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협력 업체가 가짜 상품을 납품한다는 익명의 제보가 있었다. 수입한 고가의 상품을 국내에서 추가로 가공하여 가격을 부풀려 판매한다는 내용이었다.
해당 품목의 PC장인 정민은 감사팀 직원과 함께 A 업체로 점검을 나갔다. 업체 사장은 불시 방문에 놀라면서도 평소와 다름없는 태도로 우리를 맞이했다. 오히려 붙임성 좋고 수다스러운 타입인 그 회사 영업팀장이 좀 허둥거리는 모습이었다.
창고를 포함하여 회사 이곳저곳을 돌아보고, 수입 면장을 살펴보고, 수입 원가와 매가를 대조해 보았지만 별다른 사항을 발견하지 못했다. 압수수색영장이 있는 것도 아니어서 어차피 한계는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익명 제보였기 때문에 크게 비중을 두지 않았다. 사실 백화점은 수많은 협력사의 이익이 첨예하게 대립하기 때문에 경쟁사의 모함성 투서가 비일비재한 곳이다. 익명 제보까지 일일이 대응하다 보면 아무 일도 못하게 된다.
그런데 그로부터 보름 정도 지났을까? A사 사장한테 전화가 왔다. 회사 앞에서 잠시 만나고 싶다며 따로 드릴 말씀이 있다고 했다. 상담실로 오지 않고 굳이 밖에서 보자고 하는 어떤 이유가 있을 것이다.
회사 근처 카페에 들어서니 구석 자리에 A사 사장과 팀장이 먼저 와서 앉아 있다. 다른 때와 달리 노타이 차림에 낮술이라도 마신 것처럼 달아올라 있는 팀장의 얼굴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사장은 불안한 눈빛으로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이 사람들 지금 뭐 하자는 거지?
"김 팀장, 말씀드리지?"
사장이 고개를 반쯤 돌려 힐끗 쳐다보자, 팀장이 새끼손가락으로 자신의 코끝을 몇 번 긁적였다. 그의 시선은 여전히 커피잔에 고정되어 있었다. 며칠 만에 처음 말하는 것처럼 탁한 목소리가 그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저... 사실은 그 일... 제가 제보한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그 일'은 경쟁 업체에서도 하는 수법이라면서 팀장이 제안했다. 그렇게 하면 가격을 높여 받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사장은 즉답을 피했다. 그러나 팀장은 이를 암묵적 동의로 이해했다. 어쩌면 사장의 속마음도 그러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팀장의 움직임을 지켜보며 심란한 며칠을 보낸 사장은 아무래도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백화점 매장이 어떤 매장인가. 입점 품평회에서 5대 1의 경쟁을 뚫었고, 그동안 자리 잡느라 온갖 애를 써왔다. 다행히 지금은 안정적으로 운영되고 있고 적지만 수익도 나오는 편이다.
소탐대실하면 안 된다. 자칫하면 그 모든 노력이 하루아침에 물거품이 될 수도 있다. 사장은 팀장을 급히 불렀다. 더 이상의 가공 작업을 중단하고 이미 만든 가짜 상품은 폐기할 것을 지시했다.
그런데 그렇게 끝났다고 생각한 일이 전혀 예상하지 못한 방향으로 흘러갔다. 작업 중단을 '명시적으로' 지시한 며칠 후였다. 팀장이 사장실 책상 모서리 끝에 손을 앞으로 모은 엉거주춤한 자세로 섰다. 평소라면 주머니에 손을 넣고 건들거리고 있을 그였다.
"사장님, 저... 제가 돈이 좀 급하게 필요합니다."
"무슨 얘기야? 갑자기 무슨 돈?"
"생각해 주시지 않으면 우리 회사에서 가짜를 제조한 사실을 알리겠습니다."
놀란 사장이 소리쳤다.
"뭐라고? 무슨 말이야! 그건 중단하라고 했잖아?"
"폐기하기가 너무 아까워서 제가 일부를 이미 납품했습니다."
매출 증가를 위한 자신의 '야심 찬 계획'에 대해 사장이 끝내 거절하자 팀장은 크게 실망했다. 경쟁사들도 그렇게 한다는데 뭐가 문제지? 요즘 매출이 점점 꺾어지고 있는 걸 모르나? 요즘 들어 왜 내 말을 자꾸 무시하는 거야?
