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가 들수록 시간의 흐름에 가속이 붙는다. 나에게도 예외는 아니다. 아들이 결혼식을 올린 지 벌써 반년이 되어가고 있다. 시간은 멀찌감치 달아나 있지만 눈을 감으면 그 모든 장면이 아직도 어제 일처럼 생생하다. 아무 근심도, 걱정도 없었다. 하얀 종이처럼 깨끗하고 새털처럼 가벼웠다. 그러면서도 바람직한 것들과 아름다운 것들이 한 곳에 모여 가득 차 있었다.
요새는 예식장 예약하기가 하늘의 별 따기라고 한다. 팬데믹 후유증으로 폐업한 예식장이 많은 데다가, 그간 결혼식을 미뤄오던 혼인 수요가 일시에 증가한 탓이라고 한다. 어디 준비할 것이 예식장뿐이겠는가. 게다가 호시탐탐 흉악한 입을 벌린 채 먹잇감을 노리고 있는 사기범들까지 경계해야 하니, 요즘 청춘들은 결혼식조차 만만치 않다.
감사하게도 아들 커플은 그 모든 힘든 과정을 잘 넘기고 무사히 결혼식을 마쳤다. 생애 과제 하나를 더 해낸 것이다. 다시 한번 칭찬한다. 물론 불요불급한 관습적 절차와 형식을 생략하도록 배려해 준 아빠, 엄마 덕분도 조금은 있을 것이다. 무엇보다 아들의 결혼식에 많은 축복을 보내주신 여러 분들 덕분에 성료(盛了)된 축제가 될 수 있었다.
지금부터 약 30년 전이다. 신생아실 유리창 너머로 간호사가 포대기에 싸인 갓난아기를 보여 주었다. 아들과 첫 대면이었다. 아기는 울지도 않고, 까만 눈망울을 또랑또랑 굴리며 우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마치 저도 아빠, 엄마를 보고 싶었다는 듯.
맞벌이 부부였던 탓에 나에게 누나, 그러니까 아들에게 고모 댁 근처로 이사해 육아를 맡겼다. 출근 시간에 데려다주고 퇴근하면서 데려오는 생활을 했다. 추운 겨울날 아침, 잠이 덜 깬 아이의 손을 잡고 집을 나설 때면 늘 미안한 마음이 컸다. 다행히 그 집에는 사촌 형이 셋이나 있어서 아들을 동생처럼 보살펴 주었다.
학교 홍보 모델이 될 정도로 주목을 받으며 사립 유치원과 사립 초등학교를 졸업했다. 청ㅇ중학교로 진학시키기 위해 이사를 검토하다가 여의치 못해 집 근처 중학교에 진학했다. 공부를 잘하는 편이었고 특히, 수학에 흥미가 있었다. 유명한 어학원에도 보내봤지만, 영어보다는 수학을 좋아했다. 수학 영재들이 간다는 상ㅇ고 입학시험을 봤으나 아쉽게 떨어지는 바람에 집 근처 일반 고등학교에 진학했다.
나는 학창 시절 공부를 꽤 잘했으나 수학을 못하는 편이었다. 다른 과목은 다 만점을 받아도 수학은 꼭 한두 개씩 틀렸다. 반면 엄마는 숫자 개념이 있다. 엄마를 닮은 것이다. 게다가 학교 근처의 ㅇㅇㅇ수학 학원에 다니면서 학원 선생님의 좋은 영향을 받았던 모양이다.
회사에서 회의를 하던 중 전화를 받았다. 아들이 ㅇㅇ대학교에 합격했다는 소식이었다. 할아버지의 재력은 없었지만, 아빠의 무관심(?)과, 엄마의 정보력 그리고 무한 희생 덕분이었을 것이다. 당연히 본인의 그만한 노력이 있었을 것이다. 처음 목표로 했던 포ㅇㅇ대보다 더 만족해하는 것 같았다. 아들은 그렇게 어엿한 명문대의 공대 오빠가 되었다.
