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은 늘 계획대로 이뤄지지 않는다. MBTI의 INFP인 나는 특히 P성향이 강한데, 그래서 이런 삶의 불확실성을 수월하게 받아들이는지도 모른다. 오늘 점심으로 짜장면을 먹을지, 짬뽕을 먹을지도 선택해야 하는 것처럼 일상이 선택의 연속이다. 쉽게 결정하는 일들도 있지만 삶에서 어디 이렇게 쉬운 일들만 생길까.
내 삶의 중요한 것을 결정해야 하는 일들이 생기면 나는 주로 '첫 느낌'을 중요하게 여기는 것 같다. 나는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 갑자기 생겨도 잘 받아들이고 오히려 이런 상황을 재미있어한다. 처음 올라오는 느낌, 직관을 잘 쓰고 있지만 의외로 의사결정을 할 때 여러 대안을 충분히 고려한 후에 결정하며, 이런 결정 방법을 선호한다. 갤럽 강점으로 보면 전략 테마가 강한데, 전략 강점과 P성향이 어우러져 의사 결정을 한다. 즉흥적인 것 같지만 또 그 안에서 다양한 생각들을 하고 결정하는 편이다.
이런 내 성향을 고스란히 반영하였던 내 인생에 중요한 '터닝 포인트(Turning Point)'의 순간이 있다. 내 삶의 방향이 바뀌는 일이었는데, 너무 쉽게 선택하고 결정한 느낌이 들 정도다. 아니, 이렇게 황당하게 중요한 일을 그렇게 결정한다고?
언니 우리도 유학 가자!
후배가 던진 이 한마디는 내 삶의 방향이 전환되는, '터닝 포인트(Turning Point)'가 되었다. 이 말을 듣고 난 불과 2달 정도 후에 나는 호주 시드니행 비행기 안에 있었다. 94년 5월 8일이었다. 3월 초에 후배들과 햄버거로 점심을 먹으며 대화를 나눴을 뿐이다. 어느 순간 나는 "유학을 가야겠다" 결정했다. 마음먹고 무서울 정도로 내가 유학을 갈 수 있게 일들이 진행이 되었다. 물론 무수한 난관도 있었다. 당시 첫 직장이었던 무역회사를 1년 반 정도 다니다 '농민신문사'로 이직을 했다. 대학 입학 할 즈음 신문기자가 되고 싶었던 터라 기회가 생겨 옮겼는데, 회사 사정이 크게 좋지 않았던 시절이었다. 진로에 대한 고민이 있던 시기였다.
대학시절 팬다스 농구동아리 후배가 군대 제대를 하고 복학하기 전까지 6개월의 시간을 호주 시드니에 워킹 홀리데이로 다녀왔다며 오랜만에 얼굴을 보기 위해 만난 자리였다. 서울에서 함께 자리를 잡은 후배 소연과 함께 서울 명동에서 만나 호주 여행담을 신나게 들었다. 그때 소연이 농담 반, 진담 반으로 툭 던진 말이었다.
내가 어떤 대답을 했는지 기억은 나지 않는다. 아마도 '나도 가고 싶지, 그런데 그게 가능하겠어?' 하는 마음으로 흘려듣지 않았을까 싶다. 며칠 뒤, 집에서 쉬던 중 불현듯(내 인생에 불현듯 은 친구 같은 단어다) “나도 유학을 가야겠다”는 생각이 올라왔다. 정말 빙산이 있다면, 그 빙산의 아래에 있던 마음의 쑥 빙산 위로 올라온 느낌이었다. 그저 떠나야겠다는 마음이라 목적지가 꼭 '호주'여야 할 이유도 없었다. 외국에 나가서 공부하고 싶다는 마음이 너무 간절했다. 그렇게 마음을 먹고 나니 그 목적을 향해 내가 움직이고 있었다.
미국과 호주 어디로 가는 것이 좋을까 선택을 망설이고 있었다. 결국 나는 호주로 가기로 결정을 했는데, 크게 세 가지 이유였다.