김 팀장은 사장에 대한 신뢰와 함께 그동안 쌓아온 공든 탑이 무너져 내리는 느낌이었다. 그는 욱하는 분노를 참지 못하고 회사를 그만두기로 했다. 그러자 마음속에 꼭꼭 누르고 있던 어두운 생각들이 스멀스멀 고개를 쳐들었다.
이대로 그만둘 수는 없다. 먼저 사장이 정신을 차리도록 해야 한다. 그리고 내가 못 먹는 떡, 다른 사람도 먹지 못하도록 백화점 측에 정보를 흘려 문제를 제기해야 한다. 급기야 그는 컴퓨터 앞에 앉아 익명의 투서를 작성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일이 생각보다 커졌다. 백화점 사람들이 회사에 들이닥친 걸 보자 겁이 덜컥 났다. 재빨리 작업장을 정리하지 않았더라면 진짜로 들통날 뻔했다. 그는 이 상황에서 한시라도 빨리 도망치고 싶었다. 그러나 사직서를 내기 위해 사장실로 향하는 동안, 악마의 속삭임이 다시 한번 그를 덮쳤다.
사실 그에게는 모아 둔 돈이 없었다. 배운 게 도둑질이라고 동종 업계 재취업을 해야 하는데 요즘 업계 상황이 그리 녹록지 않다. 만약 이대로 회사를 그만둔다면 당장 월세며 생활비가 막막했다. 그동안 자신의 희생에 대한 대가를 받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사장은 김 팀장을 끝까지 믿고 싶었다. 애당초 팀장은 앞뒤 없이 돈을 요구하고, 사장을 협박하고, 회사를 위기에 빠뜨릴 위인이 되지 못했다. 사장은 입을 꾹 다물고 앉아있는 팀장의 손을 잡았다. 며칠 사이 초췌해진 그의 얼굴을 묵묵히 바라보았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사장의 시선을 피하고 있던 김 팀장의 눈가가 젖기 시작했다. 그도 사장처럼 함께 울고 웃었던 지난 세월을 회상했을 터였다. 사장이 팀장을 처음 만났을 때 그는 아직도 얼굴에 여드름이 숭숭한 20대 초반이었다.
뭐든 시키면 그 이상을 하려고 애쓰는 마음이 예뻐서 때로는 자식처럼 대했고, 때로는 눈물이 찔끔 날 정도로 야단을 치기도 했다. 그렇게 10년이었다. 이제는 제법 경영에 대한 개념도 생긴 것 같아 든든했다. 더 많은 것을 가르쳐야겠다고 마음먹고 있었다.
서로의 진심을 확인한 그들은 그렇게 한참 동안 눈물을 쏟았다. 팀장으로부터 자초지종을 듣고 사태 파악을 모두 끝낸 사장은 그 자리에서 정민에게 전화를 걸었다. 머지않아 들통 날 것이 뻔한 일이다. 이 모든 사실을 솔직하게 말하고 선처를 바라는 것이 최선이라고 생각했다.
조사 결과 김 팀장의 말과는 달리 실제로 납품이 진행되지는 않은 것이 확인되었다. 더는 문제 삼지 않겠으니 앞으로 품질 관리에 더 신경 써 달라는 당부와 함께 그 사건은 종결되었다. 만약 정민이 엄격하게 문제 삼았다면 A 업체는 납품이 막히게 되고 결국 도산하고 말았을 것이다.
그 일은 정민이 훗날 업계 최초로 매뉴얼을 만들어 수입 상품 관리에 더욱 만전을 기하는 계기가 되었다. 따라서 어찌 보면 팀장의 목적은 절반의 성공을 거둔 셈이다.
최악의 경우 백화점 퇴출까지 예상하고 있었던 사장은 얼마 후 정민을 다시 찾아왔다. 이번에는 상담실로. 의자 끝에 엉덩이를 살짝 걸쳐 앉은 채 양손을 일본 사람들이 하는 것처럼 테이블 위에 올려놓고 여러 번 머리를 숙이면서 말했다.