아들이 입대한 곳은 논산 훈련소가 아니고 의정부에 있는 ㅇㅇㅇ보충대였다. 짧은 머리를 한 아들을 태우고 새벽에 집을 나섰다. 부대 근처 식당에서 밥을 먹이고, 연병장에서 진행되는 입영 절차를 착잡한 심정으로 바라보았다. 행여라도 아들을 한 번 더 볼까 고개를 한껏 빼고 열 지어 서있는 장정들 사이를 두리번거렸다. 돌아오는 길, 집에 도착할 때까지 아내와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저 마음속으로 빌었다. 아들아, 군 생활 건강하게 마치고 오너라.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마음이 울적했다.
총검술을 선보이던 훈련병 수료식, 정성껏 음식을 장만해 부대로 면회를 가던 길, 부대 개방 행사에서 구경한 K9 자주포, 휴가 때 가족 여행, 강화도 펜션에서 열린 온 가족의 위문 잔치..... 그렇게 아들의 국방부 시계는 멈추지 않고 돌아갔고, 소망대로 건강하게 전역했다. 부대에서 보급 보직을 받았는데 행정병 역할까지 하느라고 나름의 고생을 많이 했다.
상병 계급장을 달고부터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연락이 뜸해지고 면회를 극구 사양을 하는 등 아들의 분위기에 변화가 있었다. 이는 눈치 빠른 엄마의 레이더에 즉각 감지되었다. 아마 그때부터 지금 며느리인 여자 친구와 본격적으로 사귀기 시작했던 모양이다.
복학하고 졸업이 임박할 즈음, 같은 과 졸업생들이 하나둘 취업에 성공해 나갈 때마다 아들은 티를 내지 않았지만 내심 초조했을 것이다. 하지만 아들은 묵묵히 자신이 해야 할 것들을 했고, 나와 아내는 마음속으로 응원했다. 아들의 책상 책꽂이에 '느리게 더 느리게'라는 책이 꽂혀 있는 것을 보면서 부담감이 얼마나 컸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그러다가 드디어 H그룹 계열사인 IT 회사에 합격했다. 충분히 축하받을 만한 취업 성공이었다. 그런데 입사 후 1년이 되어 가던 즈음, 아들은 돌연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고 대학원에 진학했다. 회사의 가치나 비전에 의문을 품고 있었다. 힘들게 들어간 회사인데 좀 더 견디어 보라고 하고 싶었지만, 언제나처럼 아내와 나는 아들을 믿었다.
학교 연구실에 규칙적으로 출퇴근하면서 아들은 자신의 길을 뚜벅뚜벅 걸어 가고 있었다. 그게 좋았다. 도전하고 노력하는 모습, 어려워도 좌절하거나 포기하지 않는 태도.
대학원 졸업을 앞둔 어느 날, 아들에게 전화가 왔다. 낮에 아들이 전화하는 일은 드물다. 무심코 받은 전화기 너머로 아들의 목소리가 살짝 떨리고 있었다.
"아빠, 저 ㅇㅇㅇ에 합격했어요."
"응? 어디? ㅇㅇㅇ?"
이름만 대면 누구나 아는 글로벌 기업이다.
"네. 거기요."
이 한마디면 되었다.
"그래 애썼다. 진심으로 축하한다. 정말 장하다."
세상을 다 가진 기분이었다. 더 바랄 것이 없었다. 언제나처럼 아들은 이번에도 기대 이상을 해냈다.
결혼식장은 강남에 있는 ㅇㅇㅇㅇ이라는 예식장이었다. 혼주 시식을 갔을 때 교통 혼잡 때문에 애를 먹었던 경험이 있어 예정보다 더 빨리 출발했다. 청담동 샵에 가서 혼주 메이컵을 하고 예식장에 도착하니 우리 부부가 일등이었다. 첫 타임이라서 앞에 진행된 예식이 없어서 깔끔했다. 도착해 있는 화환들을 살펴보고 있는데 사돈 내외가 이등으로 도착했다. 부모 마음은 다들 그런 것 같다.
