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성대 소설 <키스마요>
김성대 작가의 시집 <귀 없는 토끼에 관한 소수 의견>을 참 좋아한다. 김성대 시인의 첫 장편소설이라니 당연히 기대했다. 나는 시와 소설을 함께 쓰는 작가들의 글을 애정한다.
김성대 시인의 첫 소설 <키스마요>는 기대 그 이상이었다. 내가 좋아하는 것들이 생동하게 펄떡이는 소설책이다.
SF요소, 퀴어 요소, 뿐 아니라 책 한 장, 한 장마다 흩어져 있는 사유의 흔적과 오래 멈춰 있게 되는 아름다운 문장들, 책을 다 읽은 뒤에도 남는 기분 좋은 찝찝함. <키스마요>의 공백이 나를 오래 소설 속 세계에 머물도록 해주었다.
<키스마요>는 이별 이야기다. 그러니 사랑 이야기다. 소설이 시작하며 '너'는 사라지고, '나'는 '너'를 찾는다. 그 과정에서 외계인이 출현하고, 전염병이 돌며, 소행성이 충돌한다. 사이비 집단이 출현하기도 하고, 지구 종말설이 번진다. 이 커다란 이야기는 '나'와 '너'의 이별보다도 사소한 이야기처럼 그려진다. '나'는 세계의 바깥에서 '너'를 찾는 것 같다. 세계의 소란에 눈을 감고, 오로지 '너'만을 되찾기를 바란다. '너'가 없는 세계는 '나'에게 종말과 같으므로.
그래서인지 지구 종말이나 외계인과의 조우 같은 거대한 이야기가 '나'와 '너'의 이별 과정을 그리는 상징으로 보이기도 한다. 이 모든 현상은 '나'의 머릿속에서 벌어지는, 그러니까 '너'라는 세계를 '나'의 마음속에서 파괴하기 위한 고군분투처럼 읽히기 때문이다.
나는 너를 느꼈다. 멀미가 날 만큼 멀어지는 너를. 멀미로라도 너를 느껴보고 싶었던 건지. 언제까지였을까. 같이 살자는 건. 너와 같이 살면 언젠가 혼자가 되는 걸까. 살던 거기에 혼자 남게 되는 걸까. 혼자라는 걸 확인하면서.
<키스마요>174p
상실은 지독하다. "네가 같이 살자며", "어딨니, 제발 돌아와", "너는 누구였어" 소설 속 '나'는 '너'를 찾으며 울부짖고 싶다. 하지만 감정을 억누른다. 화자인 '나'는 끊임없이 '너'와의 시간을 복기하며 '너'를 떠올린다. 꿈에서도 너를 찾는다. 꿈에서 네가 '나'를 찾을 수 있게 깃발을 꽂는다. 화자는 울지 않는다. 하지만 내내 울먹이고 있는 것 같다. 단단한 발화가 더 슬프게 내리꽂힌다.
이별이란 그런 것이겠지. 한 세계를 떼어내는 일. 파괴하고, 소멸하고, 종말하는 일. 묵묵하게 오늘을 살아가는 화자 '나'가 이토록 무참하게 느껴지는 이유는 소설 시작부터 끝까지 '나'가 아니라 '너'를 말하기 때문이다. 이별의 시작부터 무한한 끝. 영원히 없을 끝을 향해 천천히 다가가는 화자의 모습은 어쩌면 소행성의 충돌보다 더 커다란 몸짓이다.
소설을 관통하는 몇 가지 질문 중 하나는 "인간이란 무엇인가"이다. 소설 속에서 외계인과 인간의 경계는 흐릿하다
외계인이 와서 진화의 기회가 열릴 거라고 했다. 다음 진화가 이뤄질 수 있는. 다른 인간이 될 수 있는. 더 이상 인간이 아닐지도 모르지만. 다른 종이 될지도. 다시 외계인이 될지도. 인간이 처음부터 인간인 건 아니었으니까. (204)
인간은 처음부터 인간인 것이 아니다. 외계인이 진화를 하면 인간이 될 수도 있고, 인간이 진화를 하면 외계인이 될 수도 있다. 진화와 접촉은 인간이라는 존재를 우리가 생각하는 '인간적인'의 틀에서 벗어나게 한다.
