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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석금 May 16. 2019

꿈속의 연인

3. 그녀에게 닿다.

새벽 4시를 알리는 알람이 울렸다. 그는 알람이 울리기 전부터 잠에서 깨어 천장을 멍하니 쳐다보고 있었다. 일어나 책상 앞으로 걸어갔다. 컴퓨터를 켜고 밤사이 그에게 도착한 e메일과 경제 뉴스를 검색한 후 트레이닝복으로 갈아입었다. 창문 커튼을 옆으로 잡아당기자 정원의 나무들이 가로등 불빛에 반사되어 크고 작은 그림자를 만들었다.


그는 방을 나와 가야가 깨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1층 거실로 내려와 윤 회장 내외의 방을 살핀 후 마당으로 나왔다. 넓은 정원을 지나 진입로를 걷는데 새소리가 귓가에 들려왔다. 잠도 안 자고 쟤네들은 뭔 할 말이 그리 많다고 저리도 재잘거리나 생각하면서 차가운 공기에 옷깃을 세운 후 서둘러 거리로 나왔다.


픽사 베이 - 정원


그는 가로등 불빛을 의지한 채  '파스텔'을 향해 걸었다. 유리창을 통해 카페 안을 들여다봤다. 테이블은 거의 비어 있었다. 연인인 듯 보이는 남녀 한쌍이 구석진 테이블에 앉아 반쯤 남은 맥주잔을 만지작 거리며 심각한 얼굴로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는 카페 안으로 들어갔다. 인기척에 놀란 연인들이 그의 얼굴을 빤히 쳐다봤다. 용하도 갑자기 나타난 그 때문에 놀랐는지 잠시 멍하니 서서 바라보다가 생각난 듯 환한 얼굴로 그에게로 걸어왔다.

"일우야! 너.... 어떻게 된 거야?"

"형! 잘 지냈어요?"

"난 잘 지냈지. 이 무심한 놈. 뉴욕으로 한 번 불러주려나 기다렸는데 부르기는커녕 전화 한 통도 없고."

"형수님도 잘 계시죠?"

"지금 파리에 있다. 거기서 애들 공부하는 동안 자기도 패션 공부하고 싶다고 해서 애들이랑 같이 보냈어. 너 미국 들어가고 얼마 안 있다 들어갔으니까 5년 다돼가네. 그런데 이 여자가 들어올 생각을 안 하네. 내 정신 좀 보게. 반가운 마음에 널 벌주고 있다. 저 손님들이 마지막이니까 잠깐만 기다려."

"네."

"마실 거 줄까? 한 잔 하기에는 시간이 그렇지?"

"앞으로 시간 많으니까 오늘은 커피나 한 잔 주세요."

"알았다."

그들의 대화 소리를 들은 연인들이 눈치가 보였는지 자리에서 일어나 '파스텔'을 나갔다. 용하는 그의 앞에 머그잔을 내려놓았다. 그는 커피잔을 쳐다봤다.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며 향만 남기고 공기 속으로 사라졌다. 그는 머그잔을 들어 커피를 한 모금 마신 후 제자리에 도로 내려놓았다.  

"형이 내린 커피 향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네요."

"아직도 헤즐럿 커피만 마시냐?"

"습관이 어디 가겠어요!"

그는 헤즐럿 커피 향을 정말 좋아했다. 비 오는 날이면 민 여사와 테라스에 앉아서 정원을 내려다보며 얘기를 나누는 시간이 좋아 오피스텔에 나가 있을 때도 비만 오면 일부러 본가를 찾아 커피를 내려 마시곤 했다. 빗소리와 나무 잎새를 흔들고 지나가는 바람소리와 잘 어우러지는 커피 향 때문에 민 여사와의 그 시간이 더 소중하게 느껴졌다. 용하는 그런 그가 신선했다. 용하는 그의 얼굴을 쳐다보다 큰 소리로 웃었다.

"너 보니까 생각나네. 대학 OT에서 네가 헤즐럿 커피 주문하는 바람에 선배들이 무슨 사내 녀석이 여자애처럼 헤즐럿 커피를 좋아하냐고 이상한 놈 취급하길래 개인의 취향을 갖고 그러지 말라고 말했다가 선배들이 얼마나 쥐어박든지. 하하하 그때 우리 처음 만난 거였지?"

"네. 그때가 형이랑 처음 만난 거죠. 정말 그런 일이 있었어요? 난 전혀 몰랐어요."

"네가 해병대 지원하는 바람에 깔끔히 해결되었지."