신부 대기실에서 사진도 찍고 즐기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마음이 흐뭇했다. 젊은이들 답게 1도 긴장하지 않고 밝다. 예식 전에 미리 가족사진 촬영을 했다.
나는 이미 퇴직을 했고, 현재는 계약직 아르바이트를 하는 상태라서 일부러 청첩장을 돌리지 않았다. 어떤 이들에게는 민폐가 될 수도 있으니까. 사실 현직에 있으면서 지출한 축의금만 해도 적지 않은 금액이지만 그렇게 지출 대 수입의 개념으로 따질 일은 아니다. 하객들은 예상보다 많았다. 아내의 지인들도 적지 않았지만, 아들과 며느리의 친구들이 사진을 나누어 찍을 정도로 압도적이었다.
결혼식은 시종일관 유쾌한 분위기에서 진행되었다. 콤팩트하고 임팩트 있었다. 아들 결혼식에는 로봇이 출현하는 거 아니냐고 우스갯소리를 한 적이 있었지만 그런 일은 없었다. 대신 예식장 안은 젊은 엘리트들이 뿜어내는 열기로 가득 차 있었다.
식이 끝나고 피로연장을 돌면서 하객들에게 인사를 했다. 아들 회사 직원들이나 며느리 회사 직원들, 그리고 아들 학교 친구와 연구실 선배들에게 일부러 친근감 있게 대하며 인사했다. 그랬더니 세상에나, 그분들 사이에서 내가 아빠인가 아니면 형인가 하는 논란(?)이 번졌다지 뭔가!
별도로 마련된 혼주 좌석에 앉아 식사를 대강 마치고, 하객들 배웅하다 보니 피로연장 주변이 점차 조용해졌다. 정산을 마치고 아들 내외는 본인들 신혼집으로 갔다. 집에 가서 쉬면서 다음 날 출발하는 보름간의 유럽 신혼여행을 준비할 것이다.
아들이 ㅇㅇㅇ에 입사하면서 출퇴근 거리가 문제가 되었다. 일단 집에서 다니면서 회사 근처 오피스텔을 알아봤는데, 그야말로 코딱지만 한 원룸형 오피스텔 보증금이 무려 2억 가까이 되었다. 그럼에도 물건이 나오면 10분도 안 돼서 계약이 끝나버리는 엄청난 일이 벌어졌다. 인근에 대기업 두 개가 들어선 이후로 생긴 현상이라고 한다. 오피스텔 오픈런을 한끝에 겨우 입주에 성공할 수 있었다.
신혼집은 아들이 살 던 오피스텔 보다 조금 더 멀어지기는 했지만 요새 사회적으로 크게 문제가 되고 있는 전세 사기로부터 안심이 될만한 곳에 장만했다. 내가 외국에서 근무하고 있을 때라서 아내가 먼 거리를 오가며 이사를 도와주었다. 당분간 거기서 살면서 부지런히 돈을 모아 이번에는 내 집 마련이라는 숙제를 해야겠지.
마음 같아서는 집 한 채 척하니 사주고 싶지만 유감스럽게도 내가 그럴만한 능력이 못 된다. 아들도 이해하리라고 믿는다. 아빠 엄마가 열심히 뒷바라지해 주었고, 유산을 남겨주지는 못하지만, 학자금 대출 같은 빚을 남겨 주지도 않았으니까.
아내의 한복을 반납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 한강 주변으로 예쁜 노을빛이 머물러 있는 게 보였다. 앞 쪽 멀리 웅장하게 펼쳐진 북한산의 전경이 눈에 들어왔다. 조수석으로 고개를 돌려보니 아내가 말없이 상념에 젖어 있었다. 문득 결혼식장에서 내가 했던 '덕담' 시간이 떠올랐다.
