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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성범 Sep 17. 2018

천천히 달려도 괜찮아

지난 5월 어느 날 학교 후문 담 옆 화단에 수국 몇 구루를 심었습니다. 그곳은 인적이 없는 시간에 중학생들이 가끔 담을 넘는 곳으로 보기에 안타까웠습니다. 아이들이 담을 넘어오면서 다쳤는지 주변 나무들은 가지가 부러져 보기에 좋지 않았습니다. 그곳에 수국을 심어 예쁜 꽃이 피게 되면 아이들이 담을 넘는 행동을 멈출 거라는 기대를 했습니다. 예상대로 담을 넘는 아이들이 줄어들었으며, 수국은 무럭무럭 자랐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아침, 수국의 가지가 크게 훼손이 되었습니다. 아이들 발자국이 수국의 잎에 문신처럼 새겨져 있었습니다. 잎은 찢기고, 부러진 가지가 화단 위에 가을 낙엽처럼 흩어져있었습니다. 줄기의 아랫부분만 남아있어 이 나무가 다시 살 수 있을까 걱정이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지난여름 가뭄이 시작되었고, 그렇게 수국을 볼 수 없었습니다. 매일 명상 숲과 화단에 있는 다른 나무에게는 물을 주었지만 그 수국만은 생명을 다했으리라 생각하고 물을 주지 않았습니다.   

 

여름에 비를 보내지 못해 미안했던지 가을장마가 계속되는 어느 날이었습니다. 그 수국이 죽었던 자리에서 생명의 잎이 하나, 둘 나기 시작했습니다. 죽은 나무에서 솜털과 같은 작은 새싹 하나가 나오더니, 연이어 새싹들이 앞을 다투어 고개를 내밀기 시작했습니다. 아마 그 수국의 줄기나 가지는 상처를 받았지만 뿌리는 굳건히 살아 있었습니다. 지난여름 물 한 방울 주지 못해서 참 미안했습니다.     


우리 6학년 아이들이 진로여행을 다녀왔습니다. 진로 여행을 가기 전 강당에서 6학년 아이들과 만남을 가졌습니다. 건강과 안전에 대해 당부할 생각이었지만 6학년 아이들의 얼굴을 보는 순간 마음이 너무 무거워졌습니다. 가슴 아래 넙치가 자리 잡고 있는 것처럼 지치고 틈이 없는 얼굴에서 어느 어른보다 더 힘든 삶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요즘 학교생활이 힘드니?”라고 물어보았습니다. 아이들은 매일 학원에 다니는 것이 너무 힘들다고 대답을 합니다.  “너희들이 이런 구조에 살 수밖에 없는 사회를 만들어서 참 미안하구나.” 수국에게도 아이들에게도 참 미안한 하루입니다.    


그러면서 수국이나 우리 아이들이나 비슷하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수국은 담 옆 화단에 살면서 담을 넘는 아이들에게 잎이 망가지고 줄기가 상처를 받습니다. 뿌리는 살았는데 그 가뭄에도 아무도 물 한 방울 주지 않습니다. 아이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만나본 모든 아이들은 나쁜 아이가 없습니다. 부모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하여 진로 여행을 다녀온 날에도 학원에 갑니다. 토요일 학교에 가서 책을 읽고 싶지만 영어, 수학을 공부하기 위하여 학원을 향합니다. 그러면서 아이들 마음에는 수국처럼 상처가 나기 시작합니다.    


어른이나 아이들이나 참 살기 힘든 사회라고 이야기합니다. 경제가 어렵고, 교육이 어렵습니다. 그래서 우리 어른들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이 힘든 사회에서 살아가려면 주먹을 꼭 쥐고 열심히 달려야 한단다,” 맞는 말이기도 합니다. 아이들도 열심히 달려야 한다는 걸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도 고개를 푹 숙이고 말없이 책가방에 영어 수학책을 주워 담기 시작합니다. 하지만 열심히 달리기 위해서는 에너지가 필요합니다. 수국이 다시 살아날 수 있었던 것은 가을장마라는 에너지였습니다. 우리 아이들이나 어른들에게도 보다 잘 달리기 위해서는 에너지가 필요합니다. 저는 그 에너지가 ‘천천히 달려도 괜찮아’라고 토닥거려주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아이들에게 좀 천천히 달리라고 이야기해보세요. 그러면 아이들은 더 열심히 달립니다. 조금 부족해도 괜찮다고 이야기해보세요. 그럼 아이들은 무언가 채우기 위하여 가을의 금성처럼 눈빛이 반짝거립니다. 내 아이를 좀 더 잘나게 만들고 싶은 부모들의 성화는 아이들의 호흡을 가빠지고 만들며, 무기력이라는 절망이 가슴 한쪽을 차지하게 만듭니다. 부족해도 괜찮다는 토닥거림은 지나가는 가을바람에도 인사하게 만들며, 예쁜 꽃과 이야기하느라 지각을 할 수 도 있습니다. 하지만 결국 그 아이가 인생이라는 긴 마라톤에서 진정한 승자가 될 것입니다.    


어제 학교 스포츠클럽이 열리는 염주 체육관에 다녀왔습니다. 우리 학교는 남자, 여자 핸드볼 팀이 참가를 했는데, 체육관에서 울고 웃으며 뛰노는 그들의 모습이 바로 ‘행복’이었습니다. 행복이 체육관 바닥에 걸려 있었습니다. 좀 더 천천히 달리는 것은 이런 것입니다. 아이들에게 충분히 뛰놀아도 괜찮다는 시간과 기회를 제공하는 것입니다. 스포츠클럽처럼 우리 아이들에게 좀 더 천천히 달려도 괜찮다고 토닥거려주는 가정, 학교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아이스크림 하나 물고 가을 햇살 맞으며 활짝 웃는 그런 부모님, 선생님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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