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정을 무시하는 게 꼭 안쓰러운 건 아니라고
현대인 중 절반 이상이 우울감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일상에 방해가 되는 정도가 아니어도 가끔 찾아오는 우울감에 거리를 배회하기도, 숨이 막혀 잠을 이루지 못하기도 하니, 우리에게 우울이란 감정은 싫지만 익숙한 감정일 테다. 실제로 병원에 가서 상담을 받아 본 입장이 되니 우울이란 감정이 얼마나 사람을 무력하게 만들고 짓밟는지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었다.
새벽 1시 인스타그램을 켜면 수많은 스토리 속 우울함을 노래하는 내용을 쉽게 볼 수 있다. 모두가 잠든 시간에도 잠들지 못한 이들은 우울을 안고 베갯잇을 적시고 있는 것일지 모른다. 직접 우울감을 느껴보니 중독성이 상당하다. 한 번 우울하게 생각하니 사소한 언어와 행동들 모두가 나를 공격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감정을 솔직하게 인정하는 것이 좋다지만, 우울이라는 녀석은 조금 범위가 다른 것 같았다. 자꾸만 일상을 잠식했다. 자신에게 집중해달라고, 더 많은 관심을 달라고 아우성을 펼쳤다.
취준생이라고 부르고 백수라고 쓰던 시기에 우울감은 항상 내 곁에 있었다. 고정적인 루틴이 없으니 하루 종일 하는 일 중 대부분은 '생각'이었다. 기쁜 일이 많았지만 생각은 자꾸만 우울이라는 녀석을 가까이하고자 했다. 지금은 내 감정에 집중해보자고 한 것이 계기였을까. 나는 '우울'을 만져보고자 했다. 김초엽 작가의 단편 소설 <감정의 물성>에서 등장인물이 행한 것처럼 나는 우울을 만졌다. 그리고 만질수록 우울에 잠식되었고 나의 일상 대부분을 우울로 채우는 행위를 반복했다.
처음에는 탈락 문자가 우울이었다. 그리고 그다음은 나의 학점, 영어 점수로 흐르다가 결국엔 입학 시기까지 흐르더니, 우울의 강물은 태어난 순간까지 빠르게 흘렀다. 유속이 점점 빨라지는 것을 느낄 쯤에는 이미 나의 출생을 부정하고 있던 것이다. 문제를 느꼈을 때는 이미 우울감이 꽤 크게 자리 잡아서 친구에게 급히 전화를 했고 반 강제로 이끌려 병원에 갈 수 있었다.
나의 우울은 감정에 집중한 것이 문제가 아니었다. 감정에 집중한다는 핑계로 아무것도 하지 않은 것이 문제였다. 운동을 계속하면 운동이 는다더니, 우울을 지속하니 우울이 커졌다. 감정의 증폭은 무엇보다 빨랐다. 처음에는 천천히 늘더니, 시간이 지날수록 규모의 경제를 달성하는 것들이었다. 병원에서는 약간의 처방과 함께 루틴을 잡아보는 것을 추천했고 나는 그 즉시 가장 자기 관리가 철저한 지인에게 전화를 해 도움을 요청했다. 추진력이 다 하기 전에 병원에 간 것이 참 다행이었다.
지인은 국가에서 일하는 공무원이다. 몇 년 전 5급 공개채용 시험을 통과한 사람이라 철저한 자기 관리와 수험생활에 대한 이해가 있는 사람이었다. 실제로 매일 13시간의 순공 시간(순 공부시간)을 달성하지 않으면 집으로 가지 않았고 통학 시간이 아까워 고시반 바닥에서 침낭 생활을 이어간 사람이었다. 고시반 특유의 우울한 분위기 속에서도 그는 잡담이나 산책을 하지 않았고 자신의 감정을 유예했다고 한다. 불쑥 올라오는 감정이 있었지만, 잠깐만 눌러두기로. 그렇게 3년의 시간을 보내고 시험에 합격했다고 말했다.