용하는 뭔가 말하려다 말고 그의 얼굴을 뚫어지게 쳐다봤다. 요즘 증권가에 돌고 있는 '윤 회장 건강 이상설' 때문에 그가 앞당겨 귀국하게 된 것을 알고 있었지만 물을 수가 없었다. 그가 짊어져야 할 무게가 너무나 무거워 더해 주기가 싫었다. 그도 그런 용하의 맘을 알고 있었기에 말없이 웃었다.  

"시차 적응하려면 한동안 고생 좀 하겠네."

"괜찮아요. 형 만나려고 어제도 여기 왔었어요. '정기휴일'이라고 쓰여 있어 그냥 돌아갔지만. 월요일에 또 뉴욕 출장 가요."

"오자마자 또 뉴욕?"

"네. 2주 정도 걸릴 거예요. 돌아오면 연락할게요."

"그래. 그땐 술 한잔하자. 일어날까?"

그는 용하의 차가 보이지 않자 돌아서 집을 향해 걸었다.  어느새 날이 환하게 밝아져 있었다. 거리에는 다시 활기가 넘쳤다. 그가 뉴욕에 있는 동안 얼마나 변해 있을까 궁금했는데 돌아와 보니 변해 있는 건 그뿐인 거 같았다.    




뉴욕에서의 2주는 빠르게 지나갔다. 쇼핑몰 개장 관련 많은 사람들과의 만남은 밤늦게까지 이어졌다. 미국 지사 신사옥 오픈 기념 '뉴욕 in 태진 패션의 밤' 개최에 따른 유명 인사 연락 등 할 일이 끝없이 이어졌다. 민 대표는 지사 직원들이 그를 존중하는 태도나 그가 직원들의 말에도 빠뜨림 없이 경청하고 배려하는 태도를 보며 서로 깊게 신뢰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그리고 자신이 미처 생각지도 못한 전문적인 부문까지 앞서 준비하는 그의 세밀함에 한번 더 놀랐다. 민 대표는 그제야 윤 회장이 왜 그를 합류시켰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그는 아버지 윤 회장에 의해서 후계자가 만들어진 게 아니고 스스로 자각해 자신이 해야 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을 구분하며 성장해온 것을 알게 되었다.   



픽사 베이   -   뉴욕 맨해튼 거리 


뉴욕 출장에서 돌아온 그는 바로 태하그룹  '미래전략기획본부장'에 취임하였다. 최연소 미래전략기획본부장으로 발탁된 그를 우려 섞인 시선으로 보는 이들도 있었지만 일각에서는 그의 행보에 기대를 하는 이들도 많았다. 


윤 회장과 그가 본사 1층 로비로 들어오자 대기하고 있던 기자들의 카메라 셔터 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렸다. 그동안 베일에 쌓여 있던 태하그룹의 후계자가 처음으로 세상에 공개되는 순간이었다. 그를 본 기자들은 마치 아이돌을 만난 듯 얼굴마다 만족스러운 웃음이 가득했다. 그의 외모에 놀란 건 그의 등장을 지켜본 직원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기자들이 모여 있는 곳으로 걸어갔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취임 인사를 했다. 그의 목소리에는 로열패밀리의 한 일원으로서 범접할 수 없는 위엄과 기품이 흘렀다.


 "태하그룹 신임 미래전략기획본부장 윤 일우입니다. 이른 시간에 이 곳까지 찾아와 주셔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한 분 한 분 만나 직접 인사를 드려야 하나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첫 출근입니다. 빠른 시일 내 정식으로 자리를 만들어 인사드리겠습니다. 다시 한번 감사의 말씀드립니다. 감사합니다."


그가 돌아서 윤 회장 곁으로 가려 하자 기자 한 명이 빠르게 질문을 던졌다. 

"UBS 강형우입니다. 태하그룹 미래전략기획본부장 취임을 축하드립니다. 다음 기자회견시에는 2020년 태하그룹 비전 제시도 부탁드리겠습니다."

그는 기자의 질문 속에 그의 능력이 차기 총수로서 태하號를 지휘할 정도의 능력이 있는지 궁금해한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축하인사 감사합니다. 열심히 준비해 보여드리겠습니다." 

그의 등장은 보는 이들에게 강한 인상을 남겼다. 그는 참석자들에게 짧게 인사 후 윤 회장과 대기하고 있던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윤 회장은 그가 믿음직스러웠다.   

"저녁에 경주에서 계열사 사장단 회의 있으니 본부장도 참석하도록 해."

"알겠습니다."

