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연금이 월 340만 원이라면
나는 노후에 무얼 하고 살까
340만 원이라고?
얼마 전 고등학교에서 알바를 하던 때였다. 처음 보는 여자 선생님이 교무실에 들어서며 몇몇 분들과 반갑게 인사를 나누는 모습이 보였다. 나이가 지긋하신 것으로 보아 퇴직하고 시간제 교사로 다시 출근하는 모양이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 그들의 대화 중에 내 귀를 의심케 하는 숫자가 들려왔다.
"선생님 요즘 뭐 하고 지내세요?"
"이것저것 평소 못해보던 것들 하면서 놀고 있지."
"근데 선생님 연금 얼마나 나와요?"
"응. 뭐, 통장에 한 340 정도 찍히는 거 같아."
340이라고? 이거 실화임? 그러니까 정리하자면 사립학교 교사로 정년퇴직하면 연금을 월 340만 원 정도 받는다는 얘기이다. 얼추 알고는 있었지만 이렇게 숫자가 특정되어 당사자의 입을 통해 거론되고 나니 실감이 났다. 아니, 그분 연금이 아니라 내가 받을 연금이 어느 정도 수준인지가 말이다.
진리는 각자도생
내가 국민연금을 납부한 기간은 총 33년이고 납부 금액은 약 1억 정도이다. 60세부터 수급개시였는데 연금개혁한다며 3년이 연장되어 63세부터 가능해졌다. 예상 수령액을 조회해 보면 그 선생님께서 받는다는 연금의 절반을 조금 넘는 금액을 알려준다.
소득 하위 70%인 65세 이상 노인들에게 세금으로 지급하는 기초연금이 월 40만 원 가까이 된다고 하니, 30년을 넘게 매월 꼬박꼬박 납부한 것이 야속하기까지 하다. 노인 복지 정책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대비되는 숫자의 느낌이 그렇다는 말이다.
게다가 그 결과치는 앞의 사례처럼 사학연금의 반밖에 안 되는 금액이다. 군인연금이나 공무원연금도 사학연금과 크게 다르지 않은 것으로 알고 있다. 물론, 당사자인 교사나 군인, 공무원들 역시 여러 가지 이유로 자신들이 받는 금액에 대한 불만이 적지 않다고 한다.
그 정도 받으면 됐지 배부른 소리 하고 있다고 타박을 들을지도 모르겠지만, 나로서는 그들이 부러울 따름이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인제 와서 다시 시작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그러니 낼만큼 냈고 당당한 마음으로 받는다는 명분에 만족해야겠다. 다만, 연금개혁을 이유로 또다시 수급기간을 늦추거나 지급액을 하향 조정하는 등 내게 피해를 주는 일이 없기를 바랄 뿐이다. 그런 일이 있다면 이번에는 머리띠 두르고 대정부 투쟁에라도 나서야 할지 모르겠다.
주제넘은 소리겠지만, 국민연금 고갈에 대한 우려로 연금개혁을 해야 한다면 더 내고 덜 받는 단순한(?) 방식을 밀어붙이기보다는 좀 더 생산적이고 효율적인 접근 방안을 우선 고려하면 어떨까? 이를테면, 연금운용 수익률을 좀 더 극대화하는 것이다.
우리나라 국민연금 규모는 약 7,980억 달로 일본, 노르웨이에 이어 세계 3위 규모라고 한다. 지금까지 연평균 수익률이 5% 정도이고 2024년 9월에는 10%를 넘어섰다고 한다. 이 정도면 이미 적지 않은 성과를 올리고 있다고 봐도 무방 할듯하다. 그러나 여기에 만족하지 않고 운용 수익률 1~2%만 더 끌어올려도 그 기여도는 엄청날 것이다.
다만, 그에 상응하는 역량을 갖춘 인재들이 필요할 텐데 공단이 전주에 있다는 지리적인 이유와 처우에 대한 불만 때문에 만성적인 '사람 부족'에 시달리고 있다고 한다. 정부 부처나 관계기관에서는 이런 문제를 인식하고 보다 전향적인 자세로 해결에 나서는 것이 그들이 해야 할 일 아닌가 하는 생각이다.
