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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성범 Jun 09. 2020

세상에서 가장 귀한 손님


이제 딸아이는 큰 인생의 강 앞에 마주하고 서 있나이다. 나는 그 강에 다리를 놓아줄 수도 없나이다. 대신 헤엄쳐 줄 수도 없나이다. 그저 바라옵건대 하느님, 저 어린 딸아이에게 언제나 절망치 않는 큰 용기와 인내를 주어서 그 강을 무사히, 끝까지 건너가게 도와주소서.    


故 최인호 작가의 『나의 딸의 딸』이라는 책에서 나오는 한 단락입니다. 이 책은 저자의 딸에 대한 사랑, 손녀에 대한 사랑의 기록이 절절히 묻어 있습니다. 이 책을 읽으면서 ‘자식’에 대한 의미에 대하여 많은 생각을 할 수 있었습니다. 이 책에 크게 공감하는 이유도 필자의 아이 때문이라 생각합니다. 필자의 아이도 지금 인생에서 중요한 시험공부를 하고 있습니다. 시험공부는 아이의 얼굴을 야위게 만들고, 그런 아이의 얼굴을 바라보는 부모의 마음도 야위어져 갑니다. 절망치 않는 큰 용기와 인내를 달라는 작가의 기도가 귀에 들리는 듯합니다.     


얼마 전 학부모님들과 ‘나에게 자식은 어떤 의미일까?’라는 주제로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어느 1학년 엄마는 “힘들어도 버티는 힘이 아닐까요”라고 대답을 해주셨습니다. 아무리 어렵고 힘든 일이 있어도 집에서 기다리는 아이를 생각하면 용기가 난다고 덧붙였습니다. 옆에서 가만히 듣고 있던 2학년 엄마는 “내가 살아가는 이유가 아닐까요?”라고 대답합니다. 아이들이 부모의 희망이므로 오늘도 열심히 살아가는 이유라고 말씀하셨습니다. 1, 2학년 학부모 대부분이 이와 비슷한 말씀들을 하셨습니다.    


3, 4학년 학부모들의 이야기를 들어보았습니다. 어느 학부모님이 “나의 두 번째 인생이 아닐까요”라고 대답을 하셨습니다. 두 번째 인생이라는 의미는 남편과의 결혼생활보다 자식 교육이 훨씬 어렵다는 의미였습니다. 보통 결혼을 제2의 인생이라 하지만 막상 아이가 초등학교 3학년이 되면서 세상 무엇보다도 가장 어려운 것이 아이들 교육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답니다. 그래서 아이를 교육한다는 것은 새로운 나, 즉 ‘두 번째 인생의 시작’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학부모님 말씀을 들으면서 저의 마음속에서는 미소가 살짝 흘렀습니다. 저의 마음은 이렇게 대답하고 있었습니다. “중학교 가보세요. 그럼 금방 제3의 인생이 시작된답니다.”   

 

5, 6학년 학부모들은 어떤 말씀을 하셨을까요? 대부분 말씀이 없으시고 빙긋 미소만 지었습니다. “솔직히 잘 모르겠어요. 아이를 어떻게 키워야 할지.” 어느 학부모님의 말씀에 이야기가 꽃을 피웁니다. “맞아요. 정말 모르겠어요.” “갈수록 힘들어요. 내 아이가 맞나 싶어요.” 고학년 엄마들은 벌써 많이 지친 모습입니다. 고학년 엄마들의 지친 모습은 모임 숫자를 비교해보면 금방 알 수 있습니다. 교육과정 설명회, 수업 공개에 빠짐없이 참석하던 학부모들이 아이가 고학년이 되면서 그 수는 급격히 줄어듭니다. 상담 주간이 되어도 상담 신청자 수가 많지 않습니다. 필자의 생각처럼 아이 교육에 정말 지쳤을까요?    


“이미 다혜는 내 자식이 아니라 자신만의 인격을 지닌 자유인이다. 나는 다만 아버지로서 그녀가 우리 곁을 떠날 때까지 잠시 맡아 기르는 전당포 주인에 불과하다.”    


故 최인호 작가의 나의 딸의 딸』에 나오는 자식에 대한 정의입니다. 최인호 작가님의 이야기를 읽으면서 자식이란 조물주가 잠시 나보고 맡아 기르라고 보내준 손님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세상에서 내가 만난 사람 중에 가장 귀한 손님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손님이 큰 꿈이 있었으면. 숙제를 스스로 했으면. 영어, 수학을 잘했으면. 친구가 많았으면. 주인은 손님에게 이런 욕심을 부리지 않습니다. 다만 손님을 위하여 집을 깨끗하게 하고, 맛있는 음식을 대접하고, 그분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 잘 들어주는 것이 주인의 역할입니다.    


