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브런치북 Unlock 01화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보비 Apr 02. 2024

도전과 행동하는 삶의 시작점

유럽 배낭여행으로 얻은 귀한 경험 자원

몇 년 전, 국민대학교 경영대학원에서 '리더십과 코칭 MBA' 과정을 들었습니다. 전문코치가 되어야겠다는 포부를 품고, 학문적으로 이론과 실습이 바탕이 되는 코치가 되어야겠다는 생각으로 대학원에 입학했습니다. 3학기 차에 이동우교수님에게 '긍정심리학'이라는 수업을 들으며, 긍정심리학의 개념과 철학적 지향점이 저에게는 굉장히 와닿았습니다. 만약 내가 공부를 더한다면, 긍정심리학 부분을 파보고 싶다는 생각을 할 정도였습니다. 코칭도 긍정심리학의 기반을 둔 것이라 더 관심이 생겼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수업 중 이동우교수님께서 저희에게 질문을 주시며 다음 주 과제로 내주셨습니다. "지금까지 나의 인생을 돌아봤을 때, 나를 대표할 키워드 2가지는 뭔가요?" 저를 포함, 대부분의 중년 나이의 학생들로 다양한 삶의 경험을 해왔으니 단어 2개로 표현하는 것이 오히려 쉽지 않은 과제였습니다. 교수님의 질문이 일주일 내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고, 지금도 여전히 이 질문과 답은 저에게 큰 영향을 주고 있습니다. 저는 오래 걸리지 않는 시간에 두 단어가 떠올랐습니다. 어떤 삶을 살았을까 제 삶을 돌아보니 끊임없이 새로운 목표에 도전하고 그 도전을 해내기 위해 행동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도전과 행동

도전과 행동의 시작은 대학교 3학년 겨울방학이었습니다. 그전에도 이런 성향은 있었겠지만, 가장 기억에 남는, 혹은 성공적이라고 느낄만한 일은 친구와 둘이서 떠난 '40일간의 유럽 배낭여행'이었습니다. 대학교 전공이 불어불문학과였기에 유럽에 대한 로망이 있었습니다. 대학 시절 친구들과 삼삼오오 우리도 '퐁네프의 다리'를 걸어보고 싶다거나, '몽마르트르 언덕'에서 '사크레쾨르 대성당'에서 파리를 내려다보고 싶다던지, '물랭루주'를 가보고 싶다는 이야기를 수도 없이 하곤 했습니다. 지금은 돈과 시간과 의지만 있다면 쉽게 가볼 수 있는 곳이 되었지만, 저의 대학시절에는 해외로 가는 것은 꿈과 같은 일이었습니다. 86 서울 아시안게임과 88 서울 올림픽을 성공적으로 개최하고, 국제와의 흐름과 경제 성장, 국민의 생활 수준 향상 등이 배경이 되어서 1989년 1월 1일부터 누구나 자유롭게 해외여행을 할 수 있는 '해외여행 자유화'가 시작되었습니다. 그전에는 해외여행이라는 것은 제한적으로 갈 수 있던 때였습니다. 3학년 봄 학기, 봄 볕 좋은 어느 날, 친구들과 교내 캠퍼스 잔디밭에 앉아 "우리도 가볼까?"라며 농담 반, 진단 반으로 웃으며 던진 이야기입니다. 다들 "우리도 가자"고 했고, 그중 저를 포함한 4명이 호기롭게 떠날 준비를 시작했습니다. 해외여행 자유화가 되고 서울에서는 배낭여행이 막 시작되고 있었습니다. 


엄한 가정환경으로 인해 대학생이 된 뒤에도 친구집에서 외박을 한 경험도 없는 저였습니다. 해외여행을 가기 전의 첫 번째 관문이 가장 가까이에 있는 부모님을 설득하는 일이었습니다. 특히 아버지의 반대를 걱정을 엄청했지만, 친구들과 나눴던 이야기, 왜 유럽을 여행하고 싶은지에 대해 말씀드렸습니다. 의외로 아버지는 너무 쉽게 허락을 해주셨고, 오히려 엄마가 더 걱정을 많이 하셨습니다. 첫 번째이자 가장 큰 관문을 통과하니 뒤의 절차들은 쉽게 느껴질 정도였습니다. 반공교육도 받고, 여권도 준비해야 했고, 항공권 구입, 국제학생증, 유스호스텔증, 유레일패스 구입 등 많은 준비가 필요했습니다. 지금이야 여행지에 대한 정보가 넘쳐 나지만 당시는 정보가 한정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강원대학교를 다니던 저는 서울에 집중되어 있던 정보를 얻는데 더 제한적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친구들과 여행 준비를 하는 여정조차도 너무 설레고 흥분되고 기대되는 시간이었습니다. 여행경비를 모으기 위해 아르바이트도 하고, 학업 틈틈이 저렴한 비행기표를 얻기 위해 소공동에 있던 여행사에 가기도 했고, 'Lonely Planet'과 같은 여행 가이드북을 참고하기도 하고, 발 빠르게 배낭여행 설명회를 여는 여행사도 방문해서 정보를 얻기도 했습니다. 