"감정을 무시한다고?" 상식과는 다른 대답에 나는 물었다. '감정을 놓쳐선 안되지만 순간의 감정이 진짜 감정이라고 오해하는 경우가 더 많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었다. 정말 중요한 감정이라면 오랫동안 지속된다고 말하며, 우리는 쉬고 싶어서 감정을 핑계로 멈춰가는 일이 많다고 말했다. 오히려 우발적인 감정의 폭발을 조절하지 못하면 정말 돌봐야 할 우리의 진짜 감정이나 신념을 놓치게 된다는 말이었다. 그렇기에 충동을 누르고 행동을 계속하고 생각을 할 시간에 몸을 움직이는 선택이 중요하다고 했다.
"생각은 아무것도 바꾸지 못해." 그가 마지막으로 강조한 말이었다. 맞는 말이었다. 우울과 즐거움을 막론하고 하루를 공상과 고민으로 가득 채우고 나면 결국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하루를 보내기 일쑤였다. '조금만 더 신중히, 조금 더 완벽한 상태에서.'라는 말로 나의 감정을 정리하고 시작하려는 태도는 시작을 미룰 뿐만 아니라, 감정을 더 끌어들이는 자석을 심장에 두는 일이었다. 바다가 호수처럼 잔잔해지길 기다리며 출항을 기다리는 마도로스가 어디 있으랴, 파도를 이기고자 범선을 만들고 얼음을 깨는 쇄빙선을 만드는 것이 바다를 대하는 사람의 태도였다.
그 날 이후로 작지만 꾸준한 루틴을 만들기 위해 노력했다. 아침에 일어나서 이불 개기, 밥 먹고 바로 설거지 하기, 30분 간 운동하기, 공원 나가서 3km를 뛰기, 하루의 한 편의 글쓰기. 백수가 시간을 채우는 일은 사소한 것들 뿐이었지만 거짓말처럼 우울감이 사라졌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우울이란 단어를 떠올릴 시간이 없었다. 그렇지만 내가 무언가를 놓치고 있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나는 정물이 아닌 동물이었고 동물의 본질은 움직이는 데 있다는 생각을 했다. 어쩌면 번아웃이라는 것은 열심히 살았기 때문이 아니라, 몸이 상해서 멈추기 때문에 발생하는 일이 아닐까 라는 생각이 이어졌다.
회사 생활을 시작하고 나니 참 작은 요소들이 마음을 건드릴 때가 많다. 작은 오타 하나, 예상대로 진행되지 않는 시장 상황뿐만 아니라 프린터가 잠시 멈춘 것도 예민하게 받아들일 때가 많다. 직원 교육을 진행하다가 잠시 지은 무표정에도 '내 교육이 불편했나?' 신경 쓰기도 한다. 하지만 그럴 때 일단은 무시하고 서류 작업을 한다. 아니면 포장을 좀 하거나, 장표를 정리하며 시간을 보내는 것이다. 잠깐의 파도 같은 감정이 나를 덮칠 때 업무라는 헤엄을 치며 계속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그러다 보면 조금 더 넓은 바다에 와 있다. 그리고 깨달을 수 있었다. '해안에서 머물고 있으니 파도가 느껴지는 것이었구나, 넓은 대양은 오히려 잔잔했다는 사실을.'
가끔 튀어 나오는 감정에 내 삶이 문제가 있나 싶을 땐. 일단은 하던 일을 계속해보자. 아니면 다른 일을 찾아서 시간을 채워 보자. 작게 베인 상처를 발견하고 나서야 아픈 적이 있던 것처럼, 알지 못했다면 아픔도 느끼지 못한 체 나아 버렸을지도 모른다. 감정의 칭얼댐을 너무 받아주지는 말자. 감정이 나를 자꾸 쥐락펴락 하지 못하도록. 정말로 집중해야 할 때만 집중하는 일이 우리가 감정의 노예가 되지 않고 감정과 함께 살아가는 방법이 아닐까?
"감정을 무시할 줄 아는 것, 감정과 함께 살아가는 방법일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