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선의 충격과 개국의 굴욕 : 1853년 7월의 운명적 만남
1853년 7월 8일, 페리 제독이 이끄는 미국 동인도함대의 4척의 군함이 우라가 앞바다에 나타났을 때, 일본은 그야말로 천지가 뒤바뀌는 충격을 받았다. 검은 연기를 뿜으며 바다를 가르는 거대한 철제 군함들은 단순한 외국 선박이 아니라 일본의 세계관을 송두리째 흔드는 문명의 충격이었다. 이 순간부터 일본은 더 이상 예전의 일본이 아니었다.
당시 일본인들이 '구로후네(黑船)'라고 부른 이 군함들의 출현은 250여 년간 지속된 쇄국정책의 종료를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이 사건이 일본인들의 내면에 심어준 집단적 트라우마였다. "서양의 군사력 앞에서 우리는 무력하다"는 절망적 현실 인식이 바로 그것이다.
도쿠가와 막부의 대응은 전형적인 일본식 '방관적 합리주의'의 초기 형태를 보여주었다. 페리의 요구를 거부할 힘이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즉답을 피하고 시간을 끌며 체면을 유지하려 했다. "내년에 답변하겠다"는 막부의 대답은 결정을 회피하고 현실을 부정하려는 심리적 방어기제였다.
하지만 1854년 페리가 더 많은 군함을 이끌고 재내항했을 때, 일본은 더 이상 버틸 수 없었다. 가나가와 조약(일미화친조약) 체결은 일본 역사상 최초의 불평등조약 체결이었다. 영사재판권을 인정하고 최혜국대우를 부여하며 일본의 주권을 제약하는 굴욕적 내용이었지만, 막부는 이를 "개국"이라는 포장으로 국민들에게 설명했다.
이때부터 일본의 근대사는 "굴복을 근대화로 포장하는 역사"가 시작되었다. 서구 열강의 압력에 굴복한 현실을 인정하는 대신, "세계와 교류하는 문명국이 되었다"는 자기합리화가 시작된 것이다. 이런 왜곡된 역사 인식은 이후 150년간 일본 사회를 지배하는 근본적 사고틀이 되었다.
더욱 문제였던 것은 이 굴복의 경험이 일본인들에게 "힘이 곧 정의"라는 약육강식의 세계관을 각인시켰다는 점이다. 서구 열강이 일본을 굴복시킨 것처럼, 일본도 힘을 기르면 다른 나라를 굴복시킬 수 있다는 제국주의적 사고의 씨앗이 이때 심어진 것이다.
메이지 유신의 이중성 : 왕정복고라는 이름의 서구 모방
1868년 메이지 유신은 일본 근대화의 출발점으로 미화되고 있지만, 그 본질은 서구 문명에 대한 전면적 굴복이었다. "왕정복고"라는 복고적 슬로건으로 포장했지만, 실제로는 서구 문명을 맹목적으로 추종하는 "탈아입구(脫亞入歐)"의 길을 선택한 것이다.
메이지 정부가 내건 "부국강병"과 "문명개화"라는 구호는 겉으로는 자주적 근대화를 표방하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그 내용을 들여다보면 서구 열강과 같은 수준의 군사력과 문명을 갖춰 더 이상 굴복당하지 않겠다는 의지의 표현이었다. 즉, 피침략자에서 침략자로 전환하려는 야망이 숨어있었던 것이다.
가장 상징적인 것이 "화혼양재(和魂洋才)"라는 개념이었다. "일본의 정신은 유지한 채 서양의 기술만 받아들이겠다"는 의미였지만, 실제로는 정신적으로도 서구화에 매몰되면서 정작 일본 고유의 가치는 실종되었다. 서구 문명을 맹목적으로 추종하면서도 "우리는 정신만큼은 지켰다"고 자위하는 전형적인 자기기만이었다.
메이지 정부의 개혁 정책들을 보면 이런 이중성이 더욱 명확해진다. 폐번치현으로 봉건제를 해체하고 중앙집권국가를 건설한 것은 서구식 근대국가 모델을 그대로 복사한 것이었다. 지조개정으로 토지사유제를 도입하고, 징병제로 국민개병제를 실시한 것도 모두 서구의 제도를 이식한 것이다.
