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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화문화답 Jun 20. 2024

여러분을 해고합니다

존재하는 모든 것은 이유가 있다

느닷없는 해고 통보


주말 내내 가을비가 추적추적 내리더니 아침 기온이 뚝 떨어졌다. 동장군이 발을 구르며 다가오고 있음을 예고하는 쌀쌀한 날씨에 몸이 잔뜩 움츠러들었다.


이즈음은 나뿐만 아니라 다른 학교에 근무하는 분들도 일 년 중 가장 바쁜 시간을 보내고 있을 터였다. 차가워진 두 손을 비벼가며 노트북을 열자, 서울시 담당자로부터 이메일 한 통이 도착해 있었다. 얼핏 제목을 보니 사업 평가 결과 통보 어쩌고라고 적혀 있었다. 특별히 중요하거니 급한 내용은 아닌 것 같아서 나중에 보기로 하고 미뤄 두었다.


그런데 오후가 되자 호떡집에 불난 듯 여기저기서  난리가 났다. 가장 먼저 이웃 학교에서 근무하는 A취업지원관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그는 3학년 전체를 대상으로 초기 상담부터 시작해야 한다는 원칙을 주장하다가 스스로 상담 지옥에 빠져 버렸다고 죽는소리를 하던 분이다. 새된 목소리로 서울시를 비난하면서, 그동안 '열심히 해준 것'을 후회했다. 대체 이게 무슨 일인가 싶어 이메일을 열어 보았다.


"2023년 사업 종합 평가 결과 미흡으로 판정되어 12월 31일부로 사업을 종료하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현재 근무 중인 모든 취업지원관의 계약이 12월 31일부로 종료됨을 알려 드립니다."


그러니까 정리하자면, 경력형성형 뉴딜 일자리 사업의 하나로 2017년부터 7년간 추진 돼오던 '직업계고 취업지원관 사업'이 느닷없이 종료될 예정이고, 이에 따라 현재 근무 중인 취업지원관을 모두 해고하겠다는 통보이다.


사실 나로서는 그렇게 충격적이거나 누구를 성토할 일은 아니었다. 애당초 이런 공공일자리 사업은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른다. 예측 불가능이라는 리스크가 내재해 있는 것이다. 하지만 다른 분들, 내년까지 계속 근무를 철석같이 믿고 있던 분들에게는 청천벽력 같은 소식임에 틀림이 없었다.


'정량평가 37.2, 정성평가 33.0, 합계 70.2를 받았는데, 이 점수는 우수, 양호, 미흡 중에서 미흡에 해당한다. 전문가 의견에 의하면 참여자 개개인의 노력에 의존하는 일 경험 사업이고 추진과정의 체계성 개선이 요구되며 관련 단체가 많아 주무부처의 주도성을 제고가 필요하다.'


취업지원관 개개인의 역량 차이가 커서 결과적으로 학교나 학생들에게 미치는 기여도의 편차가 크다는 점에는 공감한다. 체계성 개선이 요구된다는 점에도 동의한다. 다만, 한 두 해 지속해 온 사업도 아닌데 그동안 드러난 문제점을 적극 개선하지 못하고 왜 하필 올해에 종료해 버리겠다고 결론을 내렸는지 주무부처 또한 비판을 면하기 어려울 것이다.


세 번째 이유 즉, 주무부처의 주도성 제고가 필요하다는 전문가의 의견은 틀렸다. 반대로 없을수록 좋을 것 같다. 학교 현장의 자율성을 확보해 주는 것이 훨씬 효과적이다. 주무부처가 깊이 개입하면 오히려 비전문 당사자가 하나 더 늘어나는 옥상옥을 초래할 뿐이다.



아이들한테 받은 상장


3학년 학생들은 졸업식만을 남겨 두고 있고, 나의 마지막 근무일 역시 얼마 남지 않았던 어느 날이었다.  점심을 먹고 들어왔는데 학생들 여럿이 기다리고 있었다. 현장실습을 거쳐 채용으로 전환하여 근무하고 있는 A, 글로벌 금융기업에 최종 합격하여 출근을 앞둔 B, 은행에 합격하여 합숙 연수를 기다리고 있는 C, 취업을 준비하다가 진학으로 진로를 변경하여 대학에 입학할 예정인 D, 그 외 여러 학생들에게 나는 순식간에 둘러싸였다.