친구 4명이 함께 가자고 시작한 여행은 저와 친구 한 명이 남았습니다. 대학 3학년을 대부분 친구와 함께 여행 준비를 했던 것 같습니다. 겨울방학을 이용해 40일간 영국을 거쳐, 네덜란드, 독일, 오스트리아, 유고슬라비아, 그리스, 이탈리아를 넘어 프랑스까지의 여정이었습니다. 불문과 학생이었기에 40일 중 절반인 20여 일은 프랑스에 머무르기로 했습니다. 40여 일간의 여정은 다이내믹한 경험들이 많았습니다. 책이나 영화 등으로 간접적으로 접하던 문화를 직접 체험하고 경험할 수 있는 소중한 기회였습니다. 이때의 경험은 저의 삶에 크고 중요한 자원으로 남아있고, 더 나은 미래를 위한 발판을 마련해 주었습니다. 첫 도착지였던 영국 런던의 히드로 공항에 도착했을 때의 공기는 지금도 제 코 끝에 남아 있음을 느낍니다. 착륙을 하기 위해 비행기 안에서 내려다본 런던의 풍경은 그동안 보았던 겨울 풍경과는 너무 달라 생경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한국의 땅은 연한 갈색 느낌인데, 런던의 땅 색깔은 붉은빛이 도는 황토색으로 달랐고, 겨울임에도 초록색 잔디 같은 풀들이 붉은색 기운의 황토색 땅과 잘 어우러져 이국적이면서 뭔가 비옥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드디어 그렇게 기다리고 기대하던 유럽에 발을 내딛는다는 생각만으로도 지금도 격한 감정으로 올라옵니다. 런던에서의 3일 일정은 운 좋게 날씨가 맑아서 우리의 남은 여행이 좋을 것이라며 기뻐하기도 했습니다. 대영박물관 앞에서 북한 사람을 만나 긴장하며 놀랐던 일, 첫 유스호스텔로 가는 길의 험난한 여정 등등.


페리를 이용해 영국에서 네덜란드에 도착했을 때도 풍차 나라의 아기자기한 그림을 예상했는데, 도로 바닥에 붙어있는 수많은 껌딱지들도 너무 인상 깊었습니다. 환상이 깨졌다 생각할 때, 암스테르담을 가로지르는 암스텔 강의 유명한 다리들 앞에서 만난 중년의 그리스 남성 분과의 운하 여행 후 카페에서 만나 대화하면서 한국에서 가져온 키홀더 등을 선물로 드리던 유쾌한 기억들도 있습니다. 독일과 오스트리아의 각 도시들을 돌며 유럽의 매력에 풍덩 빠지기도 했습니다. 한국에서 준비한 유레일패스로 기차여행을 맘껏 하며 국경을 넘나들었지만, 독일에서 유고슬라비아를 거쳐 그리스로 넘어가야 하는 때는 기차 칸을 잘못 타서 지금은 사라진 공산국가인 유고슬라이바에서 남겨질 뻔한 위험천만한 일도 있었습니다. 열차에서 하차하여 이민국에서 여권에 도장을 찍어야 할 찰나, 운 좋게 정말 하늘이 도우셔서 그리스로 가는 열차로 올라탔습니다. 아마 이때 도장을 받았더라면 한국에 들어올 때 엄청 고생을 했을 거라는 것은 빤한 일이었습니다. 그리스 신전에서 만난 여학생들도 기억에 남습니다. 동양 여성 2명이 여행하는 것이 더 신기했던지, 저희에게 사진을 찍자고 할 정도였습니다. 그때 찍었던 사진은 지금도 액자에 걸려있는데, 볼 때마다 그때의 기억이 새록새록합니다.