엘리베이터가 27층에서 멈췄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부본부장이 허리를 굽혀 정중하게 인사를 했다. 

그가 내리자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고 위로 위로 올라가고 있었다. 

 




부본부장은 40대 초로 미국 뉴욕대를 수석 졸업한 재원이었다. 그의 부친은 태하그룹 창업 멤버로 오랜 세월을 윤 회장과 함께 하고 있다. 뉴욕대에 남으려는 재혁을 윤 회장이 미국으로 직접 날아가 삼고초려(三顧草廬)한 덕에 회사에 들어올 정도로 윤 회장의 신임이 각별했다. 키는 180cm 정도로 그 못지않게 미남형이었다. 그가 먼저 부본부장에게 악수를 청했다. 

"윤일우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김재혁입니다. 본부장님에 대한 이야기는 아버지한테 많이 들었습니다."

"부본부장님! 회사 내에서는 어쩔 수 없지만 둘이 있을 때는 형님으로 모시고 싶습니다."     


재혁은 첫눈에 그가 장점이 많은 사람이라고 느꼈다. 그에게서는 교만하거나 경솔함이 보이지 않았다. 상대를 배려하는 게 생활인 거처럼. 서로 얘기하면서 걷는 동안 미래전략기획 본부장실 앞에 도착했다. 

"부본부장님! 먼저 인사부터 할까요?"

"네. 이쪽으로 들어가시죠."

재혁이 그의 빅팩을 받으려 하자 그는 거절하고 안으로 들어갔다. 그의 갑작스러운 등장에 사원들은 의아해 그의 앞으로 모였다. 그들의 눈은 그가 어떤 사람인지 파악하기 위해 그를 살피고 있었다. 그룹의 브레인 중에 브레인들만으로 구성되어 있는 핵심부서였기에 신임 본부장에 대하여 많이 궁금해했다. 그는 한 명 한 명에게 다가가 악수를 청하며 그들의 표정을 읽었다. 그는 사원들과 인사를 나누고 본부장실로 들어갔다. 

"부본부장님! 오늘 저녁 사장단 회의에 참석하는데 제가 준비할 게 있나요?"

"바로 올리겠습니다."

재혁이 본부장실을 나갔다 결재판을 들고 바로 돌아왔다.

"회장님께 보고된 자료입니다."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재혁이 나가자 그는 재혁이 놓고 간 자료를 검토했다. 뉴욕에 있을 때부터 계속 보고서를 받아왔지만 계열사 사장단 회의인만큼 그는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문 밖에서 노크소리가 들렸다. 

"들어오세요."

재혁이었다.  

"본부장님 지금 출발하셔야 합니다."

"아!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되었네요."  

그는 빅팩에 서류를 넣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본부장으로서 처리해야 할 그의 첫 업무는 경주에서 열리는 계열사 사장단 회의 참석이었다. 그는 재혁과 함께 지하 주차장으로 향했다.  재혁이 운전석에 앉으려 하자 

"제가 운전할게요." 

그는 입고 있는 웃옷을 벗어 빅팩과 함께 뒷좌석에 걸었다. 그리고 넥타이를 적당히 조절한 후 운전석에 앉았다. 어색해하는 재혁을 보고 웃었다.

"그런 얼굴 하지 마세요. 둘이 있을 때는 형님으로 모신다고 했잖아요."

"공식적인 출장 인대 굳이....."

"저한테는 안 그러셔도 돼요. 우리도 서로 챙겨가며 우리의 아버지들처럼 그렇게 나이 들어가요. 그래야만 우리가 떠난 후에도 이 그룹이 오랫동안 남아 있을 수 있을 테니까. 전 아저씨하고 아버지가 서로 존중하고 배려하는 모습이 좋아요. 언젠가 아버지께서 한 번 속내를 털어놓으시더라고요. 아저씨가 회장직을 달라고 했으면 주었을 거라고. 누구를 위해 그 자리를 내려놓을 수 있다는 게 부러웠어요."


재혁은 자기보다 한참 어린 그의 말을 들으며 그가 부러웠다. 그의 여유로움이 어디서 나오는지 무척 궁금했다. 

고속도로를 달리는 내내 그는 재혁과 많은 얘기를 나눴다. 그는 경주에 도착할 때쯤 아버지 윤 회장이 재혁을 왜 그의 옆에 있게 했는지 그리고 왜 신임하는지를 어렴풋이 깨닫게 되었다. 

