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아웃에 대하여
“가을이 여기에 있었네!”
문래역을 나오니 출구옆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던 Y의 뒤로 온갖 따뜻한 색으로 물든 나무들이 펼쳐져 있었다.감탄을 연발하며 카메라까지 치켜들고 사진을 찍기 시작하자 그는 조금 당황했다. 매일의 출퇴근길인데 자신은 그곳의 나무들이 얼마나 큰지, 어떤 색깔로 물들었는지 여태 알아채지 못했다고 했다. 관광지도 아닌 곳에서 외국인 관광객처럼 구는 나에게 당황을 한 것인지, 사진을 전공했으면서도 정작 가까운 곳의 아름다움을 알아차리지 못한 본인 스스로에게 당황한 것인지 알 수 없었다.
그 노랗고 빨간 풍경 속에서 Y는 회색 빛으로 서 있었다. 아니, 회색이라고 스스로를 소개했다.
-나는 이제 너무 사회화가 되어서 더이상 너의 꿈친구가 되어줄 수가 없어. 그의 첫인사가 서글펐다. 30의 문턱을 넘고 재회한 많은 다른 오랜 벗들도 나를 만나자마자 커밍아웃하듯 그렇게 실토를 했었더랬다.
친구는 더이상 사진을 찍지 않는다고 말했다. 작년에 태국 여행길에 면세점에서 큰 마음 먹고 산 카메라는 두어 번 쓰고 쳐다보지도 않는다 했다. 대학시절에 울부짖던 “크리에이티비티”는 결국 허상이자 기업이 열정 착취를 위해 만들어낸 신화에 불구했다고, 교직원만큼 안정된 직장이 또 없는 것 같아 이 길을 택했다고 커피잔을 들어올리며 그는 담담하게 말했다. 금요일 오후의 반차가 무색하게 이곳 저곳에서 업무전화들이 걸려왔고, 그는 그것이 숙명이라도 되는 듯 차분하게 다시 이곳 저곳 전화를 되걸며 업무를 받아들였다. 커피는 빠르게 식었고 나는 그런 Y의 모습을 어색하게 바라보았다.
-우리가 마지막으로 만난게 언제였지? 라는 질문에 Y는 큰 한숨 후에 잘 지켜온 상자 속 오래된 편지를 꺼내듯 우리가 함께 했던 추억을 읊어주었다. 마치 내가 못믿을거라고 생각이라도 하는 듯, 휴대폰 속 사진 기록까지 꺼내보여주었다. 사진 속에서 우리는 장난기를 머금은 채 해맑게 웃고 있었고, 그 속에서 친구의 응석부리는 듯한 목소리도 들리는 듯 했다. 그는 종종 그렇게 조르곤 했었다. “내 이야기도 언젠가 글로 써주어야 해.”
사진은 즉시 우리를 추억의 그 장소와 온도, 나누었던 대화 속으로 이끈다. 사진 한 장에서 내가 유학을 떠나기 전 기념으로 만나 알바생을 감탄하게 만들 정도로 엄청난 양의 고기를 먹었던 교대역에서의 저녁이, 사진 한 장에서 첫 면접 직후 정장 차림으로 만나 가로수길을 활보하며 쇼핑을 했던 첫 가을의 오후의 낙엽 냄새가, 사진 또 한 장에서 나의 결혼식 날 고용된 포토그래퍼의 마음이 상하지 않도록 옆을 맴돌며 조심스럽게 사진을 찍어주던 친구의 모습이 떠올랐다. 늘 응석만 부리는 어리고 철없는 친구라고만 생각했었는데, 그는 그렇게 내 인생의 중요한 순간들 곁에 있었고, 마치 나 몰래 B-Roll을 만들어 오기라도 한 듯, 그만의 기억과 이야기들로 그 특별한 순간들을 나에게 다시 보여주었다. 계속되는 업무전화들로 경직되어있던 그의 어깨와 목소리가 어느새 부드럽게 풀려있었다.
문래의 골목은 버려진 창고를 힙스터의 둥지로 변신시킨 성수동의 골목과는 달리, 아직 골목과 창고를 지키는 금속장인의 오랜 공방들이 쇳소리와 불꽃을 내뿜으며 거칠게 서있었고, 인스타를 도배하는 하얗고 젊은 맛집들과 톱니바퀴처럼 맞물려 동네의 새로운 숙명을 받들고 있었다. 커피와 빵으로 잔뜩 뱃속과 폰속 사진앨범을 가득채우고 베이커리를 나서니 한 공방에서 피어오르는 재가 첫눈처럼 골목을 흣날리고 있었다. 친구는 다시 문래역 앞 단풍들로 가득했던 그 공원으로 날 데려갔다. 노량진의 지하상가와 이마트만 오면 설레했던 나의 캐나다사람 남편처럼, 나도 동네 아이들이 뛰어다니고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선캡을 끼고 산보를 하는 그 평범한 공원이 너무 좋고 특별해보였다. 낯선이의 일상의 조각을 오브제삼아 사진을 찍고 있으려니, 이제는 나도 고향 서울에서 외국인 관광객이 되어버렸구나 싶었다.
- 자, 여기서 찍으면 사진이 예쁘게 나올거야.
쫄레쫄레 따라다니다가 그의 말에 멈춰서서 카메라를 여니 프레임 속에서 마법처럼 공원은 단풍 뿐 아니라 높고 뭉게구름 많은 가을의 하늘까지 담고 있었다.
-우와 정말이네, 역시.. 포토그래퍼의 눈은 달라.
친구에게 말해주고 싶었다. 인생이, 일상이, 늘 알록달록 할 수는 없지 않을까. 일상이 조금 회색처럼 보인다고 해서 그게 의기소침 해질 일일까. 나는 그 친구가 주장하는 자신의 회색빛이 첫눈을 머금은 겨울하늘과 같지 않을까 싶었다. 타인의 기쁨과 우정의 추억을 소중히 여길 줄 아는, 화려한 단풍숲 너머 우리를 내려다보는 그 높은 하늘을 찾을 줄 아는 그 고운 눈을 보듬고 지키기 위해 자신도 모르게 겨울 하늘의 단단한 구름과 같은 보호막을 쌓고 있는 것은 아니었을까, 하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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