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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성범 Aug 31. 2018

참 아름다운 사람을 보았습니다.

비 오는 날 오후, 분홍색 원피스를 입은 한 소녀가 무대 위로 천천히 걸어 올라왔습니다. 옆 사람의 도움이 필요했고, 한발 한발 조심히 내딛는 발걸음에서 앞이 보이지 않는 소녀임을 직감할 수 있었습니다. 무대 위로 올라온 그 소녀는 곧 마이크를 잡았고, 자신을 소개하였습니다. 자신은 시각 장애인이며, 서울대 자유전공학부 2학년으로 영어 번역가 꿈을 키워가는 예쁜 소녀였습니다.    


소녀는 자신의 꿈 이야기로 청중의 마음을 열기 시작하였습니다. 중학교 시절엔 오페라 가수의 모습에 반해 성악가로 꿈을 세우고 매일 노래와 피아노 연습에 몰두하였습니다. 하지만 고등학교에 진학하면서 성악가로 성장하는데 한계를 느꼈다고 하였습니다. 뜻도 모르는 이태리 악보를 일주일에 1곡씩 외우면서 노래에 감동할 수 없었고 행복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 소녀는 행복을 찾아 자신의 꿈을 영어 번역가로 바꾸었다고 합니다. 세계의 훌륭한 영문 도서를 한국인의 감성에 맞게 멋지게 재해석하여 많은 사람에게 삶의 용기를 주고 싶다고 하였습니다. 특히 시각 장애인인 자신이 역경을 이겨내는 모습을 우리 학생들에게 보여주고 그들에게 삶의 희망을 전해주고 싶다는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결국 그 소녀의 꿈은 성악가도 아니고 영어 번역가도 아니었습니다. 좌절하고 힘들어하는 이 세상의 사람들에게 빛과 소금이 되는 것이었습니다. 자신이 이 사회에 희망의 선구자가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서 그 소녀는 서울대 학생들의 생활모습을 조금 알려주었습니다. 사람들은 서울대 학생들이 우리나라 최고의 학생이기 때문에 많이 행복할 거라 생각하는데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죽고 싶다’, ‘누가 지구 멸망시켜 주세요.’ 이런 언어들을 하루에도 수십 번 듣는다는 것입니다. 볼 수 있고, 들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최고의 수재가 모인 집단의 모습이라고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었다고 합니다. 이런 모습을 보면서 자신이 희망의 선구자가 되어 지치고 좌절해가는 사람들에게 용기와 도전을 노래할 수 있는 작은 악보가 되고 싶다고 하였습니다. 소녀는 아바의 ‘I Have Dream’이러는 노래를 아름다운 피아노 소리와 함께 들려주었습니다.   

 

나에겐 꿈이 있어요. 부를 노래가 있어요.

어떤 어려움이든 극복할 수 있어요.

동화 속의 신비한 일들을 믿는다면

비록 실패할지라도 미래로 나아갈 수 있어요.    


소녀가 이야기를 하는 내내 눈물을 흘리는 두 분이 계셨습니다. 한 분은 어머니였고, 다른 분은 소녀의 고등학교 교장선생님이셨습니다. 이 소녀가 그동안 좌절하고 힘들어했을 때 이 두 분의 격려가 없었다면 지금의 소녀 모습과는 다르겠지요. 아마 어머니께서는 보지 못하는 소녀의 힘듦보다 몇 배 더 힘들고 지치셨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소녀 앞에서는 당당히 세상을 향해 나아가라고 말씀하셨을 것이고, 소녀가 잠들었을 때 남몰래 흘린 눈물이 얼마나 많았겠습니까?    


소녀의 이야기를 듣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나의 초라한 모습이 커져가기 시작했습니다. 어느 날부터 불평이 조금씩 늘었으며, 조금 더 가져보기 위해서 나의 욕심이 내 마음을 지배해가던 일상들이 눈앞에 다가와 도저히 소녀를 바로 볼 수 없었습니다. 나 자신이 많이 부끄러웠고 소녀에게 미안했습니다. 그러면서 ‘사람이 꽃보다 아름답다’라는 노래가 떠올랐습니다. 정말 꽃보다 아름다운 사람을 오늘 발견했습니다.    


창밖에는 비가 많이 내립니다. 지난여름 우리를 찾아오지 못해서 미안했나 봅니다. 창밖에 떨어지는 빗소리가 오늘따라 유난히 크게 들립니다. 창으로 흘러내리는 빗물의 모양도 오늘은 달리 보입니다. 아마 내 마음이 그 소녀로 인해 좀 더 고와진 까닭이겠지요. 그 소녀가 허락한다면 언제가 우리 아이들과 함께하는 시간을 마련하겠습니다. 그 소녀의 삶에 모든 사람의 격려와 축복이 함께 하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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