내가 한창 직장생활을 하던 당시에는 개인연금이나 퇴직연금이 보편화하여 있지 않았고 국민연금은 곧 노후보장이라는 믿음이 있었다. 하지만 만약 내가 다시 33년 전 사회 초년생으로 돌아갈 수 있다면 이번에는 국민연금의 분홍빛 미래를 전부 믿지는 않을 것 같다. 이 시대의 화두가 되어 버린 '각자도생'이라는 대전제에 따라, 내 노후 설계는 내가 알아서 준비할 것이다.
내 연금으로 할 수 있는 것
일단은 소득절벽을 버텨야 한다. 지출은 소득이 있던 때와 유사하게 지속되는데 수입이 없는 힘든 기간이다. 소비라는 것이 소득에 비례해서 탄력적으로 줄여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내 기준으로 63세가 될 때까지 퇴직 후 3년간이다. 그리고 나면 소정의 국민연금 즉, 노령연금을 받게 된다.
나는 과연 이 돈으로 무얼 할 수 있을까? 한마디로 별로 없다. 소득대체율이 40%라고 하는데 이 금액으로 생활하기에는 아무리 '노후'라고 하더라도 턱없이 부족하다. 크게 아프지 않는다는 전제로 그저 먹고사는 것 이외에는 다른 생각을 할 수가 없다.
통계청에 따르면 부부 기준 노후 적정 생활비는 월 324만 원이라고 한다. 개인적인 욕구와 필요에 따라 다르겠지만, 일반적으로 적정 생활비는 기본적인 생활비(식비, 주거비, 교통비 등)와 추가적인 경비(의료비, 교육비, 문화생활 등)를 반영한다.
아내가 받을 국민연금을 합치면 통계청이 말하는 부부 기준 노후 적정 생활비와 거의 일치하기는 한다. 하지만 숫자는 숫자일 뿐, 각 개인이 맞닥뜨리는 주관적인 체감 온도와는 거리가 멀다. 더군다나 아내는 65세부터 수령이니 퇴직 후 5년을 한 사람 연금으로 살아야 한다.
돌이켜보면 나와 아내는 대기업에서 직장생활을 하는 동안 오직 일밖에 몰랐다. 주식이나 부동산 투자 같은 재테크는 꿈도 꾸지 못하였다. 기질(基質)적인 원인도 있었겠지만 근본적으로 그럴만한 시간이나 여유가 없었다. 밤낮없이, 휴일 반납해 가며 그저 일만 했다. 일도 중요하지만, 열심히 재테크하고 노후 대비에 좀 더 치중할 걸 하는 뒤늦은 후회가 든다.
만약 월 340만 원 받는다면
지금 나는 연금을 받기 전인 소득 공백기를 지나고 있다. 따라서 현재 내 소비 생활의 원칙은 '최소 & 최대'이다. 얼마 되지 않는 모아둔 돈을 헐어 써야 하니 지출을 최소한으로 줄이되 필요한 경우에는 기분 좋게 쓰자는 입장이다. 향후 연금 수령이 개시되면 그에 맞게 다시 조정하겠지만, 어차피 적은 금액이므로 큰 차이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만약 두 배쯤이라면? 내가 340만 원을 연금으로 매달 받는다면 얘기가 달라진다. 기본적인 생활 유지 정도가 아니라 보다 적극적인 향유(享有) 차원으로 전환할 수 있어진다. 애당초 안될 일이지만 이런 우스꽝스러운 가정으로 잠시나마 즐거운 상상이라도 해보는 거다.
'욕망'이 아직 살아있는 나이를 75세까지라면 이 기간에는 그동안 못해본 것들, 하고 싶었던 것들 위주로 노는 데만 집중할 것이다. 논다는 것은 돈을 적극적으로 쓴다는 의미이다. 젊었을 때는 시간이 돈이 되지만 나이가 들어 시간을 보내려면 돈이 든다.
자격증이니, 재취업이니, 인생 2막이니, 새로운 도전에 나서는 분들을 존경하지만 나는 그러고 싶지 않다. 해보니 실망감이 컸고 그리 즐겁지 않았다. 진정으로 시니어 커리어를 인정하고 그에 걸맞는 환경이나 여건이 조성된다면 내가 왜 계속 일하는 것을 마다하겠는가. 그래서 죽어라 놀 것이다. 이를테면 골프 라운딩 횟수를 늘린다든지 해외여행 일정을 더 만족도 높게 짤 것이다. 무덥거나 추운 계절에는 평균 기온 25도의 나라에 가서 한 달이고 두 달이고 머무르는 계획도 세울 것이다.
