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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성범 May 10. 2020

엄마의 팥죽

여름철이 다가오면 유난히 어린 시절 추억이 떠오릅니다. 그중에 마당에 멍석을 깔고 온 가족이 모여 저녁을 먹는 모습이 떠오르면 가슴이 먹먹해집니다. 참 아름다운 장면이었습니다. 마당 위에 멍석, 멍석 위에는 우리 가족, 우리 가족 머리 위에는 환한 달빛, 별빛이 비춰주고 있었습니다. 어쩌면 멍석이 아니라 별빛, 달빛을 깔고 저녁을 먹었습니다. 우리 가족 이야기가 깊어질수록 달빛은 배경 음악이 되어 주었으며, 별빛은 이야기의 무대였습니다. 가끔 심술쟁이 바람이 모깃불을 몰고 와서 한바탕 웃음꽃을 피웠습니다.  

  

어머니께서는 특별 메뉴로 팥죽을 해주셨습니다. 팥죽을 만들면서 가장 힘이 드는 것은 밀가루를 반죽해서 면을 만드는 것입니다. 밀가루에 물을 적당히 붓고 반죽을 한 후 주먹만 한 덩어리를 만듭니다. 그 덩어리를 병처럼 생긴 기구를 이용해서 납작하게 뻗어내면 피자 모양의 반죽 피가 만들어집니다. 반죽 피를 만들다가 힘들다고 도망가는 나를 보고 미소를 지으시던 환한 어머니 얼굴이 지금도 떠오릅니다. 그 당시의 모습을 다시 생각하면 가장 선명하게 떠오르는 장면은 어머님 이마에 맺힌 땀방울입니다. 그 당시에는 대부분 대가족이었습니다. 그 많은 가족이 팥죽을 먹기 위해서는 반죽 피를 만들고 또 만들어야 했습니다.    


사람의 기억에는 두 가지 시스템이 존재합니다. 하나는 이성적인 기억 시스템이고 다른 하나는 정서적인 기억 시스템입니다. 어머니가 팥죽을 만들면서 입었던 옷, 멍석, 달 등은 나의 이성적인 뇌의 기억 시스템에 저장이 됩니다. 반면 어머님이 음식을 만드시면서 흘리시던 땀방울, 팥죽을 먹었던 느낌은 정서적인 기억 시스템에 저장되어 있습니다. 이성적인 뇌의 기억 시스템에 기록된 내용은 시간이 지나면 사라집니다. 그 당시 어머님은 치마를 입으셨는데, 구체적인 모양이나 색깔은 떠오르지 않습니다. 내가 살았던 우리 집의 구체적인 모양도 많이 희미해져 갑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더욱 선명하게 떠오르는 것이 있습니다. 힘이 드셨는지 이마에는 땀이 흐르고 있었고, 나를 바라보는 두 눈에는 사랑이 가득하였습니다. 나의 정서 시스템에 기록된 어머니 모습입니다.     


몸이 아프면 어머니 음식이 생각납니다. 어머님 표 팥죽 한 그릇만 먹을 수 있다면 몸이 곧 나을 듯합니다. 가끔 지나가는 길에 팥죽집이 보이면 그냥 지나칠 수 없습니다. 팥죽 한 그릇을 비우고 나면 몸과 마음에서 새싹이 돋기 시작합니다. 내 몸 깊은 곳 어딘가에 어머님 팥죽이 기억되어 있나 봅니다. 곰곰이 필자의 마음을 들여다보니 팥죽과 함께 시루떡도 보입니다. 결혼해서 장성한 아들의 생일날 새벽, 몰래 시루떡을 현관 앞에 두고 가셨습니다. 내가 시루떡을 보았을 때 어머님은 이미 가시고 없으셨습니다. 잠을 조금이라도 더 자라는 배려였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날 이후 길가의 시루떡만 보면 괜히 눈물이 났습니다.     


우리 아이들도 어른이 되면 엄마가 만들어주신 음식을 떠올리며 필자처럼 이렇게 글을 쓰겠지요. 엄마의 음식이 아이 몸으로 들어가면 감정이 됩니다. 팥죽이 사랑이라는 감정으로 변하고, 시루떡은 미안함이라는 감정으로 변합니다. 그 감정은 정서라는 기억 시스템에 기록되어 우리 뇌 전체에 퍼져있습니다. 하지만 그 모습을 우리는 눈으로 확인할 수 없습니다. 다만 그 감정은 세상을 살아가면서 힘들고 지치면 ‘토닥토닥’이라는 얼굴로 나타납니다. 지친 발걸음을 옮길 수 있는 에너지가 되며, 포기하려는 마음에 회초리가 되어 나타납니다.

    

교문에서 아이들을 맞이하면 가끔 입을 오물거리는 아이들이 있습니다. 빵이나 과자 등을 먹으면서 등교하는 아이들입니다. 처음에는 군것질이라 생각했습니다. 아이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아침 식사라고 합니다. 엄마가 아침밥 대신에 용돈을 주었답니다. 그 용돈으로 과자를 사서 배를 채우는 아이들의 모습이었습니다. 교실에서 아침밥을 굶고 오는 아이들을 조사했습니다. 평균적으로 한 반에 5∼6명이었습니다. 아이들과 면담에서 아침밥을 굶은 기간이 꽤 오래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가족 전체가 모여서 식사하는 횟수를 조사해 보았습니다. 일주일에 한 번 이하도 상당수 있었습니다.    

 

모든 것이 전문화된 시대에 엄마가 음식을 꼭 만들 필요가 없습니다. 바쁜 직장 생활로 음식을 만들 시간도 부족합니다. 필자도 대부분 동의하는 내용입니다. 다만 걱정은 아이들의 유전자입니다. 아이들의 유전자에는 부모 이전 세대의 경험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부모 이전 세대에서는 엄마의 정성스러운 음식을 먹었습니다. 유전자 기록에는 엄마의 정성스러운 음식을 먹어야 몸과 마음이 건강하다고 적혀 있습니다. 기록에 없는 일들이 일어나면 아이들의 유전자는 불안에 떨게 됩니다. 불안하면 아이들의 신체 온도가 올라가고 감정이 흥분합니다. 아이들의 신체 온도가 올라가면 학교에서의 가르침이 들어오지 않습니다. 누군가 살짝 밀기라도 하면 뚜껑이 열리는 상태가 되어버립니다.  

   

깊은 잠에서 우리 몸을 깨우는 것은 무엇일까요? 연구에 의하면 아침밥이라고 합니다. 잠에서 일어나면 의식은 깨어있지만, 신체는 자고 있습니다. 이때 아침밥을 먹으면 우리 몸에서는 영양소를 분해하여 에너지로 만들고, 찌꺼기를 배설하게 됩니다. 신체가 잠에서 깨어나 활동을 하는 시작하는 것입니다. 만약 아침밥을 굶게 되면 어떻게 될까요? 잠을 자는 동안 우리 몸의 혈당치는 낮아져 있습니다. 잠에서 깨어나 몸을 움직이기 시작하면 뇌와 근육은 당을 소모하기 때문에 혈당치는 더욱 낮아집니다. 이때 탄수화물 등으로 당을 보충해주지 않으면 혈당 부족으로 쉽게 피로를 느끼고, 흥분을 잘하는 아이들로 변해 버립니다. 우리 아이들이 엄마의 정성스러운 아침밥을 꼭 먹어야 하는 이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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