ㅎㄷㄷ
외근을 다녀오는 길이었다. 운전기사가 누구랑 전화 통화를 하더니 갑자기 차를 다른 방향으로 돌렸다. 조수석에 앉아서 운전기사한테 무슨 이야기 인지 한참을 듣던 통역 겸 비서인 직원이 지금 회사로 들어가면 안 된다며 잠시 먼 길로 돌아가겠다고 한다.
또 시작이다. 통역을 할 때는 자기 생각을 관여시키지 말고 들은 그대로를 전하라고 그렇게 얘기하는데도 고쳐지지 않는다. 무슨 일인지, 어떻게 했으면 좋겠는지 보고하고 지시에 따르면 될 일을 자신들이 결정하려고 든다. 자존심이나 자아의식이 강해서 그런다고 하는데 그게 대체 직장 생활의 보고 체계하고 무슨 관계란 말인가.
'한국 사람 남자 두 명이 회사로 대표를 찾아왔다. 정문 경비가 확인한 결과, 방문 약속이 된 사람이 아니고 오히려 절대 들여보내지 말라는 대표의 지시를 받았다. 대표가 부재중이라고 하자, 안에 있는 걸 안다면서 경비를 밀치고 사무실 안으로 쳐들어 왔다. 거칠고 불량해 보이는 의문의 두 남자는 무단 침입에 이어 대표를 불러 오라며 난동 수준의 행패를 부리고 있다. 다행히 대표는 급히 옥상으로 피신해 더 큰 불상사는 모면했다. 상황이 심각하다는 판단을 한 직원들이 공안에 신고했고 곧바로 공안이 출동했다. 현재 상황에서 내가 현장에 나타나면 공연히 봉변을 당할까 봐 일부러 차를 돌려 잠시 피하도록 조치한 것이다.'
몇 번의 대화 끝에 파악한 내막이다. 해서 결론적으로 회사에 침입자가 생겼는데 나를 보호하기 위해 곧바로 들어가지 않고 우회한다 말이다. 늘 그렇듯이 답답하다고 화를 내면 나만 손해다. 베트남 직원들과 의사 소통하기 위해서는 한국 보다 두세 배 많은 시간과 노력을 들여야 한다. 힘들다고, 짜증 난다고 대충 짐작하고 넘어가면 꼭 문제가 생긴다. 이해될 때까지 끈기 있게 묻고 또 물어야 한다. 그나저나 베트남 공안이 회사에 출동했다고?
베트남에 가보신 분들은 공항에 도착해서 입국 심사를 받을 때 출입국 관리 소속 공안을 보고 느꼈을 것이다. 자비 따위는 없는 표정에 노려보는 날카로운 시선을 받고 나면 '씬짜오'하면서 미소 짓기는커녕 나도 모르게 긴장되고 움츠러든다. 당연히 지은 죄는 없다.
중국과 베트남에서는 경찰을 공안(公安, Công An)이라고 부른다. 경찰은 베트남어로 까인 삿(cảnh sát)이라고도 하는데 여기서 삿(sát)은 '죽이다'라는 뜻을 가진 동사이기도 하다. 어휘 자체가 무시무시하다.
교통경찰(CSGT)은 교통 법규를 위반한 오토바이를 현장에서 압류해 실어 가기도 하고 트럭은 바퀴에 자물쇠를 채워 버리기도 한다. 물론 견인 및 보관 인프라나 시스템이 부족한 탓도 있을 것이다. 사법경찰(CSTT)은 수사권과 기소권을 동시에 가지고 있어 막강한 공권력을 행사하며 여차하면 일단 유치장에 구속시키고 수사를 진행하기도 한다. 사실상 일상생활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다. 경찰기동대(CSCD)는 영장 없이 압수수색이 가능하며 총기 사용 권한이 있는 가장 강력한 조직이다.
혹시라도 베트남에서 공안을 '민중의 지팡이 또는 경찰 아저씨' 정도의 개념으로 이해하고 잘못 엮이면 큰 봉변을 당하거나 인생 최대의 고비를 겪을 수도 있다. 다행히도 한국 사람을 대하는 공안의 시선이 많이 부드러워졌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무서운 사람들이다. 베트남 사람들도 공안을 많이 두려워한다. 심하게 언쟁을 벌이며 싸우다가도 공안이 나타나면 갯벌 속으로 순삭 하는 게처럼 숨어 버린다.
몇 년 전까지 대표는 위생 용품을 수출하는 회사를 운영했다. 미국 FDA를 비롯한 국제 인증 획득으로 품질에 대한 공신력을 확보하고 차별화된 브랜드 아이덴티티(BI)를 구축하는 등 수억 원을 투자한 브랜딩 작업에 힘입어 유럽, 일본, 미국에서 주문이 밀려들었다. 하지만 중국에서 원자재를 수입하는 과정에서 큰 금액을 사기당했고 결국 납품을 하지 못하게 되고 말았다.
중간에 다수의 한국인 브로커들이 개입해 있었고 코로나로 인해 중국 현지 공장을 방문하여 직접 확인하는 것이 불가능한 상황이 빚어낸 사기극이었다. 베트남에서 기업 할 때 가장 조심해야 할 부분이 바로 이런 류의 한국 사람 사기꾼이다. 사기의 속성이 그러하듯 알고도 당하기 십상이다.
