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애가 말끔히 지워진 사회
나에게는 2살 위의 중증 자폐성 장애를 가진 오빠가 있다.
그냥 하면 되는 말인데, 나는 이 말이 어렵고 버거워서 이 한 문장을 편하게 말하는 게 스물아홉 해나 걸렸다.
장애를 가진 형제가 있다는 것이 나의 정체성의 전부는 절대 아니다. 그렇지만 장애를 가진 형제가 있다는 것은 나의 정체성을 형성하는 데 상당한 영향을 끼쳤음은 분명한 사실이다. 학창 시절 나는 장애인 형제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 내게 조금의 영향도 끼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간절히 강박적으로 소망해서 오빠의 장애를 외면하고 부정하려고 했었다. 그때의 나는 장애인의 동생이라는 것이 나의 정의하는 모든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지금에서야 그때를 돌아보면 너무 스스로를 고립시키려고 하지 않았다면 조금 덜 외롭지 않았을까 라는 생각을 하지만, 이건 지금이니까 하는 생각이고 그때는 그럴 수밖에 없었다.
외면하고 부정하려고 했던 치기 어린 마음이 가라앉은 지금, 오빠의 장애가 슬프지 않은 것은 아니나 적어도 무엇이 중요한 일이고 소중한 가치인지는 분명히 안다.
이 글을 쓰기 몇 주 전에 유튜브에서 시한부 암 판정을 받은 후 장애를 가진 딸을 살해하고 징역형을 받은 한 어머니에 대한 뉴스를 보았다.
한 달 전에는 발달장애 아들을 안고 투신한 어머니와 아들이 모두 숨졌다는 뉴스를 보았다.
몇 해 전에는 장애를 장애를 가진 자식과 함께 몇 해 전에는 장애를 가진 언니를 돌보다 언니를 살해하고 자살한 동생에 대한 뉴스를 보았다.
이런 뉴스를 보면 정말 무섭다. 어떤 공포영화도 이보다 무서울 수가 없다.
이 뉴스를 나 혼자서만 무서워하는 것 같다는 사실이 나를 더 소름 끼치게 한다.
어째서 이 많은 사람들이 죽는데도, 사람만 바뀌고 똑같은 이유로 모두가 죽고 있음에도 어떠한 화제도 되지 않는 걸까.
연도만 바뀔 뿐 똑같은 뉴스가 반복됨에도, 사람이 죽고 사는 일임에도 불구하고, 장애는 철저하게 당사자와 그 가족들의 몫이다.
장애는 철저하게 사람들의 관심 밖의 영역이다.
아마 나 역시도 오빠가 장애인이 아니었다면 나의 생활과 생각의 범주에 장애인은 안중에도 없었을 수도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장애인은 학교에서 같이 학교 다녔을 때만 몇 번 봤던 특수반 친구일 뿐이다.
많은 사람들이 장애인을 만난 하루보다 장애인을 한 명도 만나지 않은 하루가 훨씬 많을 것이다. 우리가 학교를 같이 다녔던 그 특수반 친구 역시 나와 같은 성인이 되었고, 사회를 살아가는 일원이 되었다. 하지만 무슨 신기루 마냥 우리가 사는 곳에서는 자취를 감췄다.
장애가 말끔히 지워진 사회에서 나는 여전히 그들이 살고 있음을 분명히 말하고 싶다.
보고 싶지 않은 것들을, 불편하게 여겨지는 것들을 말끔히 표백하고 세탁한 사회는 정상이 아니다.
이 글로 인해 세상이 변할 거라고는 절대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으면, 절대로 세상은 바뀌지 않을 것이다.
세상에 지워질 존재는 없다. 우리는 장애인의 삶에 대해 좀 더 목소리를 내어야 한다.
앞으로 쓸 글은 그동안 말하지 못했지만 동시에 정말로 크게 소리치며 말하고 싶었던 이야기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