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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보비 May 20. 2024

다양성과 포용에 대한 성찰

"우리 동료들이 출근했구나!"

살면서 타인의 관점이 나와 달라서 놀랐던 경험들이 종종 있었다. 내가 바라보는 시각이 전부인 줄 알았던 것이 타인의 시각이 더해지니 삶이 풍성해짐을 느낀다. 내 우물만 보던 내가 옆의 우물도 바라볼 수 있게 되어 시야가 넓어지고 마음의 폭도 커졌기 때문이다. 내가 아니기 때문에 볼 수 없는 부분을 어떻게 채울 것인가? 전 세계적으로 ESG(환경, 사회, 지배구조) 경영이 확산되면서 기업의 지속가능한 성장을 위해 더욱더 특별한 가치처럼 보이는 DEI(다양성, 형평성, 포용성의 영어 약어)가 중요한 열쇠일 수도 있겠다 싶다. 경험한 단순 일화이긴 하지만 나에게 다른 시각의 중요함을 일깨워주었던 특별한 사례가 있었다. 


호주 유학시절 학업을 하면서 파트타임(호주에서는 아르바이트라는 개념이 없고, 풀타임 파트타임으로 불렀다)으로 일했던 때이다. 집안의 반대를 뚫고 유학을 왔기에 적어도 생활비는 내가 벌어야 했다. 시드니 도착 후 Language School(어학원)을 다니면서 일을 할 수 있는 방법들을 찾기 시작했다. 유학생들이 할 만한 일은 한정적일 수밖에 없었다. 미국으로 간 유학생들은 식당에서 일하며 홀 서빙을 하는 웨이트리스와 주방에서 설거지나 감자를 깎는 일, 혹은 세탁소 아르바이트를 많이 한다고 했다. 반면 호주 유학생들은  ‘클리닝 서비스’ 일을 part-time job 형태로 많이 일하고 있었다.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식당에서 일하는 것보다 시급이 20% 정도는 더 많았기 때문이라 생각했다. 클리닝 서비스 관련 일은 크게 세 분류로 나뉘었다. 개인 집을 청소해 주는 '하우스 청소', 우리나라의 호프집 같은, 'Pub 청소' 등 식당 청소, 그리고 사무실이 있는 건물을 청소하는 '빌딩 청소'. 제일 힘든 일은 그중 Pub 청소로 한인들과 유학생들이 주로 일을 했다.


호주 도착하고 내가 만나는 사람들에게 “나는 일을 해야 한다. 아르바이트가 있으면 소개해줘, 클리닝 서비스 일도 할 수 있어.”라고 수시로 말하고 다녔다. 알고 보니 청소 일은 힘든 일이라 남자들을 선호했다. 일을 해야겠는데 어디서 어떻게 일을 시작해야 할지 막막했다. 어학원은 Bondi Juction 역 인근에 있었기에 사무실도 많았고 유동 인구도 많은 지역이었다. 역 근처에 푸드 코트들이 많았는데 아르바이트를 할 수 있는 일이 없나 찾아보기도 했다. 두어 달가량은 어학원을 다니면서 영어에 익숙해지고 낯선 곳에서의 일상도 익숙해지려 노력하며 부지런히 일도 찾아야 했다. 일도 일이지만 일단 의사소통이 되어야 했고, 호주 문화도 익숙해져야 했다. 학원마다 학생 분포들이 조금씩 달랐겠지만, 내가 다녔던 어학원에는 한국인, 일본인들이 상대적으로 많았고 유럽인들이 영어를 배우러 많이 왔다. 아마도 어학원의 위치상 본다이 비치가 가까웠기에 여행을 좋아하는 유럽인들이 놀며 공부하기 좋은 곳이었다. 일본인 친구들도 워킹홀리데이로 와서 공부를 하는 친구들이 많아서 자유로운 친구들이 많았다. 어학원에서는 열심히 공부하고, 게스트 하우스에 와서는 다양한 곳에서 온 친구들과 식사도 같이 하면서 영어로 대화를 나누며 실전 영어를 하기도 했다.


다니던 어학원의 한국학생들 중 남자친구들은 청소 관련 일을 하는 친구들도 꽤 있었다. 그중 친하게 지냈던 한 후배가 어느 날 급하게 귀국을 하게 되었다며 “누나 제가 하던 일 해 보실래요?” 물었다. 친구는 시티 근처에 있는 지하 3층, 지상 6층의 법원 관련 건물을 아저씨 두 분과 함께 청소를 하고 있었다. 평소에 내가 일해야 한다는 이야기를 많이 했고, 친구도 급하게 정리하고 떠나며 서둘러 사람을 구해야 하는 상황이 되었다. 당연히 나는 바로 “하겠다”라고 했고, 친구와 함께 수업 후 인수인계를 받기 위해 앞으로 일할 곳에 도착을 했다. 그리 놓은 빌딩은 아니었지만, 뭔가 가슴이 벅차고 압도되는 느낌도 받았다. 친구와 함께 일을 하는 아저씨 두 분께 인사를 드렸지만 그다지 반기는 분위기는 아님을 알 수 있었다. 힘든 일을 여자가 할 수 있을까 걱정하시는 눈치였다. 워낙 급한 상황이고 나의 강한 의지가 전달이 되었는지 아저씨들은 흔쾌히 수락하셨다. 그렇게 나는 그곳에서 대학원에 입학할 때까지 약 1여 년 동안 그곳에서 감사하게 일할 수 있었다.