정말 감사하다고, 덕분에 살았다고, 절대 잊지 않겠다고, 나중에 정민의 무덤까지 찾아가 가끔 막걸리 한 잔씩 올리겠다고...
하지만 정민이 회사를 떠난 이후 더는 그분한테 연락은 오지 않았다. 관계의 종말이다. 이익 관계가 사라지자 마음이 바뀐 것이다. 그는 진짜로 정민이 무덤에 들어가면 그때야 찾아오려는 걸까?
무덤 속에서 막걸리 한 잔 얻어먹을 사람이 없어져서 서운한 게 아니다. 중요한 것은 그때 그 마음이다. 진심으로 받아들였던 그 마음을 잃어버린 것, 그게 아쉽다.
독일의 사회학자 페르디난트 퇴니스 (Ferdinand Tönnies)는 공동사회(Gesellschaft)와 이익사회(Gemeinschaft)라는 개념을 통해 사회관계를 구분하는 기준을 제시한 바 있다.
공동사회는 가족이나 학교처럼 혈연과 지연 또는 정서적 유대에 기반을 두며, 구성원 간의 신뢰와 연대가 형성된다. 개인보다 공동체의 조화와 지속이 더 중요하게 여겨진다. 반면 이익사회는 회사나 비즈니스처럼 목적과 이익을 중심으로 형성된 관계로, 계약과 규칙이 핵심 요소가 된다. 개인의 합리적 선택과 효율성이 강조된다.
사람은 사회적 동물이기 때문에 이 두 가지 사회를 오가며 다른 사람과 직간접적인 관계를 맺으며 살아간다. 하지만 그렇게 형성된 관계가 불변이거나 영구적으로 지속하는 경우는 드물다. 이유와 원인 즉, 동기(動機, motive)가 무엇이냐에 따라 유통 기한이 달라진다.
특히, 이익사회처럼 동기가 '이익'인 경우에는 서로 주고받을 것이 없어지면 관계는 썰물 빠져나가듯 끝나게 된다. 그걸 형성하는데 아무리 오랜 시간이 걸렸어도 상관없다. 더 기대할 것이 없으면 연락이 뜸해지고 만나는 횟수도 줄어든다. 바쁘다고 핑계를 대 보지만, 별 볼 일 없어진 상대방이 우선순위에서 밀려난 것뿐이다.
물론 한 번 맺은 좋은 관계를 평생 이어가는 사람들도 있다. 하지만 쉽지 않다. 오죽하면 퇴직하고 골프 라운딩 멤버 4명만 가까이 남아 있어도 성공한 인생이라는 말까지 있겠는가.
그런 맥락을 곧바로 체감할 수 있는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핸드폰이다. 울리지 않는 전화가 궁금해져 핸드폰을 들여다보지만, 시간과 날짜만 덩그러니 떠 있을 뿐이다. 어쩌다 오는 전화는 십중팔구 스팸이다. 어느새 지나버린 세월과 함께 자신의 존재가 세상에서 잊히고 있는 것이다.
한 때 저장된 전화번호가 수백 개였으면 뭐 하겠는가. 서운할 때도 있지만 그게 인지상정이다. 정승 집 개가 죽으면 문턱이 닳고, 정승이 죽으면 개가 장사 지낸다고 하지 않는가. 그래서 세월과 함께, 아니 이익과 함께 변해버린 A사 사장을 미워하거나 원망하지는 않는다.
그렇게 합목적적 의지에 의하여 결합하고 이익 여부에 따라 해체되는 공식적인 관계의 종말은 그렇다 치자. 그렇다면 자연적 의지에 의해 형성되어 다분히 전인격적인 관계를 바탕으로 이루어지는 비공식적 집단의 관계는 어떠할까?
유감스럽게도 학교 친구나 회사 동기 같은 사이 또한 머리가 희어지면서부터는 관계 지속이 꽤 어려워진다. 정민은 언제부터인가 점점 친구 모임에 잘 나가지 않게 되었다. 만나면 회장 선출같이 수컷들의 서열 정하기에 몰두하거나, 아니면 같은 자리에서 두세 시간을 하찮은 입담으로 보내는 것이 싫다. 가장 부담스러운 것은 레퍼토리가 늘 똑같다는 사실이다.
