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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파랑 Aug 04. 2022

#14 아빠, 왜 계좌는 안 물어봐?

아직도 물어보지 않았다.

    지난 주말의 일이다. 여행을 가기 전, 다 같이 먹을 음식을 준비하기 위해 마켓컬리에서 장을 한껏 보았었다. 간식 카테고리에서 목록을 찬찬히 훑어보던 중, 두 눈을 사로잡는 영롱한 쿠키 선물 세트를 발견했다. 고급 제과 브랜드였는데 에메랄드빛 하늘색 상자에 무려 쿠키 여섯 통이 곱게 담긴 선물 세트였다. 원래의 정가는 5만 원. 쿠키 값으로 지불하기엔 꽤 상당한 금액이었다.

그런데! 이게 웬일! 3만 원에 할인을 하고 있는 게 아닌가!

    여섯 통으로 넉넉하니 여행을 가서 나눠먹어도 좋을 거 같고, 여행 다음날 아침에 드립 커피를 내려마시며 쿠키를 풀어놓아도 다들 "오오~"하며 반응이 좋을 것 같았다. 장바구니에 바로 담았고 다음날 총알 같이 배송되었다. 쿠키 선물 세트는 선물 이란 표현에 걸맞게 너무나 예쁜 상자에 배송이 왔으며, 쇼핑백까지 함께 왔다. 상자를 열어보니 쿠키 여섯 통이 아름다운 자태를 뽐내고 있었는데 사진에서 보던 것보다는 쿠키 통의 크기가 훨씬 작았다. 내 안의 악마가 나에게 속삭이기 시작했다.

'이거 양 너무 적다~ 열명이 넘는 인원이 나눠먹긴 힘들겠는데? 그냥 너 혼자 먹어~'

    나는 그만 악마의 유혹에 넘어가,  상자를 식탁 위에 고이 모셔놓고 여행을 갔다.



    즐거운 여행을 마치고, 온몸에 피로를 가득 얻고 집으로 돌아왔다. 언제 잠들었는지도 모르게 자고 일어나서, 다음날 아침. 평소와 같이 아침밥을 먹고 커피를 내려마시려던 차. 쿠키세트가 생각이 났다.

'맞다! 쿠키! 내 쿠키!'

    갓 내린 따끈한 커피와 고소하고 달달한 쿠키. 행복한 티타임을 가질 생각에 심장이 마구 두근거렸다.

어라.. 이상하다? 집에 와서 그 영롱하던 에메랄드빛 상자를 본 기억이 없다?

    혹시 다른 곳에 둔 건 아닌지 집구석 구석 쿠키 세트를 찾아 나섰다. 분명 식탁에 고이 모셔놓았는데.. 순간 머릿속에 섬광처럼 불길한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한창 여행 중이던 때에 지인이 보낸 보리굴비가 집 앞에 배송 완료되었다는 문자가 왔다. 신선식품인지라 집 앞에 그냥 둘 수도 없고.. 요즘 같은 날씨에 그랬다간 보리굴비는 저세상으로 떠날게 분명했다. 엄마에게 급히 전화를 걸어, 보리굴비를 반씩 나누는 조건으로 집에 다녀가시기로 했다. 우리 몫의 보리굴비를 친절히 집 안 냉장고 냉동실에 넣어놓고 갔다고 했는데, 과자를 좋아하는 아빠가 같이 왔다 갔다면?

    !   !

    나는 바로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다.

"엄마, 식탁에 있던 쿠키 못 보셨어요?"

"무슨 쿠키? 엄마는 보리굴비만 넣고 왔어~"

"아빠는요? 옆에 계세요?"

엄마와 아빠의 대화가 이어지고.. 청천벽력 같은 엄마의 말.

"아이고, 아빠가 가져왔대! 엄마는 몰랐어. 아빠가 왜 그랬을까. 아이고.. 다시 시키면 안 되니?"

고오급 쿠키였다, 할인해서 겨우 산거다, 등의 볼멘소리를 애먼 엄마한테 쏟아내고.. 허탈한 기분으로 전화를 끊었다. 마켓컬리 어플을 켜니 쿠키는 고새 할인이 끝나 다시 정가인 5만 원이 되어있었다. 졸지에 아빠에게 쿠키를 선물한 셈이 돼버렸다.

'쿠키 여섯 통이니까 조금만 남겨주세요.. 맛이라도 보게요..'

라고 엄마에게 카톡을 하니 아빠에게 전화가 왔다.

"아빠는 너가 선물로 받은 건 줄 알고~ 유통기한 얼마 안 남았길래~ 사무실 사람들이랑 다 나눠먹었어~ 남은 게 없어~"

"아빠가 미안해~ 너한테 물어봤어야 했는데. 아빠가 5만 원 줄게, 다시 사 먹어."

"응~ 아빠, 알았어요~" 하고 전화를 끊고 문득 든 생각.


아빠, 왜 계좌는 안 물어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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