어쩌면 우리 아이들이 빨리 지치는 이유는 아이들은 부모의 별이고 꽃이기 때문입니다. 별처럼 밝게 빛나야 하고, 꽃처럼 아름답게 피어나야 합니다. 1, 2, 3학년 아이들은 별과 꽃이 되기 위하여 열심히 노력합니다. 부모의 눈에 보일 정도로 배움이 성장합니다. 그래서 우리 아이가 혹시 영재가 아닐까?라는 착각이 들기도 합니다. 열심히 노력하는 아이를 보면서 부모는 더 많은 욕심을 부리게 됩니다. 더 예쁜 꽃이 되라고, 더 빛나는 별이 되라고 필요 이상의 물을 주게 됩니다. 아이들은 학년이 올라갈수록 점점 더 많은 것을 배워야 하며 점점 지쳐갑니다.    


필요 이상의 물을 많이 먹은 꽃은 고사가 됩니다. 아이들도 그렇습니다. 초등학교 저학년 시기에 아이들이 공부에 지쳐버리면 빠르면 4학년, 늦으면 중학교에 올라가서 아이들이 변하기 시작합니다. 학원을 빠지고, 공부와 담을 쌓고, 부모님께 반항하기 시작합니다. 이런 아이들을 보면서 부모님은 무엇인가 잘못되고 있음을 직감합니다. 책도 읽어보고, 이곳저곳 학부모 연수회에도 다녀봅니다. 학부모 연수회에서 배운 방법대로 아이와 소통하기 위하여 노력해도 결과는 신통치 않습니다. 우리 아이는 다를 줄 알았는데 그 무섭다는 중 2병이 시작되고 있다고 애써 위안을 얻습니다.

   

사실 중 2병이라는 것은 생물학적으로 존재하지 않습니다. 한국 사람의 화병과 비슷한 현상입니다. 화가 오랫동안 쌓이고 또 쌓이면 화병이 됩니다. 마찬가지로 중 2병은 불평, 불안, 두려움, 화라는 감정이 초등학교 시절 복합적으로 쌓인 결과입니다. 아이들의 마음에 감사, 배려, 충만, 기쁨과 같은 긍정적 감정이 쌓이면 아름다운 꽃, 빛나는 별과 같습니다. 초등학교 저학년에서 보았던 아이들의 모습입니다. 이 아름다운 꽃과 별에 부모, 학교의 욕심이 더해지면 아이들은 지쳐갑니다. 감사, 배려, 충만, 기쁨이라는 감정이 사라지고, 이 자리에 불평, 불만, 두려움, 화라는 감정이 아이들 마음에 자리를 잡습니다.    


99℃까지는 물의 성질이 변하지 않습니다. 마지막 1℃가 더해지면 액체에서 기체로 물의 성질이 변하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아이들은 99℃가 되기 전에는 잘 참아냅니다. 마지막 1℃가 더해지면 아이들이 변하기 시작합니다. 그것이 중 2병입니다. 생물학적으로 중 2병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그동안 쌓였던 감정의 폭발입니다. 물론 다른 책 등에서 제시하는 전두엽의 조절력 약화 등이 이 시기의 특징임은 부인할 수 없겠지요. 다만 필자가 강조하는 것은 감정의 쌓임입니다. 식물에 관한 책을 많이 읽으면 식물 분야에 대한 지식이 쌓이듯이, 감정이라는 것도 지식처럼 쌓인다는 것입니다. 뇌에서 바라보면 좋은 감정이던지, 나쁜 감정이던지, 지식이던지, 벽돌을 쌓듯이 차곡차곡 쌓아진다는 것입니다.    


중 2병을 막기 위해서는 아이를 조물주가 보내준 세상에서 가장 귀한 손님이라고 여겨야 합니다. 아이를 귀한 손님이라고 여기면 무엇이 달라질까요? 우선 손님이 무엇을 원하는지 들어볼 것입니다. 원하는 차와 음식을 대접할 것입니다. 손님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일 것입니다. 주인에게 귀한 대접을 받는 손님의 마음은 어떠할까요? 주인의 따뜻한 마음을 가슴 깊이 간직할 것입니다. 나중에 주인을 자기 집으로 초대하여 정성으로 보답을 하겠지요. 마찬가지로 아이들도 귀한 손님 대접을 받으면 부모에게 보답합니다. 힘들어도 더 공부하려고 노력하고, 책도 더 열심히 읽으려고 합니다. 아이들은 세상 누구보다도 부모님의 인정을 받고 싶기 때문입니다.  

  

아이들을 귀한 손님으로 여기면 엄마의 감정 온도가 낮아집니다. 귀한 손님에게 거친 목소리를 들려줄 수 없으므로 부드러운 말씨를 가꾸기 위하여 노력합니다. 귀한 손님에게 예쁜 미소를 보이기 위하여 노력합니다. 언짢은 행동이나 말에 불평이나 불만을 보일 수 있을까요? 그럴 수 없습니다. 우리 집에 조물주가 보내준 귀한 손님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주인의 예쁜 마음에 감동하여 손님도 잘하려고 노력합니다. 스마트폰 게임에 빠졌던 아이였는데, 이제 엄마가 보면 빙긋이 웃으면서 스마트폰을 닫습니다. 언제부터인지 책과 담을 쌓았는데 책상에 책이 펴져 있습니다. 달라진 귀한 손님의 모습을 보면서 주인은 행복합니다. 엄마의 감정 온도가 점점 낮아집니다. 아이를 진정으로 사랑하는 길은 귀한 손님으로 대접하는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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