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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uwon May 18. 2021

[예민함] 당신이 예민해서 좋아요

당신의 바운더리를 더욱 진하게 그려보세요.

“Please give me space.”
"저를 내버려 두세요"


정만큼 겁도 많은 친한 친구의 강아지는 언제부턴가 이 문구가 적힌 조끼를 입고 다닌다.


친구는 이방인들이 놀라울정도로 이 메시지를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며 강아지를 존중해준다고 말한다. 절반의 사람들은 “Aww, so cute!”이라고 멀리서 외치고, 다른 절반의 사람들은 심지어 “나도 저 조끼입고 다니고 싶다” 라고 강아지의 솔직한 자기표현을 부러워 한다는 것이다.





1. 

서점만큼 현세대의 생각의 흐름과 욕망을 파악하기 좋은 곳도 없다. 지난 가을 방문한 한국의 서점에는 ‘예민함’에 관한 수많은 책들이 진열대를 장식하고 있었다.

⌜내가 예민한게 아니라 네가 너무한거야⌟

한 책의 제목에 웃음이 피식 나왔다. 남편과 싸울 때 써먹기 좋은 멘트라는 생각이 들었다. (실제로 자주 써먹고 있다. 책의 제목이라는 걸 남편도 알기 때문에 이 말 한마디에 서로 콧방귀를 끼고 웃으면서 싸움은 급종료되곤 한다.)



2. 

오랫동안 사회는 나의 예민함이 나의 적이자 약점이라고 가르쳐왔다.

내가 자주 아픈건 예민해서 그런 것이고,

화가 난것도 예민해서 그런 것이고,

지금 스트레스를 받는 것도 예민해서 그런 것이라고.

예민하다는 그 진단은 모든 것을 다 내 탓으로 돌리게 했다. 예민함의 반댓말은 무딤이 아니라 쿨함인줄 알았고, 그래서 열심히 쿨한척 했다.



3. 

현 사회의 예민함의 재발견은 사회의 맥락에 따라 대략 두 분류의 메시지로 나뉜다.


복작복작한 고밀도 사회와 집단주의의 동양문화를 버텨온 한국의 작가들은 예민함이 바운더리를 상실한 개인들의 피로감이라 진단하며, 타인과 과감히 거리를 두고 자신의 바운더리를 좀 더 뚜렷하고 개성있게 그리라며 용기를 준다.


한편, 자신감 넘치고 대범한 알파형 인간만이 성공을 거둔다고 믿으며 그 유형에 속하지 못한 사람들을 압박해온 미국사회에서는 예민함이 개인의 슈퍼파워가 될 수 있다고 외치며 가치전복을 시도하고 있다.

예민함이라는 사회적 불치병 진단을 받아본 이라면 누구나 이 두 메시지를 씨실과 날실처럼 촘촘히 엮어 가슴에 새겨볼만 하다.



4. 

예민하게 굴지 말라는 말은 고슴도치에게 너의 가시가 따가우니 가시를 갈아내어라 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야속하고 무책임한 말이다. 예민함을 긍정할 때 우리는 고슴도치 가시의 뾰족함을 나무라는게 아니라 그의 방어력과 표현력을 칭찬할 수 있게 된다. 비로소 가시에서 눈을 돌려 고슴도치가 가시를 세우게 한 그 장본인이 무엇이었는지를 바라볼 수 있게 된다. 어두울수록 별이 더 반짝여 보이는 것처럼, 우리는 우리의 가시를 세우게 하는 상대들을 통하여 나만의 바운더리, 내 마음의 생김새를 더 분명하게 관찰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마음에 무딘 사람들이 단순무식하게 "너는 예민해"라고 밖에 칭할 수 없었던 당신의 마음은 당신이 갖춘 고해상도의 시선만이 제대로 읽어낼 수 있다. 예민한 시선으로 내면을 응시할 때 그것은 마치 프리즘이 되어 당신 안에 담겨있던 수많은 빛깔의 감정과 감성을 비춰낼 것이다.



5. 

마지막으로, 바운더리를 명쾌하게 정의하는 김이나님의 ⌜보통의 언어⌟의 한 구절을 짧게 공유하며 기원해본다. 친구의 강아지의 유쾌한 조끼처럼, 우리 모두가 조금 더 허심탄회하게 우리의 뾰족함과 섬세함과 연약함을 드러낼 수 있는 그 날을.


선을 긋는다는 말은 '모양을 그린다'는 말과 같다. 선을 긋는 건, 여리고 약한 혹은 못나고 부족한 내 어딘가에 누군가 닿았을 때 '나의 이곳은 이렇게 생겼어'라고 고백하는 행위다. 반대로 남들보다 더 관대하거나 잘난 부분이 있다면 그 부분은 시원하게 트여 있을 것이다. 그래서 어떤 관계는, 나도 몰랐던 내 영역을 알게 해준다. 그렇게 우리는 서로를 통해 확장되기도, 스스로를 알아가기도 한다.



Cover Image: Photo by Sierra NiCole Narvaeth on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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