    



   

경주는 대학 OT 때 오고 지금이 두 번째 방문이었다. 생각해보니 용하를 처음 만난 곳도 경주였다. 그거 말고는 딱히 기억에 남을만한 일은 없지만 이번에는 느낌이 달랐다. 속으로는 재혁과 함께 내려와서 그런가 보다 생각했다. 사장단 회의가 개최되는 S호텔에 도착해 주차장으로 막 진입할 때였다. 갑자기 주차장 안쪽에서 차가 달려 나오더니 그의 차에 부딪혔다. 그는 재혁이 앉아 있는 조수석으로 손을 뻗어 재혁이 앞으로 넘어지지 않게 잡았다.  

"괜찮아요?"

"음 괜찮아. 윤 본은?"

"저도 괜찮아요."

상대 차에서 놀란 외국인 부부가 내렸다. 그도 운전석에서 내려 부딪힌 곳을 힐끔 쳐다본 후 당황해 어쩔 줄 몰라하는 외국인 부부가 서있는 곳으로 걸어갔다. 그를 보자 외국인 여성이 스페인어로 사과를 하려는 것 같았다. 그는 영어로 말할 수 있느냐고 물었지만 외국인 여성은 막무가내로 스페인어로 쉼 없이 말하였다. 두 사람이 난감해하고 있을 때였다. 호텔 쪽에서 젊은 여성이 주차장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그가 서있는 쪽으로 걸어왔다.

"1층 커피숍에서 우연히 보게 되었어요."

"난감하네요. 이분들과 대화가 안 돼서요."


그녀는 유창하게 스페인어로 외국인 부부에게 뭐라 말을 하였다. 그는 자기도 모르게 그녀를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었다. 나이는 많이 먹었어야 스물넷, 스물다섯! 흑갈색 머리에 마른 듯 보이지만 나름대로 볼륨감이 살아 있었다. 피부는 햇빛에 약간 그을려 보였다. 눈은 짙은 쌍꺼풀에 속눈썹이 유난히 길어 보였다. 그녀가 외국인 부부와 대화하는 동안 바람이 불어올 때마다 그녀의 긴 머리카락이 가까이 서있는 그의 팔에 닿았다. 대화가 끝났는지 그녀는 그에게 외국인 부부의 말을 전했다.  

"이분들은 P대학에서 개최하는 학술대회 참석차 볼리비아에서 왔답니다. 남편 분이 몸이 안 좋아 병원 가려고 서두르다 이렇게 되었답니다. 자신들이 수리비 다 감당할 테니 수리부터 하시랍니다. 다친 곳은 없으세요? 지금 함께 병원 가자고 하시는데 어떻게 하시겠어요?"

"다행히 저희는 괜찮습니다. 저희 차도 많이 부서진 거 같지 않으니 저희 보험으로 처리하겠습니다."

그녀는 외국인 부부에게 그의 말을 전했다. 그녀 또한 그의 말을 대신 전하면서 '이상한 사람들이라'라고  생각했다. 그의 생각이 궁금했다. 그녀는 다시 그에게 외국인 부부의 말을 전했다.

"명함을 한 장 달라고 하네요."
"저는 아직 명함이 없는데....."

재혁이 명함지갑에서 명함 한 장을 꺼내 그녀에게 건넸다. 그도 그녀에게 명함을 달라고 했다. 

"제 명함이요? 왜 제 명함을 달라고 하시죠?"

"이런 상황에서 도움받기가 어려운데 도와주셔 감사합니다. 오늘은 일정이 있어서 어렵고 빠른 시일 내 보답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녀는 들고 있던 지갑에서 명함 한 장을 꺼내 그에게 내밀었다. 그는 그녀가 건네준 명함을 눈으로 스캔하며 외웠다. 이름은 이은석. 여행 작가 겸 화가였다.  

"조금 전에 명함은 안 만들었다고 하셨고 제 명함은 받으셨으니 이름이라도 알려 주셔야 공평하지 않을까요?"

"아. 실례했습니다. 제 이름은 윤 일우입니다."

그녀는 그의 이름을 불렀다. 윤 - 일 - 우. 그 역시 그녀를 쳐다보며 불러봤다. 이 - 은 - 석. 

그녀가 먼저 그에게 악수를 청했다. 

"이은석입니다. 만나서 반가웠습니다. 윤일우 씨!"

그리고 그를 향해 환하게 웃었다. 그녀의 손을 잡은 그의 눈에 언젠가 꿈에서 만난 그녀의 얼굴과 겹쳐 보였다. 

"저도 반갑습니다. 은석 씨!"



-   pixabay -  사업. 계약.  악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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