빌딩 청소는 일하던 사람들이 다 퇴근하고 하는 일이다. 신기한 시스템이라고 여겼지만 합리적이기도 했다. 사람이 없을 때 청소를 하면 서로가 다 편할 수 있었다. 나는 오후 5시에 시작해서 밤 8시까지 하루 3시간, 평일 5번, 일주일에 총 15시간을 일하면 되었다. 급여는 1시간에 10불로 주급 150불을 받는 일이었다. 그때 방 값으로 일주일에 50~60불, 교통비와 식비 등 생활비를 충분히 쓸 수 있는 급여였다. 정말 운 좋게 후배 덕분에 좋은 일자리를 얻을 수 있어 정말 감사했다. 

일이 어렵다고 엄포를 놓으셨던 아저씨들도 일하면서 배려를 많이 해주셨다. 전체 9층짜리 건물을 3시간 안에 끝마쳐야 하므로 세 명이서 분업이 철저히 이루어졌다. 한 아저씨는 카펫으로 되어 있는 건물 바닥을 진공청소기(Vacuum)로 청소하는 일을 전담으로 일하셨다. 다른 아저씨는 탕비실 개수대와 화장실 청소 등을 전담으로 하셨다. 내가 맡은 업무는 아저씨가 Vacuum을 하고 지나가신 뒤, 책상 아래 있는 휴지통을 비우는 ‘더스틴(Dustin)’ 작업이었다. 책상 위는 일절 건드리면 안 되었다. 사무실이라 휴지통 안에는 크게 지저분한 것들도 없었다. 대형 비닐 안에 쓰레기가 가득 차면 1층에 있던 쓰레기 하적장으로 옮겨 놓는 것 까지가 내가 맡은 일이었다. 무거운 쓰레기 더미가 보통 3~4개 이상은 나왔다. 무거운 더미를 내려놓는 내 모습이 안쓰럽게 보였는지 개수대 청소를 담당했던 아저씨께서 층마다 엘리베이터 입구에 모아 놓으라고 하시고 직접 내려다 주셨다. 나는 층마다 더스틴을 하고 책상 위 지저분한 것만 닦는 일 정도를 했으니 크게 어렵지 않게 일을 할 수 있었다.


처음엔 꼬박 3시간이 걸려서 겨우 끝났던 일은 어느 정도 동선이 파악되고 일도 익숙해지니 점점 시간이 단축되었다. 아저씨들은 반 정도 하면 담배도 피우시고 커피도 한 잔 마시면서 쉬는 루틴이 있었다. 건물 3층 정도에 외부 테라스가 있었는데 여기서 바라보는 야경이 정말 아름다웠다. 시티가 한눈에 내려다 보이는 전망이 정말 근사한 곳이었다. 영국 문화의 영향으로 호주도 Tea 문화가 발달했다. 탕비실에는 각종 Tea 종류와 쿠키들이 구비되어 있었는데, 우리도 쉬는 시간에 자유롭게 먹을 수 있었다. 일하던 중간에 따뜻한 커피나 차를 마시며 아저씨들은 그 틈에 담배도 한 대 피우면서 한 20분 정도 담소를 나누었다. 처음에는 나도 야경도 보고 일도 쉬고 좋았지만, 내심 쉬는 시간을 줄이고 10분이라도 일찍 퇴근하고 싶은 마음이 컸지만 아저씨들에게는 그 시간이 하나의 즐거움이었다. 나는 그 시간에 야경을 즐기곤 했는데, 아저씨들은 "우리 동료들이 나와서 열심히 일하는구나"하는 말씀을 하셨다. 그렇구나. 우리도 여기서 이렇게 열심히 일하고 있는 것처럼 다른 건물에서도 누군가가 자신의 업을 위해 열심히 일하고 있을 것이다. 같은 풍경을 바라보며 서로 다른 생각을 하고 있는 모습이 놀라웠다.



한국에 돌아와서 야경이 근사한 곳에 가면 나는 그때의 추억이 되살아난다. 종종 이 에피소드를 이야기하면 듣는 분의 반응도 다양하다. 이 경험은 어떤 상황, 경험, 위치에서 있느냐에 따라 바라보는 관점이 다를 수 있다는 것을 처음으로 직접 실감했던 날이었다. 밤새 불 켜진 빌딩들을 보면 그날의 그리운 그리운 추억들이 떠오른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다양성과 포용’의 이슈도 함께. 너도 나도 다양성과 포용이 중요하다 외치는 시대에 살고 있다. 나와 다른 문화, 배경, 신념을 갖고 있는 사람들을 열린 마음으로 바라보고 소통하는 데서 타인을 이해하는 것. 내가 아저씨들과 함께 일하면서 얻은 소중한 경험 덕분에 나는 타인에 대한 이해와 수용의 폭이 넓어졌다고 믿는다. 어떤 일을 할 때 내 관점으로만 보면 동전의 한 면만 볼 수 있다. 뒷 면은 나 혼자서는 절대로 볼 수 없다. 동전의 앞 뒷면을 다 볼 수 있는 사람이 되려면 다양성과 포용의 가치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그렇게 나의 시각과 타인의 시각을 잘 버무려 나만의 관점으로 새로운 혁신을 만들 수 있다. 함께 사는 사회를 위해서 중요한 가치지만 그 이전에 나를 위해서도 꼭 필요한 것이 다양성과 포용이라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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