교육제도 개혁은 더욱 적나라했다. 1872년 학제 반포로 서구식 근대교육을 도입했지만, 그 목적은 "서구 열강과 대등한 문명국 국민"을 양성하는 것이었다. 일본 전통 문화나 동양 고전보다는 서구 학문을 우선시했다. 후쿠자와 유키치의 『서양사정』이 베스트셀러가 된 것은 당시 일본인들의 서구에 대한 열등감과 동경을 반영한다.
가장 굴욕적이었던 것은 불평등조약 개정을 위한 노력 과정이었다. 일본은 조약 개정을 위해 서구 열강이 인정하는 "문명국"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를 위해 로쿠메이칸을 건설하고 서구식 무도회를 열며, 일본 여성들에게 서구식 드레스를 입히고 서구식 예법을 가르쳤다. 서구인들에게 "우리도 문명인"이라는 것을 보여주려는 필사적 노력이었지만, 이는 오히려 문화적 굴복의 극치를 보여주는 것이었다.
문명개화의 허상 : 서구 모방주의와 전통 문화의 파괴
메이지 시대의 문명개화는 단순한 근대화가 아니라 일본 전통 문화에 대한 체계적 파괴 작업이었다. "서구화=문명화"라는 등식 아래 일본의 모든 전통적 가치들이 "야만"이나 "후진성"의 상징으로 폄하되었다. 이는 식민지도 경험하지 않고 스스로 자국 문화를 부정한 세계사적으로도 유례없는 현상이었다.
가장 극단적인 사례가 "폐불훼석(廢佛毁釋)" 운동이었다. 메이지 정부는 신토를 국교화하면서 불교 사원을 대대적으로 파괴했다. 1000년 이상 일본 문화의 중축 역할을 해온 불교 문화재들이 하루아침에 "구시대의 유물"로 치부되어 불태워지거나 팔려나갔다. 나라의 고후쿠지 5층탑이 25엔에 팔릴 뻔한 것은 당시 문화 파괴의 참상을 보여주는 상징적 사건이다.
언어 정책에서도 극단적 서구화가 시도되었다. 모리 아리노리 문부대신은 일본어를 폐지하고 영어를 국어로 채택하자는 주장까지 했다. 비록 실현되지는 않았지만, 이런 주장이 정부 고위직에서 공개적으로 제기된 것 자체가 당시 서구 숭배의 극단성을 보여준다.
건축과 의복에서도 전면적 서구화가 추진되었다. 전통 목조건축은 "화재 위험이 높고 비위생적"이라는 이유로 서구식 석조건축으로 대체되었다. 정부 관리들은 서구식 정장 착용을 의무화했고, 일반 국민들에게도 서구식 복장을 권장했다. 심지어 전통 상투를 자르고 서구식 단발을 하는 "단발령"까지 내렸다.
음식 문화에서도 "육식 장려"라는 이름으로 전통적 채식 문화를 부정했다. 메이지 천황이 직접 쇠고기를 먹는 모습을 공개해 "문명개화의 상징"으로 선전했다. 1000년 이상 불교 영향으로 육식을 금기시해온 전통이 하루아침에 "후진성의 상징"으로 바뀐 것이다.
이런 전면적 서구화 과정에서 일본인들의 정체성은 심각하게 흔들렸다. 겉으로는 "문명개화"를 자랑했지만, 내면적으로는 자국 문화에 대한 부정과 서구 문화에 대한 열등감이 뒤섞인 복잡한 감정이 형성되었다. 이런 심리적 갈등이 이후 극단적 국수주의와 서구에 대한 적개심으로 표출되는 원인이 되었다.
불평등조약과 치외법권 : 반주권국가의 굴욕적 현실
메이지 일본이 직면한 가장 현실적인 문제는 서구 열강과 맺은 불평등조약이었다. 1858년 안세이 5개국 조약을 시작으로 일본은 관세자주권과 사법권을 상실한 반주권국가가 되었다. 이는 식민지는 아니었지만 완전한 독립국도 아닌 애매한 지위였다.
