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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보비 May 14. 2024

불문학도지만 영어를 좋아합니다.

나는 참 자기 합리화를 잘하는 사람이다. 자기 합리화를 하는 이유가 사람마다 제 각각 일 수 있고, 그 이유를 굳이 찾고 싶지 않을지도 모른다. 나도 그렇다. 내가 했던 대부분의 일들이 '불현듯', '뜬금없이' 일어난 일들이라 그 이유를 설명하기 어려운 경우이다. 어떤 일들은 내가 원했던 방향은 아닌 일들도 많아서 이왕 벌어진 일, 후회보다는 그 상황에서 최선을 다하지 하는 마음에 자기 합리화를 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런 자기 합리화를 했던 대표적인 일이 대학교 입학이다. 중학교 때는 작가를 꿈꿨고, 고등학교 진학하고서는 어떤 특별한 꿈을 가졌던 기억이 없는 것 같다. '신문 기자'라는 직업이 좋아 보여 '신문방송학과'를 가고 싶어 했던 기억이 있다. 가고 싶었던 대학교와 학과는 있었지만, 열심히 공부를 하지 않으면 원했던 곳을 가긴 어려웠다. 지금은 '평생학습자'로 살아가고 있다고 자부하지만, 고등학교 시절 나는 정말 공부에 취미가 없었다. 특히 수학, 과학 등 이과 과목들은 어렵고 당연히 재미도 없었다. 흥미가 없어서 어렵게 느껴졌는지도 모른 그런 내게도 그래도 수업이 재미있다 느끼는 수업들은 대부분 선생님이 좋았기 때문이다. 선생님에 대한 관심이 딱히 있는 것도 아닌데 좋아했던 과목은 국어와 영어, 제2외국어로 선택한 불어 등 언어 과목이었다. 좋아한다고 꼭 잘했던 것은 아니다.

특히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언어'라고 불리는 '프랑스어'는 발음이 독특하게 들렸고, 프랑스가 주는 이미지가 이국적이고 매력적이었다. 키도 크고 늘씬한 불어 선생님도 굉장히 서구적이고 인형 같은 외모를 갖고 계신 분이셨는데, 패션 감각도 좋아 수업을 하는 날은 눈과 귀가 즐거운 시간이기도 했다. 프랑스 이미지에 딱 맞는 분이셨다.


고3이 되고, 대학 입학을 위한 학력고사를 봤지만 당연히 결과는 내가 원하던 학교를 가긴 어려운 점수가 나왔다. 등록금도 사립이라 비싸고 자취도 해야 하는 서울로 대학교를 가기보단 집에서 다닐 수 있는 강원대학교의 불어불문학과를 가기로 결정했다. 다른 학과도 아닌 불어불문학과를 선택한 결정적인 이유는 그래도 좋아하는 언어이니 4년 동안 배울 수 있겠다 싶었다. 

“아, 여기 오려고 시험 결과가 그렇게 나왔나 보다” 

가고 싶었던 학교와 학과는 아니었지만 나는 대학교 다니는 동안 나의 선택에 대한 자기 합리화했다. 가끔 가도 다른 곳에 갔었으면 어땠을까? 나의 삶이 또 달라졌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는 때도 있었지만, 처한 상황에서 늘 최선을 다하려고 노력을 했던 듯하다. 지금은 불어와 관련된 일을 하지도 않고 내가 좋아한다고 생각했던 것만큼 불어를 취미로라도 접하는 일도 없지만, 당시에는 불문과에 다니는 것이 만족도가 높았다.   

  

강원대 불어불문학과는 3학년이 최고 학년이었던 신생 학과였다. 불문학 분야의 권위자로 프랑스 문학 번역과 소개, 문학 평론, 번역 비평 등 다양한 영역에서 큰 업적을 남기신 황현산 교수님께서 학과장으로 계셨다. 내가 입학하던 해 부임하신 김용은 교수님은 4년 내내 우리들의 친구 같은 교수님으로 늘 든든하게 받쳐주셨다, 내가 3학년 겨울 방학에 친구 명희와 둘이서 40일간 유럽 배낭여행을 떠났을 때 큰 도움을 주시기도 하셨다. 황현산교수님과 김언자 교수님, 김용은 교수님 세 분의 훌륭한 교수님들께 나는 자유롭고 독립적인 분위기에서 불문학을 배우는 행운을 얻었다. 아직 1기 졸업생도 배출하지 못했기에 1, 2, 3학년 모두 함께 만들어간다는 느낌으로 학교를 다녔다. 


학과 분위기도 좋았고, 불어 공부도 재밌었다. 재밌으니 수업을 열심히 듣게 되고 장학금을 받을 수 있는 성적도 받게 되었다. 당시 불어학원은 서울 강남에 '에꼴 프랑스어학원'이 있었다. 1학년 겨울 방학에는 서초동에 사시는 막내이모댁에서 있으며 방학 2달간 꼬박 서초역과 강남역을 오가며 불어 회화와 작문 공부를 배웠다.  이 일을 통해 내가 얻었던 인사이트가 있었다. 무엇을 하든 그 안에 있을 때는 모른다는 것이다. 학원을 다닐 때는 내 불어가 늘고 있는지 몰라 시간을 허비하는 것은 아닌가 싶은 마음도 들어 답답한 면도 있었다. 새 학기가 시작해 2학년 수업을 듣는데 내가 방학 동안에 정말 많이 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때 경험으로 무엇인가 할 때는 그 변화와 성장이 보이지 않지만, 시간이 지나면 뭐든 그 경험들이 발휘된다는 것이다. 물론 어떻게 그 시간을 썼는지에 따라 품질은 달라질 수 있겠지만.