아직 첫 월급을 받지 못하였을 텐데 학생 신분에는 비싸 보이는 오ㅇ록 차(茶) 세트와 함께, 'ㅇㅇㅇ선생님'이라고 타이틀이 적혀 있는 A3 크기의 색지를 받았다. 그 안에는 각자의 마음을 담은 글들이 빼곡히 적혀 있었다. 


 '선생님 덕분에 바쁘고 의미 있게 보낸 것 같아요.', '선생님 덕분에 취업할 수 있게 되었고, 제 곁에 든든한 선생님이 계셔서 좋았어요.', '그간 선생님이 도움 주셨던 모든 것들이 아직도 저에게 많은 영향을 주고 있어요.', '특히 면접이 어려웠는데 도와주셔서 정말 감사했습니다.', '취업뿐만 아니라 저를 성장시켜 주셨습니다. 덕분에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지 계획이 선 것 같아요. 멋지게 성장한 모습으로 나중에 꼭 한 번 뵙고 싶어요.', '3학년 올라와서 취업 때문에 고민을 많이 했는데 항상 옆에서 힘이 돼주셔서 감사했습니다. 취업했다고 여유 부리지 말고 토익이랑 경제 관련 공부하라던 선생님 말씀 꼭 기억하고 실천하겠습니다.'


보람 있다거나 뿌듯하다거나 이런 몇 마디 말로는 표현하지 못할 벅찬 감정이 올라왔다. 히터가 고장 나, 오전 내 냉기가 감돌던 교무실에 온기가 퍼져 나갔다. 취업부 선생님들께서 '감동적인 장면이다. 전에는 이런 일이 없었다.'며, 아이들과 작별의 순간을 사진으로 남겨 주셨다.


항상 아이들한테 어떤 영감을 주려고 노력했다. 진심을 다한 지난 시간이 헛되지 않았다. '나는 지금 여기서 뭘 하고 있는 건가.' 하는 회의가 밀려올 때마다 흔들리지 않았던 나 자신에게 칭찬해 주고 싶었다. 그래 이 정도면 잘한 거야.


얘들아, 선생님 덕분이라니. 아니야, 너희가 잘한 거야. 끝까지 잘 따라와 줘서 고마워. 너희는 이제 세상을 향해 한 발을 내디딘 거뿐이야. 저 언덕 너머에 무엇이 있는지 달려가 보렴. 높은 목표를 세우고 계속 도전해야 한다. 언제나 포기하지 말고, 용기를 잃지 않기를 보이지 않는 곳에서 응원할게.



아름다운 기억 속으로


취업부 교사 분들과 함께 송별회를 했다. 술보다는 수다 삼매경을 더 즐기는 성향들이라서 나로서는 그렇게 재미있지는 않았지만, 이런 자리를 마련해 주었다는 사실만으로도 감사한다. 그동안의 시간이 잘 마무리되는 느낌이다. 다음 날 점심시간에는 학교 밖 카페에 모여서 케이크와 촛불로 서프라이즈를 해 주었다. 행복한 시간들이다.


모든 교사분들에게 작은 쿠키라도 돌릴까 생각했다. 그러나 취업부 선생님들이 말리는 바람에 하지 않기로 했다. 하긴 내가 뭐라고 그렇게까지. 취업부장과 교감, 교장에게는 스트레스를 받았을 때 사용하시라고 '아로마 롤 온'을 선물했다. 이 선물들은 끝까지 마무리 잘하고 나오라는 뜻으로 아내가 직접 준비해 주었다. 교장선생님께서는 참 센스 있는 분이셨다. 지나가다 들르시라고 하셨고, 교감선생님께서는 식사라도 한 끼 대접해야 한다며 취업부장과 함께 따로 저녁밥을 사주셨다.