가장 고려했던 이유는 '안전'이었다. 호주 역시 ‘백호주의’라는 인종차별적 사상이 있기도 했지만, 미국보다 상대적으로 안전하다는 느낌이 컸다. 아마도 후배가 다녀오면서 이야기해 주었던 것들이 반영되지 않았을까 싶다. 두 번째 이유는, 경제적인 것도 무시할 수 없었다. 부모님 강한 반대로 떠나야 했기에, 나는 스스로 학비를 벌어야 한다는 압박이 있었다. 아무래도 호주 달러가 미국 달러보다 환율이 낮았던 것도 결정에 영향을 미쳤다. 마지막 이유는 두 번째 이유와 연결되는 측면이 있다. 일하면서 공부를 해야 하는데, 호주에서는 유학생들도 합법적으로 주 15시간 파트타임으로 일할 수 있다고 했다. 스스로 벌어서 공부도 해야 하는 경제적 자립이 절실했다. 이런 이유들로 나는 미국보다는 호주를 선뜻 선택하게 되었다.
커리어에 대한 고민이 있기도 했지만, 왜 나는 유학 가는 일을 쉽게 생각했을까? 만일 내가 영어공부를 꾸준하게 하고 있지 않았다면 엄두도 못 냈을 거다. 그래도 졸업하고 회사를 다니면서도 그저 영어가 좋아서 명동에 있던 '코리아헤롤르 어학원'을 1년 등록하면서 원어민 선생님에게 영어를 계속 배웠다. 그렇게 일상에서 영어와 함께 했기에 후배가 던진 이야기를 덥석 받아들였을 것이다. 또 어렸을 때부터 고전 소설들을 읽고, 주말의 명화나 외화 프로그램 등 TV 속에서 볼 수 있는 해외에 대한 동경, 로망이 있었다. 이런 부분들이 무의식적으로 '나도 저기에 있고 싶다. 저기에서 살고 싶다'는 마음을 갖게 만들었던 것 같다. 대학 3학년 때 친구와 둘이 다녀온 40일간의 유럽 배낭여행도 성공적으로 다녀왔던 것도 해외로 나가는 것에 대한 두려움보다 설렘으로 다가왔을 것이다.
유학을 가겠다고 마음먹은 지 두 달 남짓한 기간 후에 나는 떠났다. 26살이었다. 그 나이는 당시에는 딱 결혼적령기였다. 친구들은 한 명 두 명 동반자를 찾아 가정을 꾸리는 시기였다. 나는 공식 남자친구도 없었기에 결혼은 멀리 있는 느낌이었다. 하지만 부모님이 생각하는 나의 첫 번째 목표는 ‘어서 좋은 사람 만나서 결혼해서 아이들 낳고 잘 살아야지’였을 것이다. 이런 상황이라 내가 유학을 떠난다고 말을 꺼냈을 때는 두 분 다 격렬히 반대하셨다. 당연했다. 생각지도 못했던 정말 뜬금없는 의사 표현이었고, 여자아이가 위험하게 혼자 낯선 타국 땅에서 어떻게 지내겠다는 것인지 이해하기 어려우셨을 것이다. 쉽지는 않았지만, 나는 박사 과정까지 8년을 잡고 유학을 가겠다며 설득을 시작했다. 부모님께 학비를 기댈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기에 스스로 벌어서 공부해야 했는데, 그렇기에 부모님은 더 걱정을 하셨다.
간절하게 원하면 온 우주의 기운이 나를 위해 애써준다고 할까. 유학 결정을 내리고 친구들이나 지인들에게 선언을 했다. 그때 영어 어학원에서 함께 공부했던 친구가 선교사 한 분을 소개해주었다. 호주에 선교사로 가게 되면 숙식을 교회에서 해결할 수 있다는 이야기였다. 사실 이는 과장된 이야기였다. 그럼에도 당시에는 지푸라기 잡는 심정이랄까. 사막에서 오아시스를 만난 느낌이었다. 낯선 외국 생활에 교회의 도움을 많이 받는다는 이야기를 들었기에 유학생활 하면서 한국인과 교류를 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힘이 될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나는 교회 신자도 아니었다. 아예 교회 분위기를 모르면 안 될 것 같아서 사촌동생이 다니던 신림동에 있는 한 교회에 가서 예배가 어떻게 진행되는지를 두어 번 참석하기도 했다. 호주에 갔을 때는 선교사 증은 꺼낼 생각도 하지 않았다. 다만 부모님을 설득하는데 큰 도움이 된 것은 사실이다.
