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19. 스모크

- 캐논 AE-1

by JI SOOOP

브루클린의 거리 한 모퉁이, 매일 아침 8시. 담배 가게 주인 오기 렌은 카메라를 들고 사진을 찍습니다. 셔터를 누르는 순간, 1/1000초의 시간이 영원히 멈춥니다. 이것이 바로 영화 <스모크>의 시작이죠..


웨인 왕 감독의 ‘스모크’는 담배 가게 주인 오기를 중심으로 5명의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소설가 폴 오스터가 1992년 출간한 ‘오기 렌의 크리스마스 이야기’를 바탕으로 하며 그가 직접 각본에도 참여하여 만든 영화입니다.


1995년 개봉한 이 영화를 봤을 때, 담배 가게 주인 오기의 집요함에 의문을 품을만했습니다. 14년간 4천 장. 같은 장소, 같은 시간에 찍은 사진들. 얼핏 보면 모두 비슷해 보입니다. 하지만 오기는 말합니다. "천천히 봐." 그의 말대로 천천히 들여다보면, 각 사진 속에 숨겨진 이야기가 하나씩 보이기 시작합니다. 눈 내리는 겨울 아침, 우산을 든 행인들로 가득한 비 오는 날, 소방차 불빛이 번쩍이는 한밤중의 거리.


그리고 우연히 포착된 순간들. 아내를 잃고 멍하니 서 있는 소설가 폴, 길 잃은 청소년 래시드, 그리고 가장 극적인 순간 - 총성이 울리기 30초 전, 폴의 아내가 가게 앞을 지나가는 모습. 이 한 장의 사진이 폴의 인생을 바꿉니다. 3년 전 잃은 아내의 마지막 모습을 우연히 발견한 그 순간, 작가로서 멈췄던 폴의 시간이 다시 흐르기 시작합니다.

IMG_3344.jpg
img.jpg

오기가 사용했던 캐논 AE-1 카메라. 1976년 출시된 이 카메라는 1984년까지 만들어졌으며 무려 100만 대가 넘게 팔렸으며, 당시에는 혁명과도 같았습니다. 영화 ‘다만 널 사랑하고 있어’에도 시즈루 카메라로 등장하기도 했죠. AE-1은 최초로 마이크로프로세서를 내장해 자동노출을 구현했고, 590g의 무게, 뷰파인더 속 노출계 바늘의 움직임, 필름을 감는 소리. 이 모든 것이 오기에겐 일상의 리듬이었을 것입니다.


이 카메라는 무려 세계 최초라는 타이틀을 갖고 있는데, 바로 중앙 처리 장치(CPU)가 들어간 첫 35mm SLR 카메라입니다. 아울러 TTL 측광기를 장착해 렌즈를 통해 들어오는 빛의 양을 측정하는 자동 노출 기능을 탑재했습니다. 자동 노출 제어를 뜻하는 AE(Automatic Exposure)에다가 1이라는 숫자를 붙여 최초라는 의미를 부여했습니다.

img_bd_05_259_1.jpg

오기의 프로젝트는 우리에게 묻습니다. 당신의 일상은 얼마나 특별한가요? 매일 반복되는 듯한 삶 속에서, 우리는 얼마나 많은 기적을 놓치고 있을까요? 디지털 카메라가 즉각적인 결과를 제공하는 시대에, 필름 현상 시간이 주는 기다림의 가치는 무엇일까요?


영화 <스모크>는 일상예술의 본질에 대한 탐구이며, 인간관계의 미묘한 연결고리를 포착한 시적인 기록입니다. 오기의 캐논 AE-1은 보이지 않는 것을 보게 하고, 들리지 않는 것을 듣게 합니다.


영화를 다시 보며 오기와 같은 인물이 있었을까요? 매일 같은 시간, 같은 장소에서 셔터를 누르는 그 누군가가. 생각해 보니 자기 아파트에서 매일 무등산을 찍었던 이주한 작가가 생각납니다. 그도 매일 아침마다 천일동안, 무등산의 변화를 기록하고 발표했습니다.


우리 모두의 일상 속에는 4천 장의 특별한 순간들이 숨어있습니다. 다만 그것을 발견하는 눈을 가졌는가의 차이일 뿐. <스모크>와 오기의 캐논 AE-1은 우리에게 그 눈을 뜨게 해 줍니다. 천천히, 그리고 꾸준히 바라보라고. 그러면 언젠가 당신만의 특별한 순간을 포착할 수 있을 것이라고.


담배 연기처럼 흩어지는 삶의 순간들. 하지만 그 연기 속에서도 우리는 서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오기의 4천 장 사진이 증명하듯이. 이제 우리는 매일 아침, 우리 삶의 한 장면을 바라볼 수 있습니다. 비록 지금 실제 카메라는 없더라도, 마음속의 셔터를 눌러봅니다. 찰칵. 오늘도 특별한 하루가 시작될 테지요.

keyword
이전 18화18. 싱글에이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