가장 굴욕적이었던 것은 치외법권이었다. 일본 영토 내에서 외국인이 범죄를 저질러도 일본 법정에서 재판받지 않고 각국 영사관에서 재판받는 것이었다. 이는 일본의 사법주권을 완전히 부정하는 것이었다. 실제로 외국인들이 일본인을 살해하거나 폭행해도 솜방망이 처벌을 받거나 아예 무죄가 되는 경우가 빈발했다.
관세자주권 상실도 심각한 문제였다. 일본은 수입 관세율을 마음대로 정할 수 없었고, 대부분 5% 내외의 낮은 세율을 강요받았다. 이 때문에 서구 공산품이 대량 유입되어 일본의 전통 수공업이 몰락했다. 특히 면직물 산업의 타격이 심각해서 많은 농민들이 부업으로 하던 방직업을 포기해야 했다.
더욱 치욕적이었던 것은 최혜국대우 조항이었다. 한 나라에 준 혜택을 다른 모든 나라에도 자동으로 적용해야 하는 이 조항 때문에, 일본은 외교적 협상력을 완전히 상실했다. 서구 열강들은 서로 경쟁적으로 일본에서 이권을 확보했고, 일본은 이를 거부할 수 없었다.
일본 정부는 이런 굴욕적 현실을 국민들에게 숨기려 했다. 조약 개정 협상 과정도 비밀리에 진행했고, 외국인의 치외법권 행사 사실도 가능한 한 축소 보도했다. 대신 "개국으로 인한 문명 발전"만을 강조했다. 이는 불편한 현실을 부정하고 긍정적 측면만 강조하는 전형적인 일본식 자기기만의 출발점이었다.
조약 개정을 위한 일본의 노력은 처절했다. 이토 히로부미, 이노우에 가오루 등이 유럽을 순방하며 조약 개정을 요청했지만 번번히 거절당했다. 서구 열강들은 "일본이 아직 완전한 문명국이 아니다"라는 이유로 개정을 거부했다. 이때 일본인들이 느낀 굴욕감과 분노는 이후 서구에 대한 적개심의 원천이 되었다.
결국 치외법권 철폐는 1894년, 관세자주권 회복은 1911년에야 가능했다. 무려 40-50년간 반주권국가의 굴욕을 감내해야 했던 것이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일본은 "힘이 없으면 당할 수밖에 없다"는 약육강식의 논리를 체화했고, 이는 이후 다른 나라에 대한 침략의 명분으로 작용했다.
정한론과 침략 의식의 태동 : 피해자에서 가해자로의 전환
메이지 유신 직후부터 일본 내에서는 "정한론(征韓論)"이 대두되기 시작했다. 조선을 정벌해야 한다는 이 주장은 단순한 영토 확장 욕구를 넘어 서구 열강에게 굴욕당한 일본이 자존심을 회복하려는 심리적 보상 기제였다. 서구에게는 굴복했지만 아시아에서는 우위를 점하겠다는 왜곡된 자존심의 발로였다.
정한론의 대표적 주창자인 사이고 다카모리는 조선이 일본의 국서 접수를 거부한 것을 "무례"라고 규정하며 무력 정벌을 주장했다. 하지만 이는 전형적인 강자의 논리였다. 일본 자신도 250년간 쇄국정책을 유지했으면서, 조선의 쇄국정책은 "무례"라고 단죄한 것이다.
더욱 문제가 되는 것은 정한론의 명분이었다. "조선을 문명화시켜주어야 한다", "서구 열강의 침입으로부터 조선을 보호해야 한다"는 논리였다. 이는 훗날 대동아공영권 이데올로기의 원형이 되는 사고방식이었다. 침략을 "선의"로 포장하고 "아시아 해방"을 명분으로 내세우는 자기기만적 논리의 출발점이었던 것이다.
1873년 정한론 논쟁에서 이와쿠라 도미시 등 온건파가 승리하면서 즉각적인 조선 침입은 보류되었다. 하지만 정한론 자체는 사라지지 않고 일본 사회에 내재화되었다. "아시아에서는 일본이 맏형"이라는 의식, "후진적인 아시아 국가들을 일본이 이끌어야 한다"는 사명감이 형성된 것이다.