차근차근 유학 준비를 했다. 가장 급한 것은 비자 발급이었다. 아직 대학원을 결정한 것이 아니기에 우선 어학연수원에 등록하고 비자를 발급받아야 했다. 호주 대사관과 유학원 등을 방문하며 호주의 어학원 자료를 수집해서 Bondi Junction에 있는 ACE(Australian College of English)라는 어학원에 6개월 과정으로 등록하고 비자를 발급받았다. 숙소도 정해야 했는데, 가끔 지금 생각해도 놀라운 것이 호주 숙소를 제대로 정하지도 않고 관광객을 위한 게스트 하우스 주소를 들고 호주 시드니 공항에 내렸다는 것이다. 무슨 깡이었을까? 철저히 계획하고 준비해야 하는 '파워 J'들이 볼 때는 있을 수 없는 일일 것이다. 시드니는 시티(City)를 기점으로 동서남북으로 퍼져있는데, 내가 가려고 했던 숙소는 North 쪽에 Lindfield역 근처였다. 공항은 South 방향이었고. 공항에 내려 택시를 타고 운전기사에게 주소를 주고 숙소로 향했다. 배낭여행에서 유스호스텔이나 게스트 하우스를 다녀봤던 나는 그 일이 크게 어렵지 않았다.
'보리스 하우스'를 지금 검색하니 찾을 수가 없다. 벌써 30년 전의 일이라 지금은 그런 형태의 숙소가 남아 있지 않을 듯도 했다. 당시 Lindfield 역 근처에 있던 게스트 하우스는, 집이 5~6채 정도는 있었던 것 같다. 하나의 집에 방이 4~6개 정도로 있고, 거실과 부엌은 공동이 사용하는 구조였는데, 인원과 비용에 따라 방을 사용할 수 있었다. 나는 처음 도착해서는 혼자 방을 썼지만, 그곳에서 만난 한국인 후배와 함께 트윈룸을 계약해서 한 6개월 정도 살았다. 숙소에는 한국인도 있었지만 일본인, 유럽인 등 각국에서 여행을 온 사람들이 대부분 장기계약을 하며 머물렀다. 어학연수원을 다녀오면 우리는 거실에서 함께 이야기도 하고 식사도 같이 하면서 다양한 문화를 경험하는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첫 숙소의 기억이 너무 좋아서 호주 유학생활을 그리워할 때 그때의 기억이 아직도 마음을 따뜻하게 해 준다.
부모님의 마음을 아프게 하고 떠난 나였기에 각오도 남달랐고, 26살이라는 나이에 유학을 시작했기에 책임감도 컸다. 공항까지 마중 나오셨던 부모님과 이모님들이 기대보다는 걱정을 많이 하셨다. 나도 시드니행 비행기에서 그렇게 눈물이 날 수 없었다. 누가 시켜서 떠난 여정도 아닌데, 뭐가 그리 슬펐을까.
그렇게 시작한 유학생활은 4년 3개월간 지속되었다. 8년을 계획하고 박사 과정을 마무리하는 것을 목표로 왔지만, 계획했던 시기의 절반의 시간을 보내며 대학원을 졸업하고 박사 과정에 들어갔다가 논문을 위해 '참여관찰'을 하러 한국에 나오면서 예기치 않게 또 나의 삶은 하나의 터닝 포인트를 기다리고 있었다. 유학생활은 나에게 황금기 같은 시기였다. 과거로 돌아가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 나이지만, 그래도 '과거 어느 지점으로 돌아갈래?'라고 누군가 묻는다면 주저 없이 "호주에서 공부할 때요!"라고 말할 것이다. 그때 나는 나 스스로 모든 것을 결정하고 내 삶의 주인으로 살았다. 그 시절이 다 행복한 일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때로는 외롭고 어려운 상황도 분명하게 있었겠지만 그럼에도 행복하게 즐겁게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어 참 좋았던 시절이다
마음의 소리가 올라왔을 때 놓치지 않고 한 발 한 발 걸어 나갔다. 내 선택이 잘못되지 않았다는 것을 위해 매일 최선을 다해 살려고 노력했다. 나는 내게 어떤 이야기를 하고 있을까? 바쁜 일상에 묻혀 내가 진정 원하는 것을 듣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오늘도 나는 저 빙산의 수면 아래서 어떤 이야기를 하고 싶어 하는지 귀 기울여 봐야겠다. 내가 잘 가고 있는 것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