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개가 자욱한....'으로 시작되는 오래전 가요가 생각나는 아침이다. 인터넷 검색을 해보니 제목이 '말 전해다오'였다. 창밖은 안개와 중국에서 날아온 미세먼지까지 드리워져 앞산의 형체만 어슴푸레 보였다.
지난주 토요일, 남편과 모임을 하는 지인의 자제(子弟) 결혼식이 있어 작은 언니네와 함께 대구에 갔다. 축의금만 전달하고 내려온 남편은 당초 경주에 가기로 한 일정을 뒤로 미루고 작은 형부의 의견을 따라 영덕으로 방향을 잡았다.
고속도로를 달리는 동안 스치는 산들의 나뭇잎은 대전과는 다르게 단풍이 많이 들어있지 않았다. 영덕에서 대게로 늦은 점심 겸 이른 저녁식사를 마치고 대전으로 향하는 고속도로에 진입하니 벌써 어둠이 달리는 차창 밖으로 내려앉고 있었다. 어둠 속에서 스치는 풍경이라야 멀리 별처럼 반짝이는 불빛들이었다. 한껏 기대를 했던 여행은 아쉬움을 남긴 채 일정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와야만 했다.
일요일 아침이었다. 일주일간 밀린 세탁물을 세탁기에 넣고 주방을 힐끔 쳐다보니 따뜻한 실내 온도 때문에 그런지 이슬이 가득 맺혀있는 비닐봉지 하나가 보였다. 긴 줄기에 털지 않은 흙들 속에 고운 자태를 숨기고 있는 우엉이었다.
얼마 전 남편은 심한 감기몸살로 고생한 아내가 안쓰러웠던지 우엉차를 만들어 면역력을 키워주겠다는 심정으로 곱게 모셔다 놓고 며칠이 흘렀는데도 그대로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비닐봉지를 열으니 끝부분이 검게 변해가고 있었다.
부스럭 소리에 뭐를 하나 싶었는지 남편이 주방으로 건너왔다. <내가 만들어 줄 거니까 그냥 놔둬. 오후에 아버님 병원에 다녀와서 시작해도 돼.>라고 말했다. 만진 김에 내가 해보겠다고 하자 <할 수 있겠어?>라며 못 미더운 듯 뒤에 서서 지켜보다 컴퓨터가 있는 방으로 들어갔다.
사실 우엉차도 아니 다른 차도 한 번도 만들어보지 않았기에 '우엉차 만드는 방법'을 검색했다. 물로 깨끗이 닦은 후 달군 프라이팬에 얇게 썰은 우엉을 넣었다. 그리고 나무주걱으로 덖다 보니 팔이 슬슬 아파오기 시작했다. 힐끔 돌아보니 컴퓨터 모니터를 쳐다보고 있는 남편의 얼굴이 보였다.
이 우엉차를 만들기 위해 시장에서 우엉을 들고 꼼꼼히 살폈을 남편의 모습이 떠올랐다. 순간 그 모습을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따뜻해졌다. 그리고 남편이 산건 우엉만이 아니었다. 바로 우엉차를 마시며 행복해할 나의 감동까지 산 거라는 걸 깨달았다.
우엉의 색이 진한 갈색으로 변해가는 동안 남편을 바라보는 나의 얼굴은 계속 웃고 있었다. 우엉차 맛이 어떨까 싶어 물을 끓여 큰 머그잔에 부었다. 금방 만든 우엉차 7개 정도를 골라 그 물에 띄웠다. 조금씩 물 색깔이 연한 갈색으로 변해갔다.
남편은 향기를 맡아보더니 한 모금 마셨다. <잘됐네. 향도 좋고 맛도 좋네. 첫 작품 치고는 훌륭해>라며 좋아했다. 여행 끝에 피로는 풀리지 않았지만 멋진 작품 한편을 완성한 거처럼 나의 처녀작 '우엉차'는 예술품이 되어 있었다.
시아버님을 뵈러 갔을 때도 병원에 입원하기 전처럼 '우리 예쁜 며느리 왔구나.'라며 나의 손을 꼭 잡아 주시니 정말 나는 '마음 부자'였다. 아버님혼자 그곳에 남겨둔 채 돌아오려니 집으로 가는 길이 한없이 멀게 느껴졌다.
한편으로는 지금처럼 마음 부자로 살기 위해서는 더 많은 나의 맘을 다른 이와 나누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추위를 많이 타는 이들이 따뜻하게 지낼 수 있도록 모든 이의 마음의 온도가 높이 올라가길 기대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