비록 학교 소속 '직원'은 아니었지만 일 년 안에 사계절이 있던 것처럼 있을 만한 일은 다 있었고 겪을만한 일은 다 겪었다. 이 작은 학교 안에도 우주가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고 내가 무슨 밀알이 된다거나, 어떤 기여를 했다거나 그런 일은 없다. 머지않아 언제 그랬냐는 듯이 흔적도 없이 잊힐 것이다. 하지만 나는 양손에 하나씩 큰 선물을 받아 들었다. 하나는 교사가 아니면서 학교생활을 했던 특별한 경험, 그리고 다른 하나는 학생들과 같이했던 시간과 추억이다.


취업지원관이라는 제도도, 그런 용어도 이제는 없어질 것이다. 하지만 존재하는 모든 것에는 이유가 있다고 한다. 비록 모든 것이 사라진다 해도 그동안 수많은 관계자분들의 노력이 가볍게 평가되지 않았으면 좋겠다.



아내의 축하(?) 선물


지난 일 년은 갈 길 뻔함에도 문득 옆길을 돌아보는 것처럼 그야말로 얼떨결에 시작되었다. 지나온 33년간의 직장 생활과는 결이 다를 것 같다는 기대감 반, 학생들과 생활을 한다는 설렘 반으로 시작한 취업지원관은 눈 깜빡할 사이에 끝이 났고, 또 하나의 작은 결말을 맺었다.


세상 모든 일이 그러하듯 좋은 일도 있었고 그렇지 못한 경우도 있었다. 하지만 전반적으로는 잘 지냈고 잘 마무리되었다는 생각이 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순간 눈을 감고 지난 시간을 되돌아보면 역시 아쉬움이 앞선다. 자이가르닉 효과(Zeigarnik effect)이다.


그렇게 휑한 시간을 보내고 있는데 뜻밖에 아내가 선물을 주었다. 제주 중문 1박 2일 여행이었다. 여행 테마는 '수고한 남편 기분 전환하기' 란다. 수고는 맨날 본인이 다 하면서. 그곳에서 시간을 보내는 동안 서울의 영하권 날씨와는 달리 평균 15도를 기록하는 봄 날씨를 만끽했다. 아내의 따뜻한 마음이 그대로 전해 지는 듯했다.



현실과 이상 사이의 어디쯤인가


일 년이라는 시간이 가고 나의 나이에는 1이라는 숫자가 더해졌다. 무엇인가로부터 점점 멀어져 가는 느낌이다. 굳이 변명을 해 보아도 '나이 듦'에는 역행할 수가 없다. 뭔가 기여할 수 있을 것이라는, 이상적인 생각들이 현실 세계에서는 여지없이 부딪히고 막힌다. 연령 제한의 벽은 생각보다 높다.


혹시라도 경영컨설팅이나 진짜(?) 직업 상담과 관련한 시니어 일자리가 생긴다면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수는 있겠다. 하지만 인위적인 노력은 하지 않을 생각이다. 그런 기회 자체가 거의 없을 것이다. 영화 시니어 인턴 같은 일은 현실 세계에서는 일어나지 않는다.


더 이상 학교 근처에 얼씬거리다가는 할생님(할아버지, 할머니 선생님) 소리를 들을지도 모른다. 저출산으로 인한 병력 부족 현상을 나이 든 남성을 동원해서 해결하자는 '시니어 아미' 논란이나 초고령화 사회의 해소책으로 '동남아 은퇴 이민'을 보내자는 기사를 보면서, 이제는 그렇게 보충적이고 궁여지책의 대상이 되었다는 몹시 허허로운 생각을 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남은 내 인생은 여전히 현실과 이상 사이의 어디쯤인가에 서 있을 것이다. 일단은 목표 의식을 가지기 위해 지금부터는 작은 두 가지 과제에 도전하기로 했다. 하나는 여전히 백돌이를 면치 못하고 있는 골프이고, 또 하나는 아직도 좋아하는 7080 곡 하나 제대로 연주할 줄 모르는 기타이다. 텃밭 농사도 해볼 예정이다.


그러고 보니 아직 못다 한 일들, 해야 할 것들이 많다. 인생은 즐거운 것이고 재미있게 살아야 한다. Why are you so serio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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