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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크렘베어 Aug 06. 2022

미친 사람의 수염을 깎으며 면도하는 법을 익힌다

A barbe de fou, on apprend à raser

미친 사람의 수염을 깎으며 면도하는 법을 익힌다
(A barbe de fou, on apprend à raser(raire))


라틴어(=A barba stulti discit tonsor)로 오랜 세월 전해 내려온 속담이다.


속담을 처음 들으면 광인과 수염이 무슨 관계인가 싶지만, 다음과 같은 속설이 있다.

옛 로마의 이발사들은 면도 경험을 쌓고 싶어도 수염을 기른 사람을 수소문하여 연습하기가 힘들었는데, 어쩔 수 없이 동네의 광인들을 섭외하여 이발 연습을 했다는 것이다. 즉 이 속담은 어느 한 분야에서 대가가 되려면 그만큼 노력과 수고를 감수해야 한다는 뜻이다(아니 그럼 광인들의 인권은...).


플레시부레 성 당직실 천장화. 출처 : flickr Philippe_28


프랑스 맨에루아르(Maine-et-Loire) 지방에 위치한 15세기 성들 중 하나인 플레시부레 성(Château de Plessis-Bourré)을 방문한다면, 반갑게도 이 속담이 그려진 천장화를 볼 수 있을 것이다. 연금술사이자 이 성의 주인이었던 장 부레(Jean Bourré)는 성 안의 당직실 천장 전체를 헤르메틱 상징화로 장식해 놓았다. 그 중 연금술사가 가져야 할 자세에 대한 조언으로서 '시련'을 감내하라는 뜻으로 이 속담을 그려 놓았다. 그림 속 이발사가 광인 손님의 목 언저리에 칼을 대고 있어서, 속담을 몰랐다면 사람 죽이는 장면으로 오해할 수 있겠지만 말이다....


속담을 묘사한 그림은 아니지만, 비슷한 시기 신성로마제국에서 만들어진 놀이카드인 호펨터슈필(Hofämterspiel) 덱에도 비슷한 모양의 카드 그림이 있다. 4번 카드인 '이발사(Der Barbier)'이다.

Hofämterspiel 4번 카드, 이발사(Der Barbier). 1455년 전후 제작. 출처 : 위키


칼 든 이발사를 바라보는 손님의 표정이 겁에 질린 것처럼 보이는 게 재미있다. 사실, 이 시절 프랑스 이발사들은 다른 사람을 칼로 찔러 피를 낼 수 있는 행위가 법적으로 허용되어 있었다.


제5조 : 일요일과 주요 공휴일 등에 사혈하거나 찌르는 행위 이외의 이발사 업무를 하면 아니 되며, 벌금형에 처한다(따라서 이발사는 피를 낼 권리가 있다고 인정된다).
 - 1371년 12월 샤를 5세 칙령


이발사들이 의사처럼 약을 팔고 수술을 집도했다는 얘기는 널리 알려진 역사적 사실이다. 자르고 꿰매는 외과수술이 천한 것으로 간주되어 중세 대학의 귀족 의사들은 외과수술을 꺼렸고, 종교계도 그 유명한 "Ecclesia abhorret a sanguine(교회는 피를 혐오한다)" 금칙령으로 12세기부터 사제 의사들도 외과수술을 할 수 없게 되자 민간의 각종 수술은 칼 좀 다룰 줄 아는 이발사들의 몫이 되었다. 다음 세기에 성 고스마와 성 다미아노 형제회(Confrérie de Saint-Côme et de Saint-Damien)의 외과학교가 세워지는 등 이발외과의들은 점점 전문화되어 갔다. 근대 의술의 창시자 앙브루와즈 파레(Ambroise Paré, 1510~1590) 또한 이발사의 견습생 신분에서 출발해 왕실 주치의 자리에까지 올랐다.


18세기까지도 이발사들이 수술을 맡았었다니, 직업의 세계는 참으로 오묘하다.


 



참고자료 :

Marie Gatti. La querelle des barbiers, chirurgiens et médecins (XIIIe - XVIIIe siècles). 2014.

http://www.plessis-bourre.com/ 

https://www.darkstag.com/2628-2/ 

https://www.jstor.org/stable/pdf/310326.pdf 

https://www.medarus.org/Medecins/MedecinsTextes/divers_institutions/chirurgiens_barbiers.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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