이런 의식은 1875년 강화도 사건으로 현실화되었다. 일본은 의도적으로 조선 연안에서 도발 행위를 벌이고, 조선군의 대응을 빌미로 무력시위를 벌였다. 그리고 이를 통해 1876년 강화도조약(조일수호조규)을 강요했다. 이 조약은 일본이 서구 열강에게 강요받은 불평등조약을 그대로 조선에 적용한 것이었다.
강화도조약의 내용을 보면 일본의 이중성이 극명하게 드러난다. 치외법권, 관세 특혜, 개항 강요 등은 모두 일본이 서구로부터 당한 굴욕을 그대로 조선에게 전가한 것이었다. 서구에게는 굴복하면서 조선에게는 똑같은 굴욕을 가하는 것이야말로 전형적인 "강자에게 약하고 약자에게 강한" 일본인의 이중적 성격을 보여준다.
이때부터 일본의 대외관계에는 근본적 모순이 생겼다. 서구 열강과는 "문명국" 대접을 받기 위해 굽실거리면서, 아시아 국가들에게는 "문명의 선도자" 행세를 하는 이중적 태도였다. 이런 모순된 자세는 이후 일본 외교의 고질적 문제가 되었고, 결국 파멸로 이어지는 길의 출발점이 되었다.
대동아공영권 이데올로기의 형성 : 침략을 정당화하는 논리
1930년대 후반부터 일본이 내세운 "대동아공영권" 개념은 일본 역사상 가장 정교하고 치밀하게 구성된 침략 이데올로기였다. 표면적으로는 "아시아를 서구 제국주의로부터 해방시키고 공동번영을 이룩한다"는 숭고한 이상을 내걸었지만, 그 본질은 일본의 아시아 지배를 정당화하는 자기기만적 논리에 불과했다.
대동아공영권의 이론적 토대는 1940년 고노에 후미마로 내각이 발표한 "기본국책요강"에서 찾을 수 있다. 여기서 일본은 "황국(皇國)"으로서 아시아 민족들을 지도할 천부적 사명을 가지고 있다고 선언했다. 천황을 정점으로 하는 "일본 정신"이 아시아 전체를 이끌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는 종교적 신념에 가까운 광신적 이데올로기였다.
더욱 정교한 것은 "대동아공영권"의 지정학적 구상이었다. 일본을 중심으로 만주국, 중국, 동남아시아, 인도까지 포함하는 거대한 경제권을 건설한다는 것이었다. 각 지역은 "적재적소"의 원칙에 따라 역할 분담을 하고, 일본이 이를 총괄 지휘한다는 구조였다. 일본은 고도기술과 중공업을, 만주는 중화학공업을, 중국은 경공업과 농업을, 동남아시아는 원료 공급을 담당한다는 식이었다.
하지만 이런 "역할 분담"의 실상을 보면 노골적인 수탈 구조였다. 일본이 고부가가치 산업을 독점하고, 다른 지역들은 저차원적 1차 산업이나 원료 공급에만 머물게 하는 것이었다. 이는 서구 제국주의의 식민지 경제 구조와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았다. 오히려 "공동번영"이라는 미명으로 포장한 만큼 더욱 기만적이었다.
대동아공영권의 문화적 측면도 마찬가지였다. "일본 정신"의 전파를 통해 아시아 민족들을 "황국신민"으로 만든다는 것이었다. 각 민족의 고유 문화는 "지방색"으로 격하되고, 일본 문화가 "보편적 가치"로 군림하는 구조였다. 조선에서 창씨개명과 신사참배를 강요한 것이 대표적 사례다.