딸이 어느 학교에 다닌다. 아들이 어느 회사에 입사했다. 둘째 아이가 무슨 어려운 자격증을 땄다. 자식 자랑 삼매경이다. 그러다가 지루해지면 현직 시절의 '라떼' 이야기로 넘어간다. 잘 나가던 그 시절을 아쉬워한다. 마지막으로는 무슨 사업을 하면 좋겠다는 '사업 계획'을 발표한다. 거기에 몇몇이 맞장구를 치고 때로는 의기투합하기도 한다. 하지만 십중팔구 공염불이다.
물론, 그런 걸 즐기는 '좋은 성격'을 가진 사람도 있지만, 이런 대화가 이어지면 어지간한 인내심이 아니고는 계속 들어주기가 힘겨워진다. 그렇다고 싫은 내색을 하면 자칫 다 늙어서 '왕따'를 당할 수도 있다. 이런 루틴을 몇 번 겪고 나면 더는 모임에 나가기가 망설여지고 결국 관계까지 소원해진다.
공통의 취미 생활을 전제로 하는 관계는 어떨까? 얼마 전 한 골프 모임에 자주 불참한다는 이유로 제명할 수도 있다는 협박(?)을 받았다. 사실 매번 라운딩에 참석하기에는 비용이 좀 부담스럽다. 그래서 일 년에 한두 번 해외투어에만 참석하는 걸로 원칙을 정했다. 상대적으로 가격이 저렴하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단톡방 안에서도 소외되는 느낌이 들었다. 아무래도 공통분모가 적어지다 보니 관계도 그만큼 멀어질 수밖에 없다.
정민은 등산을 좋아한다. 심장이 터질 듯 뛰고 온몸이 땀으로 흠뻑 젖은 채 정상에 올라가면 세상이 발아래로 내려다보인다. 등산이 주는 카타르시스이다. 산에 오르다 보면 줄줄이 열을 지어 오르는 동호회 일행과 맞닥뜨리거나, 등산로 입구에서 동그랗게 모여 서서 준비 운동을 하는 한 무리의 사람들을 목격하게 된다. 한 번은 이게 부러워서 산악회에 가입한 적이 있다.
그런데 어느 날 여성 회원 한 명이 합류하면서부터 우호적 '관계'에 심각한 균열이 가기 시작했다. 여성 회원을 두고 남성 회원 십여 명이 앞다투어 벌이는 어이없는 행태를 보는 내내 불편했다. 그래서 정민은 그 관계의 종말을 택했다. 그 이후에는 그냥 원래대로 혼자서 산행을 한다. 세상 뱃속 편하다. 자유로움의 대가는 외로움이라고? 좀 외로우면 어때. 어차피 인생은 외로운 거다.
보행에서 자유로운 손과 다른 사람과 힘을 합칠 수 있는 관계 성립은 인류 문명 발달의 근간이었다. 누구도 관계에서 벗어날 수는 없다는 말이다. 하지만 종국적으로 모든 관계는 결국 유한하다. 중요한 점은 좋은 관계를 만들고 최대한 오래 지속시키는 것과, 반대로 좋지 않은 관계는 그 인연의 끈을 속히 잘라버려야 한다. 그래야 자기 인생을 좋은 흐름으로 가져갈 수 있다.
다만, 이렇게 할 수 있는 것은 나이가 들고 그럴만한 때가 되어서 상황을 주관적으로 컨트롤할 수 있어야 비로소 가능한 일이다. 한창 사회성이 중요하고 커넥트에 치중해야 하는 사람들은 오히려 내가 좋아하지 않는, 불편한 사람과의 관계에 더욱 신경 써야 한다. 그래야 나도 모르는 사이에 뒤통수를 가격당하는 일이 없다. 불가근불가원(不可近不可遠)의 원칙이다.
좋은 인간관계를 맺고, 유통 기한을 늘리고 또 아름다운 종말을 맞이하는 일은 매우 까다롭고 어렵다. 그렇다고 끝까지 포기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정민은 이제라도 자신의 남은 인생에 둘도 없을 새로운 절친을 만나고 싶다. 유통 기한이 죽을 때까지인 그런 관계 말이다. 만약 그게 가능한 일이라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