그리스에서 이탈리아로 넘어올 때는 대부분 배로 이동을 하는 경로를 선택했습니다. 배에서 1박 숙박을 하는 경로였는데, 일주일에 1~2번 일정이라 배낭여행객들은 대부분 함께 모여서 가게 됩니다. 한국여행객들도 그곳에서 5~6명 만났는데, 모처럼 만난 한국사람들이고 대학생들 또래여서 1박을 함께 하면서 즐겁게 네트워킹을 하게 됩니다. 배 안에서 만난 키가 190cm는 족히 되어 보였던 호주 남성 2명은 세상에 그렇게 잘생긴 사람들이 있을까 감탄하며 바라보기도 했습니다. 이탈리아에 도착해서는 각자의 여정에 맞춰 떠나는데, 그중 머리가 긴 남성 분이 계속 마음에 남았습니다. 평소 키가 크고 마른 스타일을 좋아했던 저였는데, 딱 제 이상형과 비슷했고 말수도 별로 없이 예술가 느낌이 나던 분이었는데, 영문학과 졸업을 앞둔 복학생으로 연극을 하던 분이었습니다. 이탈리아의 피렌체와 로마를 지나 프랑스로 넘어가는 동안에 제 마음에 계속 남아 프랑스 보르도에 와서 밸런타인데이를 앞두고 초콜릿을 보내기도 했으니 젊은 시절의 풋풋함과 도전정신이 어디까지 쓰였는지 새삼 놀랍습니다. 유럽의 열차를 이용할 때는 콤파트먼트(Compartment, 일반 좌석칸으로 마주 보는 좌석이 있는 작은 방 형태로 좌석을 잡아당겨 간이침대로 변환할 수도 있음)를 주로 이용했는데, 니스로 넘어가는 밤열차에서는 콤파트먼트 안에 저와 친구만 있어서 둘이 수면을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감기가 걸려서 배낭을 베고 자던 중, 살짝 잠이 깼을 때 배낭이 바닥에 떨어져 있어 다시 배낭을 끌어올려 베고 잤는데, 아침에 일어나니 배낭 안에 있던 카메라와 독일에서 아버지께 드리려고 샀던 '호너(Hohner)' 하모니카와 친구들에게 줄 선물들이 몇 개 없어진 걸 알았습니다. 자다가 눈을 떴을 때, 누군가가 들어오려고 했던 것이 기억이 났는데 그들이 아마 소매치기 범이었을 확률이 아주 높았습니다. 니스에 도착하자마자 경찰서로 가서 신고를 하고 물건을 잃어버린 증명서 같은 것을 발급받는 과정을 거쳤습니다. 당시 어떻게 경찰서로 갈 생각을 했는지, 가서 의사소통을 어떻게 했는지 지금도 신기합니다. 불문학을 전공했던 것이 그때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학교에서 불어 공부를 열심히 했던 것이 이런 때 도움이 되는구나 싶었습니다. 특히 증명서는 한국에 와서 해외여행자보험금을 받는데 쓰였습니다. 20만 원가량 인정을 받아서 돌려받았는데요, 그것이 없었더라면 보험금을 받기 어려웠을 테니까요. 


니스를 시작으로 보르도, 리옹, 마르세이유, 툴루즈, 파리 등 남은 20여 일을 프랑스에서 보냈습니다.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만 해도 유럽 대부분의 도시에서 영어를 사용하는 곳은 드물었습니다. 저희는 불어를 배웠기 때문에 그래도 잘 안 되는 영어와 불어를 섞어가며 의사소통을 했는데, 특히 프랑스에서 머물 때는 불어가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교수님께서 소개해주신 지인인, 프랑스 할머님은 저희를 집까지 초대해 주시고 그곳에서 3~4일 머무르게 해 주셨습니다. 특히 한국으로 귀국하는 비행기 편이 문제가 생겨 2일을 더 머물러야 하는 상황에서 할머님댁에서 머물 수 있었는데, 프랑스인의 일반 가정의 모습을 직접 볼 수 있어서 의미가 있었고, 할머님께서 잘 챙겨주셔서 감사했습니다.  


40여 일간의 여정 동안 새롭고 다른 문화를 보고 경험한 것은 저의 삶에서 큰 영향을 미치게 되었습니다. 친구와 함께 떠난 여행은 타인과의 다름이 어떤 것인지를 경험하기도 했습니다. 많이 안다고 생각했던 것이 함께 먹고 자고 생활하는 삶이 되었을 때, 어떤 감정으로 다가오는지. 서로 가치관이 달라서 가고 싶고, 보고 싶고, 체험하고 싶은 것들도 다를 수 있다는 것을 여행을 준비할 때는 미처 몰랐습니다. 타인과 함께 평생을 살아야 하는 것의 의미를 이때 조금이나 알게 되었고, 다름을 지혜롭게 인정하고 살아가야 한다는 것도 깨닫게 되었습니다. 저희 첫 번째 도전은 저의 삶의 가치관을 형성하는데 자원이 되었습니다. 쉽지 않은 과제일 수 있지만, 일단 도전하고 행동하면 조금씩 앞으로 간다는 것을 배웠습니다. 만약 '내가 해외여행을 갈 수 있겠어?'라고 안주했다면, 저는 이런 다양하고 귀한 경험을 해볼 수 없었을 것입니다. 두렵지만 도전해 보자는 마음의 소리를 듣고 제 앞에 있는 문을 열었기 때문에 얻은 결과입니다.  


우리는 종종 내가 처한 상황과 환경에 나를 맞추게 됩니다. 때로는 해보지 않은 낯선 일들에 두려움을 갖고 지레 피하게 됩니다. 그런 삶은 내가 주인이기보다 타인이 중심이 되는 삶이 될 가능성이 큽니다. 내가 내 삶을 주도적으로 살아갈 때 우리는 효능감을 느끼게 됩니다. 삶은 선택입니다. 제 앞의 문을 도전과 행동으로 열고 저는 제 삶을 디자인하기로 선택했습니다. 어떤 키워드로 나의 삶의 문을 열고 계신가요?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