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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파랑 Aug 31. 2021

[3탄] 서른, 혼자 호텔 스위트룸에 오다.

부제 - Live and let live.

    

    스위트룸의 훌륭한 전망을 눈에 계속 담으며, 거실과 안방 그리고 화장실을 휘젓이 돌아보면서 짐을 하나둘 풀기 시작했다. 호텔에서의 혼자는 처음이었기에 책을 종류별로 5권 챙겼다. 어떤 기분을 느끼게 될지모르니까. 선물 받은 잡지, 각양각색의 에세이 4권. 책을 테이블에 나란히 올려두니 ‘휴가다!’ 싶은 마음에 더욱 설레기 시작했다.





이제 그럼 수영장에 가야지!




    호텔의 꽃, 야외수영장. 하늘을 보면서 수영도 하고, 선베드에 누워서 책도 읽고. 새로 산 수영복으로 갈아입고 비치타월, 물, 모셔놨다가 처음 개시하는 새 쪼리, 선글라스 등을 챙겨서 수영장으로 내려갔다.



    야외수영장 주변으로는 수십개의 썬베드가 있었는데 파라솔이 달린 썬베드는 유료다. 오후 6시까지 66,000원. 선크림에 심한 피부알러지가 있어서 물리적으로 햇빛을 차단해야해서 모자도 챙겼지만 파라솔도 탐이 났다. 그렇게 영수증에 다시 한 번 서명을 했다. 배정 받은 선베드에 좋아하는 스마일 비치타월을 깔고, 가장 좋아하는 색인 파랑색 새 쪼리, 그리고 골라온 에세이책 ‘결국 뉴요커는 되지 못했지만’.



    수영장에 발도 담그지 않았지만 벌써 행복해지기 시작했다. 가장 좋아하는 운동인 수영은 가장 길게 한 운동이다. 파랑색을 좋아하다못해 사랑하는 나로써 수영장 또한 사랑할수밖에 없었다. 수경과 수모를 챙기지 않아서 긴 수영을 할 순 없었지만 간만의 수영을 즐기기에는 충분했다.

젖은 몸에 두툼하고 따듯한 수영장용 타월을 걸치고, 선베드에 누우니 노곤노곤하며 나른한 기분이 들었다.


    ‘결국 뉴요커는 되지 못했지만’ 책은 미술전문기자로 10년 이상 일한 후 회사의 복지 중 하나인 해외연수지로 뉴욕을 골라서 1년간 살다온 이야기이다. 화려한 도시에서 저자가 겪은 다양한 온도의 에피소드들이 무척 재미있는데, 읽다보니 현재의 나와도 묘하게 비슷한듯 하여 더욱 술술 읽혔다. 직장 생활을 하며 비장의 무기처럼 여행적금을 꾸준히 부었지만, 전세계적인 바이러스가 지구를 덮쳐버렸다. 해외는 못가고 국내 호텔 스위트룸에 왔다. 화려한 스위트룸 속 평범하디 평범한 나.



    책을 읽다가 너무 마음에 드는 ‘인생 구절’을 발견했다. 미국의 메인주에 여행을 간 저자가 만난 현지인이 해준 말. ‘Live and let live.’ ‘누구나 남들이 뭐라든 자기 방식대로 살 수 있는’. 지난 시절에는 부모님 및 가족, 친구들을 비롯한 주변 사람들의 의견에 매우 자주 흔들리곤 했다. 아마 스위트룸도 올 수 없었을 것이다. 서른이 되고나니 그 무엇보다 ‘나 자신의 의견’이 가장 중요해졌다. 덕분에 지금 이 호사를 누리고 있다. 노랑빛 초록빛 수풀에 일렁이는 연하늘빛 수영장을 보면서 책을 보고 있노라니 그간의 스트레스와 노고가 씻겨가고, 에메랄드빛 새 연료가 내 안에 차곡차곡 차오르는 기분을 느꼈다.



    흐렸던 하늘도 점차 개면서 풍광은 더욱 눈이 부셨다. 중간 중간 룸 전망도 보고 싶어서 룸과 수영장을 왔다 갔다 했다. 슬슬 배도 고프고 젖은 수영복이 추웠기에 자리를 정리하고 룸으로 올라갔다.


    

    6시 오픈에 맞춰서 라운지로 내려가니 가짓수는 적지만 음식이 다 맛있다는 인터넷의 평이 딱 맞았다. 짠 음식을 안 좋아하는데, 모든 간이 슴슴하고 맛있는게 수영 후라서 그런지 꿀떡꿀떡 들어갔다. 전망 좋은 창가에 혼자 앉아서 5접시는 먹어치운듯 하다. 샴페인, 각종 와인, 위스키 등이 무제한 무료였지만 워낙 술을 못하고 당기지도 않아서 샴페인과 레드와인을 한모금씩 먹고 땡쳤다. 특히 따듯한 카푸치노가 무척 맛있었다. 기계 커피임에도 불구하고 섬세하고 풍성한 우유 거품에 반해서 퇴장하며 한 잔 더 받아서 올라갔다.



    그새 해가 져서 룸에 들어가니, 세상 반짝거리는 야경에 입이 떠억 벌어졌다.



    사진을 수십장 찍었다. 이 귀한 순간을 놓치지 않으리라. 넓디 넓은 창문 파노라마뷰가 이렇게 아름답다니. 수년전에 다녀온 홍콩의 야경이 생각났다. 남산과 주택단지가 어우러져서 빌딩의 야경만큼 훌륭하진 않았지만, 이 넓은 뷰의 야경을 볼 수 있다는 것 자체가 마냥 좋았다.


입욕제 안에는 괭생이모자반 이라는 해초가 들어있었다.


    수영장에서 젖은 수영복으로 오래 있어서 그런지 몸이 차서 바로 욕조물을 받기 시작했다. 러쉬에서 사온 ‘빅블루’ 입욕제를 팡팡 깨뜨려서 반만 쓰기로 했다. 반은 내일 써야지. 직원이 좋다고 추천해준 ‘오발 욕조’는 정말 좋았다. 인체 구조에 맞춰서 만든게 틀림없을거다. 미끄러지듯 들어가지며 몸이 긴 타원형에 딱 맞춰서 완벽하게 욕조 안에 누울 수 있었다. 파랗고 뜨거운 물 속에 누워있으니 땀이 주룩 주룩 나며 개운하고 시원했다.


    지난 6개월간의 업무는 아무것도 없는 사막에서 거대한 궁전을 세운 것처럼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일 그 자체였다. 몸과 마음이 참으로 힘들었다. 과로가 계속 되니 건강이 너무 나빠져서 보약을 지어서 먹고 있던 참이었다. 목욕 후 데운 보약을 한 재 마시고, 푹신하고 드넓은 침대에 누워 한참이고 서울의 야경을 바라보았다. 그렇게 황홀한 첫날이 흘러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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