아이들이 결혼식을 준비하면서 나에게 3분 분량으로 덕담을 해달라는 부탁을 했다. 주례 없는 결혼식이 대세로 자리 잡다 보니 나에게 이런 기회가 다 온다. 문제는 3분이다. 너무 짧다. 하지만 전체 스케줄 때문이라 하니 지켜줘야 한다. 사실 길게 얘기하는 것도 좋아 보이지 않을 것이다. 원래는 양쪽 아빠들에게 부탁했는데 사돈 측에서는 부끄럽다며 하지 않겠다고 했다고 한다.
화두를 뭘로 잡을 것인지 고민하다가 정석주 님의 '대추 한 알'이라는 시가 생각났다. 지금 이 자리에 오기까지 고단했을 아들을 위로하고, 인생은 뭐니 뭐니 해도 즐겁게 살아야 한다는 메시지를 주고 싶었다.
지금까지 일하면서 남들 앞에서 발표하는 일이 많았고, 학생들한테 특강도 여러 차례 해왔기 때문에 나한테는 크게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런데 아들 결혼식이라는 특수한 상황 탓인지 살짝 긴장되었다. 바로 앞에 아들 내외가 서 있고, 수많은 하객들이 어둠 속에서 귀를 기울이고 있는 상황이라니. 게다가 조명이 바로 눈을 비추고 있어 시야를 방해하고 있었다. 준비한 원고가 잘 보이지 않았다. 여유롭게 하지 못한 것 같아서 아쉬웠다.
"안녕하십니까? 신랑 아빠입니다. 지금이 덕담 시간인 거 알고는 있는데, 그전에 감사한 마음이 너무 커서 아무래도 인사 말씀부터 드려야 할 것 같습니다.
저희 아들에게 ‘요즘 어떠니?’ 하고 물으면, 한결같이 이렇게 대답합니다. 좋은 분들과 함께여서 재미있어요. ㅇㅇㅇ의 좋은 분들, 좋은 분들이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ㅁㅁㅁ는 대표님 마인드와 직원들 팀워크가 대단하다고 며느리한테 들었습니다. 이렇게 와 주시고 축하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신랑 신부의 오랜 친구들 그리고 여러 지인 분들, 일가친척분들, 이 자리에 참석해 주신 모든 분, 항상 신랑 신부에게 많은 관심과 사랑 베풀어 주셔서 그저 고마울 따름입니다.
우리 예쁜 며느리 ㅇㅇㅇ양을 그동안 잘 키워주시고 보살펴 주신 사돈 내외분, 그리고 아들이라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는 분이죠. 아들을 위해 헌신해 오신 신랑 엄마, 고맙습니다. 수고 많으셨습니다.
아들아! 너를 처음 만났을 때가 생각난다. 포대기에 싸여 아빠 엄마를 바라보는 눈빛이 어쩌면 그리도 초롱초롱하든지. 그게 엊그제 같은데 어느새 세월이 많이도 흘렀구나. 마치 중간을 훌쩍 건너뛰어 이 자리에 온 것 같은 느낌이다.
하지만 어느 시인의 말처럼, 대추 한 알이 붉어지고 둥글어지기까지 어디 저절로 된 것이 하나라도 있었겠니? 그 안에 태풍 몇 개, 천둥 몇 개, 서리 내리는 몇 밤, 땡볕 두어 달이 있었을 거다. 그 고단했을 과정을 넘어서 이렇게 너의 반쪽과 함께 행복한 모습을 보니 대견하기 이를 데가 없구나. 잘해왔다고, 애 많이 썼다고 칭찬해 주고 싶다. 덕분에 아빠 엄마 마음은 매일매일 꽃밭이란다.
언제나 반짝반짝하고 명랑 쾌활한 우리 며느리, 환영한다. 앞으로 서로에게 좋은 가족이 되도록 노력하자. 너희의 결혼을 다시 한번 축하하고, 너희의 앞날에 항상 길이 열려 있기를, 그 길이 언제나 보이기를 기원한다.
프로이트라는 심리학자가 이렇게 말했단다. Work and love, love and work. That's all there is. 아들아, 그리고 며늘아! 일하고 사랑하라, 사랑하고 일하라. 그것이 삶의 전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