가장 기만적인 것은 "서구 제국주의 타도"라는 명분이었다. 일본은 자신의 침략 행위를 "아시아 해방"으로 포장했다. 하지만 실제로는 서구 제국주의를 일본 제국주의로 대체하려는 것에 불과했다. 서구 열강이 철수한 자리에는 어김없이 일본군이 들어섰고, 서구 자본가들이 떠난 자리에는 일본 기업들이 들어섰다. "해방"이 아니라 "지배자 교체"였던 것이다
침략 전쟁의 자기합리화 : 성전(聖戰)이라는 이름의 폭력
일본이 1937년 중일전쟁을 시작하면서 내세운 명분은 "성전(聖戰)"이었다. 이는 단순한 전쟁이 아니라 "동양평화"와 "세계평화"를 위한 거룩한 전쟁이라는 의미였다. 침략 전쟁을 종교적 차원으로 승화시켜 일본인들의 죄책감을 지우고 희생정신을 고취시키려는 교묘한 이데올로기적 조작이었다.
"성전" 개념의 핵심은 일본의 전쟁을 "사사로운 이익을 위한 전쟁"이 아닌 "공적 대의를 위한 전쟁"으로 규정하는 것이었다. 정부와 언론은 끊임없이 "일본은 영토나 배상금을 원하지 않는다", "오직 동양평화만을 위해 싸운다"고 선전했다. 하지만 실제로는 중국의 자원과 시장을 차지하기 위한 철저히 현실적인 침략 전쟁이었다.
더욱 정교한 것은 "자위권 행사"라는 논리였다. 루거우차오 사건을 계기로 확전된 중일전쟁에서 일본은 "중국의 도발에 대한 정당방위"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루거우차오 사건 자체가 일본군의 의도적 도발이었고, 중국 영토에서 일본군이 "자위권"을 행사한다는 것 자체가 모순이었다. 침략자가 자신을 피해자로 둔갑시키는 전형적인 가해자 논리였다.
태평양전쟁 개전 시에는 더욱 거창한 명분이 등장했다. "대동아 해방 전쟁"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된 이 전쟁은 "서구 제국주의로부터 아시아를 해방시키는 거룩한 전쟁"으로 선전되었다. 진주만 기습공격도 "미국의 아시아 침략을 저지하기 위한 선제공격"으로 정당화되었다.
하지만 실제 전쟁 수행 과정을 보면 이런 명분들이 얼마나 허위였는지 알 수 있다. 동남아시아에서 일본군은 서구 식민 정부를 축출한 후 자신들이 그 자리를 차지했다. 현지 민족들에게 독립을 허용하지 않았고, 오히려 더 가혹한 수탈을 자행했다. 태국의 쌀, 미얀마의 석유, 인도네시아의 고무 등이 모두 일본으로 실려갔다.
가장 참혹했던 것은 점령지에서의 학살과 강제노동이었다. 난징대학살, 마닐라 학살, 싱가포르 화교학살 등은 "성전"과는 정반대의 만행이었다. 수백만 명의 아시아인들이 일본의 "아시아 해방 전쟁"의 희생양이 된 것이다. 조선과 중국에서 강제동원된 노동자들과 위안부들의 참상은 "공동번영"이라는 명분이 얼마나 가증스러운 거짓말이었는지를 보여준다.
일본 정부는 이런 현실을 철저히 은폐했다. 국내 언론은 전쟁의 참상을 보도하지 않았고, 대신 "성전 완수"와 "대동아 건설"의 이상만을 선전했다. 일반 국민들은 자신들이 "정의로운 전쟁"을 하고 있다고 믿었고, 이런 믿음이 전쟁을 지속시키는 동력이 되었다. 침략 전쟁을 성전으로 포장하는 이데올로기적 기만이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를 보여주는 역사적 사례였다.
결국 대동아공영권은 처음부터 끝까지 일본의 아시아 지배를 정당화하려는 이데올로기적 허구에 불과했다. "아시아의 해방"을 내세웠지만 실제로는 "일본에 의한 아시아 정복"이었고, "공동번영"을 약속했지만 실제로는 "일방적 수탈"이었다. 이런 자기기만적 논리는 결국 일본 자신의 파멸로 귀결되었다. 1945년 8월 15일 패전과 함께 대동아공영권의 환상도 산산조각 났지만, 그 잔재는 여전히 일본 사회 곳곳에 남아있다.
이것이 바로 "메이지의 그림자"가 만들어낸 "대동아공영의 환상"이었다. 근대화라는 이름의 굴복과 침략자의 자기기만이 결합되어 만들어낸 일본 근현대사의 가장 어두운 그림자였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