"어느 외계인하고 우리가 쌍둥이일 수도 있다고 했어...... 잃어버린 쌍둥이라고. 우리 몸 중에서 쌍이 없는 게 그 흔적이라는 거야." (187)
외계인과 인간은 겹쳐질 수 있는 존재다. 외계인은 무형체화의 대상이었다면, 인간 또한 외계인처럼 무형체화하여 새롭게 바라볼 수 있다. '인간이라면 당연히 그래야만 하는 것들'은 흩어지고, 재정의할 수 있는 대상으로 놓인다. 그래서인지 소설 <키스마요>의 인간들은 자유롭다.
화자 '나'와 '너'는 동성연애를 한다. 성소수자들은 우리 사회에서 외계인 같은 이들이다. 이성 연애만이 정상으로 치부되는 사회에서 동성애는 쉽게 억압받고, 사회적으로 파트너로 인정받지 못하며, 함께 제도적 혜택도 누리지 못한다. 다수에게 낙인찍혀 혐오를 받기도 한다.
소설 속 외계인에 대한 언급은 '인간적임'에 대한 질문처럼 느껴졌다. 인간들 사이에서 편가르기를 하고, 정상과 비정상을 착실히 나누는 이 세계에 외계인이 나타난다. 그리고 그 외계인이 정상이라고 우겨댄다. 이제 우주인이 유행(99)이 되어 사람들이 우주복을 입고 다니기 시작(99)한다. 그럼 이제 정상적인 것은 어떤 걸까. '인간적인' 건 무엇일까.
다른 우주라는 건 다른 성이 있다는 거 아닐까. 이성과 동성이 무의미한 거 아닐까. 우주 전체로 보면. 외계인도 그렇지 않을까. 소수가 아니지 않을까. 지구에서는 소수지만 우주에서는 다수일지 모르니까. (219)
성소수자 뿐 아니라 다양한 소수자들, 그리고 약자의 시선으로 보면 '불안', '상실', '고립', '위기 상황' 같은 것들이 더 잘 보일 수밖에 없다. 팬데믹 상황을 통해서도 분명히 나뉜다. 누가 얼마나 의료서비스에 접근할 수 있는지, 어떤 노동환경에서 일하고, 혐오에 영향을 받는지. 소수자와 약자를 포용하는 방식은 곧 이 세계의 그릇이다.
따라서 저자는 소수자인 주인공을 극단의 위기 상황으로 내몬다. '지구 종말' , '이별'을 앞둔 상황에서야 다른 인간들과 같은 위치에 선다. 다른 이들과 같은 땅을 밟고 있다. 이제야 명확히 보인다. 지구는 끔찍한 행성이다.
알랭드 보통의 소설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에서 화자는 말한다. 갑자기 내가 클로이를 사랑한다기보다는 마시멜로한다는 것이 분명해졌다.(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116)
남용되어 닳고, 닳아 버린 사랑한다는 말보다 마시멜로한다는 말이 자신의 마음 상태의 본질을 더 잘 파악한다는 것이다. 종종 언어는 본질을 담지 못할 뿐 아니라 흐뜨려 놓는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외계 비행체의 침묵이 계속되자 근거 없는 이야기가 돌았다. 후속 메시지를 보내지 않는 이유가 언어에 익숙하지 않아서라는 거였다. 언어를 사용하는 데 불편을 겪고 있어서. 그들은 언어를 사용하지 않으니까. 언어 없이 생각하고 의사소통할 수 있으니까. 언어가 아닌 무의식으로. 그들의 무의식은 언어보다 투명할 거라고 했다. 언어로 전달할 수 없는 걸 전달할 수 있다고. 그래서 언어가 불편할 수밖에 없다고. 언어로 생각이 불분명해지니까. 소통이 불분명해지니까. 그들에게 언어는 독일 수 있었다. (38)
소설에서 외계인들은 침묵한다. 근거 없는 소문에 따르면 외계인이 언어를 사용하지 않기 때문이라는 말이 나돈다. 무의식은 가장 투명하다. 언어 이전의 투명한, 닳지 않은, 그래서 온전히 전달될 수 있는 마음이다.