 

이렇게 불어를 좋아하는 불문학도인 나였는데, 어느 순간부터 불어보다 영어를 더 좋아하게 되었다. 당시 춘천에는 미군 부대 '캠프 페이지'가 있었다. 친구 아버지가 캠프 페이지에서 근무하셨는데, 아버지 소개로 남편을 따라온 미군 가족에게 영어를 배우게 되었다고 했다. 워낙 언어를 좋아했고, 외국에 대한 로망이 있었기에 함께 배우게 되었다. '민병철 영어 회회 테이프'를 통해 영어 회화를 배우던 시절이라 미국인에게 직접 영어를 배운다는 것은 큰 용기가 필요했다. 정확하게 기억은 안 나지만 친구와 나와 영문과 후배 등 한 4~5명이 미국인 선생님 댁으로 방문해 일상생활에 대한 영어 회화를 하는 수업으로 진행되었다. 영어 회화를 잘 못했지만, 너무 재밌었다. 


내가 좋아했던 것은 불문학이 아니라 불어로 말을 하는 것이었다. 불어불문학과였지만 '불어학'이기보다 '불문학' 위주로 3학년이 되니 커리큘럼이 짜였다. 상대적으로 재미가 없으니 나는 전공보다는 다른 곳으로 눈을 돌리기 시작했다. 불어 회화 쪽으로 나는 집중할 수도 있었겠지만, 영어 회회 스터디를 통해 영어 회화는 계속 내 곁에 있으며 영어가 나의 아쉬운 부분을 달래주었다. 영어가 취업에 도움이 된다는 것도 영향을 미쳤을지도 모른다. 어쨌든 나는 문학에 관심이 있기보다 실용적인 학문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대학 3, 4학년은 거의 영어와 관련된 공부를 많이 했던 것 같다. 같이 공부했던 영문과 후배들과 영어 랩에 매일 출근했다. 이제 불문과 동기나 선후배들도 내가 불어보다 영어에 더 관심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영어공부를 이렇게 열심히 하고 다닌다는 소문 덕분에 4학년 가을 경, 조교 언니가 호출을 하셨다. '서울 소재 한 무역 회사에서 영어 하는 사람을 뽑는다'던데 시험을 보겠냐고 물어보셨다. 대학을 졸업하고 취업을 바로 하고 싶었던 나는 흔쾌히 수락했다. 서울로 면접을 보러 간 회사는 ㈜서울교역이라는 작은 무역회사로 당시에 일본에 캐드 제품을 판매하려고 했다. 남대문 시장 길 건너 소공동, 옛날 담배인삼공사 별관 건물에 위치한 곳으로 회현역에서 내려 남대문 시장을 가로질러 처음 출근했던 날은 아직도 기억이 생생하다. 강원대학교는 매년 2월 22일이 졸업식인데 내가 졸업했을 때의 2월 22일은 금요일이었고, 나는 25일 월요일부터 출근을 하게 되었다. 지금처럼은 아니지만 당시도 취업에 대한 갈망이 있던 시절이라 서울로 취업을 해서 올라올 수 있다는 것이 내게는 너무 기쁜 일이었다. 


'불어'로 대학교를 입학했고, '영어'로 취업을 하면서 내가 깨달은 것이 있다. 삶은 내가 의도한 곳으로 흘러가지 않는다는 것을. 불어를 좋아했지만, 영어로 취업을 하게 되었다. 내가 했던 것은 내 눈앞에 있는 현실을 수용하고 그 안에서 최선을 다해 책임감 있게 살려고 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내가 하고 있는 것들을 주변에 알렸다. 당연히 혼자서 살아가는 세상은 아니다. 내가 혼자서 꽁꽁 싸매고 영어 공부만 하고 있었더라면 누가 나에게 이런 곳에 취업해 보라고 연락을 했겠는가. 기회는 언제 어디서 오게 될지 모른다. 그 기회는 우리 눈앞에 널려 있지만 그 기회를 내가 잡을 수 있느냐 없느냐는 내가 기 기회를 볼 수 있는 눈이다. 이렇게 지혜로운 눈을 갖기 위해서는 무엇이든 배우고, 해보고, 실패하고, 또 도전하기를 멈추지 않으려 한다. 그러면 예기치 않은 곳에서 선물 같은 기회가 분명히 홀 것이다.


 이때의 경험치들은 나에게 삶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하나의 방향성을 갖게 해 주었다. '내가 원하는 곳에 가지 못해서, 내가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해서 속상해하는 대신 뭔가 이유가 있을 거야. 지금 해볼까?'  

최고의 자기 합리화가 아닌가!




오늘 글을 적다 보니, 와, 나는 대학교 전공까지 유서 깊은 곳에서 수학을 한 것이 아니라 신생학과에서 공부를 했다는 놀라운 사실을 기억했다. 나는 시작하는 단계에 합류해서 내가 만들어 나가는 것을 좋아하는 스타일이다. 새로운 것에 호기심이 많고 맨땅에 헤딩하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다. 대부분 내가 했던 일이나 몸담은 것들은 이런 내 성향이 반영되어 있었다. 그런데, 대학교까지 이런 초창기 멤버였다는 것을 까맣게 잊고 있었다. 어쩌면 성인으로서의 삶의 처음 찍는 점부터 나는 '시작박사' 기질이 가득했구나 싶어 신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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