은 계기들이 있었지만, 그 중 제일을 고르자면 아마 인도 여행이 아닐까 싶다.


  2016년, 함께 수험 생활을 시작했던 친구로부터 연락이 왔다.

  "야 인도 여행 가자."


  때에 따라 왠지 모를 직감이 이끄는 순간이 있다. 논리나 이성적 판단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그런 직감, 내게는 그 때가 그런 순간이었다. 그렇다. 나의 생애 첫 해외여행으로 인도를 선택했다.

바라나시 골목길에서 photo by. rene

  시작은 너무 좋았다. 비행기는 생각보다 편안했고, 기내식도 내 입맛에는 잘 맞았다. 하지만, 착륙 후 비행기에서 내리자마자 지옥이 시작되었다.


  인도의 평균 기온은 45도를 육박한다. 게다가 습한 지역대이다. 공항에 들어서자마자 소똥냄새와 향신료 냄새가 섞인 기이한 향이 코를 찌른다. 비위가 좋은 나도 몇 번 구역질을 했다.


  그래도 다들 버틸만 하다고 말한다. 맞는 말이다. 건기에는. 문제는 내가 도착한 7월은 인도 여행 최악의 시기 '우기'였다.


  우리는 시작부터 꼬인 듯 했다. 인도 장사꾼들은 호객을 할 때는 영어로 말하다가. 상황이 불리해지거나 자신들의 목적을 이룬 뒤에는 갑자기 힌디어로만 이야기를 시작한다. 마치 자기가 언제 영어를 썼냐는 듯 말이다.

바라나시 골목길의 소 photo by. rene

  길을 걸을 때는소똥을 피하느라 신경을 집중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푹, 밟을 수 밖에 없다. 발에 끈적이는 소똥의 감각이 아직도 생생하다. 냄새도 정말 지독한데, 그나마 거리에 항상 소똥 냄새가 나는 것이 오히려 다행일 지경이었다.


  기차역에서 기차를 기다리는 일도 흥미롭다. 예정 시간이 한참 지났는데, 기차가 오지 않는다. 주위에서는 자리를 잡고 이불을 펴는 현지인들이 가득하다. 그랬다. 우리가 기다리던 기차는 1시간 씩 연착되더니, 끝내 9시간 연착되었다. 그것이 인도의 평균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어떻게 반응해야 할까? 나는 쉽게 포기하는 성격은 되지 못해서, 이리저리 헤메이며 해결 방안을 모색해봤지만, 인도에서는 전혀 통하지 않았다. 애초에 해결할 문제가 아니란 것처럼.

조드푸르로 가는 기차역에서 photo by. rene

  No problem. 인도에서는 무슨 말을 해도 시작은 노 프라블럼이었다. 기차를 놓쳐도, 사기를 당해도, 소똥을 밟아도, "노 프라블럼." 진짜 아무 문제가 아니라는 듯, 나를 바라보며 미소를 짓는다. 그들의 미소는 진짜 말 그대로 더럽게 아름답다. 처음에는 그 말이 일종의 "Okay."인 줄 알았다. 아니었다. 그냥 문제가 아니라는 말이었다. 그들은 어떠한 해결도 제공하지 않는다. 그냥 문제가 아닐 뿐이다. 노 프라블럼.


  인도인들의 그런 태도는 한국인의 피를 들끓게 하기에 차고 넘쳤다. 첫 일주일간 나는 어디서나 짜증을 내고, 화를 내곤 했다. 그렇지만 아무것도 바뀌지 않았다. 지치고 지칠 때 쯤, 스스로 인정하고 받아들일 수 밖에 없었다. 그럴 수 밖에 없었다. 노 프라블럼. 해결할 수 없는 것을 문제라고 부르지 않기로 했다.


  소똥을 피하지 못한 건 문제가 아니다. 기차가 늦어지는 건 문제가 아니다. 상황일 뿐이었다. 자연재해와도 같은 상황을 내가 마음대로 하지 못한다고 화를 내며 문제랍시고 덤벼드는 행동이 문제였다. 오히려 내가 잘못된 것이었다. 그래서 남은 여행 기간만큼은 내가 먼저 노 프라블럼을 외치며 보내기로 다짐했다.

바라나시 숙소의 직원들 덕분에 편히 쉬었다. photo by. rene

  기차를 놓쳤다. 노 프라블럼. 버스에서 사고가 났다. 노 프라블럼. 길을 잃었다. 노 프라블럼. 내가 어찌할 수 없는 일은 전부 다. 노 프라블럼.


  그러자 내가 할 수 있는 일들이 명확하게 보이기 시작했다. 기차를 기다리는 시간 동안 주변의 현지인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버스가 멈춘 곳에서는 주위 풍경을 눈에 담을 수 있었다. 즐거움과 여유를 찾았다.


  그때부터 인도는 지옥이 아니라 천국으로 변했다.

인도에서 만난 부녀의 모습 photo by. rene

  요즘도 가끔은 여유를 잃고 조급한 마음이 드는 날이 있다. 하지만, 조금만 숨을 돌리면 내가 어찌할 수 없는 일과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구분되기 시작한다. 만약 오늘 하루 계획이 뒤틀렸어도, 나는 어쩔수가 없다. 이제부터 남은 하루를 최대한 활용하며 즐겁게 보내는 일이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인 것이다. 지나간 것들은 바꿀 수가 없다. 우리가 마음을 두고, 노력해야 할 순간은 지금도 이렇게 흘러가고 있으니까.


  최선을 다하라는 말을 그렇게 좋아하지는 않는다. 세상에는 우리가 어찌할 수 없는 일들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진정한 최선은 주어진 상황 속에서 내가 할 수 없는 것들을 발라내고, 내가 할 수 있는 일들을 하나하나 해결해나가며 상황을 최선으로 만들어가는 것이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했다.


하루하루는 치열하게, 인생 전체는 되는대로 살고 싶다.
- 영화평론가 이동진
인도 여행 당시, 바라나시의 한 카페에서 photo by. rene

ps. 미화된 기억이 많다. 정말 힘들었지만, 여행을 제안하고 사진을 남겨준 내 친구 강필중에게 감사의 말씀을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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