언어가 투명하지 않은 건 맞는 거 같았다. 우리가 그랬으니까. 말만으로는 모자랐다. 나누고 나눠도 모자랐다. 모자란 게 아니라 어긋나는 거 같았다. 나누면 나눌수록 어긋났다.
-......말해 봐.
내가 말했다.
-무슨 말.
네가 말했다.
-아무 말이라도.
말을 덜어 내도 어긋났다. 더 덜어 내지 못할 때까지. 서로 할 말이 없다는 걸 확인할 뿐이었다. 할 말 없는 대화같이. 할 말이 없어도 말을 해야 하는.
언젠가부터 너는 말이 없어졌다. 말보다 침묵을 더 많이 나누는 거 같았다. 나는 침묵을 골랐다. 말과 말 사이를 메우고 있는. 닿지 않는 침묵이었다. 침묵도 투명하지 않았다. (39)
이미 오래전 더이상 둘 사이에 무의식의 대화는 오가지 않았다. 무의식의 대화가 멈춘 뒤 더 오랜 시간이 지난 뒤에야 언어로의 대화가 멈춘다. 언어는 마음을 적절히 감추는 데 유용하다.
정용준의 소설 <바벨>은 언어로 소통이 불가한 사회를 그리는 데, 소설 속 '노아'와 '요나'가 처음으로 서로에게 사랑을 고백할 때 그 어떤 언어도 오가지 않았다. 이들은 공통감각을 공유했을 뿐이다. 무의식과 같은.
언어는 사랑하는 두 인간에게 죄악이다. 사랑을 시작하는 연인은 언어 감옥에 허우적거리며 온전한 사랑을 전할 기회를 놓친다. 이별이 다가온 연인은 언어라는 방패로 둘의 관계를 연명한다.
두 사람이 하나의 심장을 공유할 수 있을까. 떨어져 있어도. 멀리 있어도. (53)
사랑에 빠진 이들은 사랑하는 그와 내가 하나가 될 수 있다고 믿는다. 어느 순간에는 그와 내가 원래부터 한 몸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착각에 빠진다. 이 모든 일은 기적과 같다. 그러니까 너와의 이별은 한 시기를 무작정 도려내는 아픔이다. 내 몸의 일부를 잘라내는 고통이다.
너와 해 보지 못한 게 많았다. 가 보지 못한 곳이 많았다. 하기로 해 놓고. 가기로 해 놓고. 못 가서 미안했던 곳이 우주가 되었다. 못다 하고 그만둔 일들이. 지키지 못한 약속들이. 우리가 못다 한 것의 우주였다. 그게 우리 우주였다. 일어나지 않은 일의 목록이. 일어나지 않은 일 다음에 일어날 일들이. 그만두기를 기다리고 있던. 아무 데도 갈 곳이 없었다. 아무것도 할 게 없었다. 하고 싶은 게. 가고 싶은 곳이. (215)
너는 외계를 받아들인다. 너와 나는 더이상 만날 수 없다. 너는 누구였을까. 나는 이제 정말이지 너를 모르겠다.
너는 네가 된다. 나는 너 없는 내가, 마주하기 싫었던 내가 된다. 샴쌍둥이와 같았던 너와 내가 분리된다. 그래, 이것을 무엇이라 할 수 있을까. 어떤 언어로도 설명할 수 없는 이것을. 이 모든 것을. 세상의 모든 상징과 언어를 동원해도 설명할 수 없는 세계의 파멸을.
김성대는 소설을 통해 무능을 고백한다. 시로도, 소설로도 도저히 할 수 없다고. 무능만이 정답이라는 듯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