이 건과 관련하여 대표는 지금까지도 채무자이며 동시에 채권자인 입장에 서 있다. 발주와 함께 받은 선금을 원자재 구입을 위해 선지급했지만 결과적으로 적기에 원자재를 공급받지 못함으로써 납품을 하지 못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받은 선금은 자금 여건을 고려하면서 순차적으로 반환하고 있으나, 지급한 원자재 대금은 한 푼도 돌려받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한 번은 채무자 중 한 명이 회사를 방문한 적이 있었다. 그 한국인 브로커 중의 한 명이었다. 그런데 채무 상환 일정에 관한 미팅을 끝내고 회사 정문을 막 나서는 순간이었다. 근처에 잠복해 있던 것으로 보이는 한 무리의 사람들이 달려들어 채무자를 붙잡았다. 그들은 잠시 대화를 나누는 듯하더니 곧바로 달려들어 무차별 폭행을 가하기 시작했다. 쓰고 있던 안경이 날아갈 정도였다. 대표가 이 광경을 사장실에 설치된 CCTV 모니터로 목격하고 곧바로 공안에 신고했는데 공안이 도착할 무렵 그들은 너 나 할 것 없이 모두 달아나 버렸다고 한다.
베트남 직원인 A과장에 의하면, 이번 건은 대표의 이전 사업과 관련하여 채권자로부터 추심 의뢰를 받은 사람들이 예고 없이 들이닥친 듯했다. 난폭한 그들의 언행에 대표는 옥상으로 잠시 피신을 했고, 사장의 안전을 우려한 A가 공안을 불렀던 것이다. 베트남에서 사업을 하던 한국 사람이 조폭들에게 끌려가 팔이 절단되는 사건이 있었다는 소문이 흉흉하게 떠돈 적이 있었기에 모두가 걱정되는 상황이었다.
침입자 두 명 중 한 명은 공안이 온다는 소식에 바로 도망쳐 버렸고, 다른 한 명은 공안이 나타난 이후에도 한참을 더 서로에게 의미 없는 협박성 언행을 쏟아 놓고는 마침내 홀연히 사라졌다. 그러는 동안 출동한 공안의 별다른 제지나 조치는 없었다고 한다. 사실 공안은 베트남인 연루되어 있을 경우에는 적극 개입을 하지만 당사자가 한국인일 경우는 대체로 관망하는 태도를 취하는 경향이 있다.
A과장이 공안이 출동한 덕분에 침입자가 조금이라도 빨리 물러갔으며, 출동한 공안에게는 관행에 따라 약간의 '성의 표시'를 했다고 보고했다. 그런데 대표는 왜 쓸데없는 짓을 했느냐며 A에게 화풀이를 했고, A는 욕만 들었다며 울고 불고 억울해했다.
큰돈을 받지 못해 억장이 무너져 버린 채권자 입장에서는 이렇게 해도 부족할 것이다. 하지만 발주하고 선입금한 사람들도, 이 돈을 받아 그대로 원자재 구매 비용으로 선지급한 회사 대표도 예상치 못했던 카운터 펀치를 얻어맞은 사기 피해자라는 점에서 동병상련이지는 않을까?
정상적으로는 베트남 법에 호소하여 법적인 구제를 받아야 하겠지만 베트남의 법체계나 피해 구제 절차 역시 그렇게 만만치는 않다. 대표 또한 전담 변호사를 따로 고용하여 사기꾼 브로커들과 계약 당사자인 중국의 원자재 생산 공장들을 상대로 민형사상 소송 절차를 진행하고 있지만 속행이나 결말은 그야말로 안드로메다 이야기라고 한다. 오죽하면 심지어 중국 마피아까지 선을 대 보았다고 한다.
생전 처음 겪는 일에 본인도 내심 놀랐는지 일찍 퇴근했길래, 저녁에 집 근처로 불러서 맛있는 밥을 사주었다. 다시 시작해서 이만큼 온 것도 잘했으니 용기를 잃지 말라고 토닥여 주었다. 대표는 지난번 사업에 실패하고 천국과 지옥을 오가는 현타의 시간들을 보낸 후, 새로 투자 법인을 만들고 주력 업종을 유통업으로 전향하여 분투하고 있는 중이다.
홍의숙 작가가 쓴 ‘초심’에서 주인공인 최강민 사장은 한 달 내내 직원들 월급 마련하러 다니다가 모두 퇴근한 빈 사무실 구석에 앉아 컵라면으로 지친 몸과 허기를 달래며 눈물을 흘린다. 그는 페달 밟기를 잠시라도 멈추는 순간 넘어지고 마는 것이 중소기업의 사장의 운명이라고 탄식하며, 구두 굽이 닳도록 뛰어다니던 시절의 초심을 기억하려 애쓴다.
대표가 앞만 보고 달리겠다는 본인의 각오대로 이 정도의 충격에 흔들리거나 페달 밟기를 멈추지 말기를 바란다. 그리고 많은 중소기업 사장님들 부디 힘내시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