85세까지는 정(靜)적인 창작 위주의 생활과 마음공부에 시간과 돈을 쓸 것이다. 창조적인 활동은 보람을 느끼게 하고 사람의 마음을 정돈시켜 준다. 예를 들면 붓글씨를 제대로 배워 명심보감이나 채근담 같은 고전을 필사한다든지, 캘리그래피로 박범신 님의 구시렁구시렁 일흔 같은 책을 만든다든지, 다도를 익혀 직접 제조한 꽃차를 연구한다든지 하는 것이다. 이런 것들을 배우고 익히는데도 적지 않은 돈이 필요하다.
더 나이가 들어 기본적인 생활에도 다른 사람의 도움이 필요할 때가 되면 부득이 실버레지던스 같은 곳으로 들어가야 한다. 어떤 실버타운은 인당 5~6백만 원을 훗가하며 이마저도 몇 년을 대기해야 들어갈 수 있다고 한다. 당연히 내가 340만 원을 받게 된다면 그렇지 못할 때보다 좀 더 여건이 나은 곳에 갈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일론 머스크에 의하면 앞으로 20년 안에 휴머노이드가 사람 수보다 많아질 것이라고 하는데, 가사 도우미 로봇 같은 것이 보편화한다면 그것들에 비용을 지불하며 집에서 여생을 마칠 수도 있을 것이다.
보통 인생
그런데 이쯤 되니 뭔가 의아하다. 결국, 이런 정도는 꼭 연금이 두 배로 오르지 않더라도 가능한 일들 아닌가? 다만, 오십보백보(五十步百步)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첫째, 건강 관리를 최우선으로 한다. 둘째, 저축 본능을 발휘하거나 돈을 틀켜 쥐고 앉아있지 않는다. 셋째, 필요한 지출에 인색하지 않으며 기분 좋게 쓴다.'는 나름 대원칙의 적용에도 다를 바가 없다.
OECD 회원국 중 일하는 노인 비중이 가장 높은 우리나라는 그 절반이 임시 일용직으로 일하면서 한 달에 100만 원도 못 번다고 한다. 또한, 국민연금을 받는 약 680만 명의 월평균 수령액은 60만 원 정도라고 한다. 이에 비하면 어쩌면 내 상황은 양호한 편인지도 모른다.
그러고 보니 내 연금도 내가 살아온 인생을 닮았다. 믿을 거라고는 공부 밖에 없기에 대학원까지 18년을 죽어라 했다. 대기업에 입사하여 시작한 33년간의 직업 생활은 늘 잡아당긴 고무줄처럼 팽팽하였다. 큰돈을 벌거나 높은 지위에 오르지는 못했지만, 각고(刻苦)의 노력 끝에 보통의 범주에 속하고 유지할 수 있었다. 이렇게 연금 타령을 하고 있는 것을 보니 아쉽게도 노후의 삶 또한 보통 인생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을 듯하다.
그러나 어찌 보면 '보통'이라는 말처럼 무난한 것도 없다. 보통 인생은 무탈한 인생이라는 말과 일맥상통한다. 내가 받을 그 '보통 연금(?)' 역시 그렇다. 그 돈으로 할 수 있는 게 없는 것이 아니라 보통의 것들은 할 수 있다고 생각하면 마음이 편하다. 평범한 삶이란 얼마나 감사하고 행복한 일인가.
돈 값을 한다는 말이 있다. 당연히 가진 것에 따라 누릴 수 있는 것도 달라지겠지만, 중요한 것은 상대적인 박탈감 때문에 마음을 다치지 않는 것이다. 적든 크든 간에 정기적인 수입이 있으면 그에 맞춰서 살게 되어 있다. 같은 돈이라도 얼마나 가치 있고 만족감 있게 쓰느냐는 나 자신의 현명한 생각과 판단에 달려있다.
TV 예능프로그램에서 어떤 젊은 가수가 열창하던 나훈아의 '삶'이라는 곡의 노랫말이 생각난다. "삶이란 인생이라는 마당에서 한 세월 놀다가 가는 거지(중략) 아무리 더하고 나누어 봐도 삶이란 그냥 본전일세(중략) 삶이란 그런 걸세." 더하고 나누어 봐도 어차피 본전이라는데 좀 아쉽더라도, 이렇게 스스로를 달래가며 살다 보면 또 답이 있지 않겠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