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이(1)

화구통을 맨 그녀

by 여림

윤, 허윤.


이름이 뭐예요 라고 물어봤을 때, 그녀는 고개도 돌리지 않은 채 딱 저렇게 대답했다. 윤 쉬고 허윤.


만난 지 약 9시간 만이었다. 그녀의 이름을 알게 된 것은. 두 번째 키스가 끝나고 고개를 채 들지도 못하던 그녀는 부끄러운 듯 몸을 돌려 집으로 들어가려 했고, 그런 그녀를 쭈뼛거리며 떠듬거리기만 하던 나의 몸은 어쩔 줄을 몰라하다 겨우 입 하나를 뗐는데 그 입을 관통해 나온 질문이 바로 그녀의 이름에 대한 것이었던 것이다.


윤, 허윤.

나도 그녀를 따라 그녀의 이름을 나직이 불러보며 괜스레 흥분되는 마음을 지그시 누른 채 어두운 밤 골목을 천천히 내려왔다. 우리가 다음에 또 만날 수 있을까 라는 생각이 잠시 스치긴 했지만 그런 건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듯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절로 들썩거리는 어깨를 그대로 느끼며 그렇게, 컴컴한 골목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형, 이게 뭐예요?


어떤 녀석의 전시회를 보러 가기로 한 선배형과 나는 종로통 어딘가의 버스정류장에서 만났다. 형은 내 다리 길이 만한 거대한 액자(로 추정되는)를 신문으로 싸고 그것을 다시 노끈 따위로 십자 묶음을 지은 물건을 나에게 건넸다. 물론 네가 이것을 들으라는 뜻이었고 나도 그것을 거부할 생각은 없었다. 정오가 한참 지난 오후 3시쯤 되는 시간이었지만 햇빛은 뜨거웠고 원래 종로통은 후덥 한 곳이므로 땀이 삐질삐질 났는데 마침 도착한 버스에 사람이 한가득이었다. 다음 버스를 기다린다고 해서 달라질 상황은 없었기에 선배형과 나는 이 버스에 몸을기로 했는데 하필이면 친절 치도 않은 운전기사 아저씨 덕분에 난 거대한 물건을 든 손의 반대편 손으로 겨우 교통카드를 꺼내 그것을 단말기에 대자마자 버스가 급출발해버리는 아찔한 순간을 겪어야 했다.


어어어어.


교통카드를 쥔 손, 나머지 한 손은 아무 여유가 없었으므로 교통카드를 쥔 손의 남은 여백으로 난 어떤 기둥의 가장 높은 곳에 손을 짚었고 가까스로 넘어지는 사태는 면할 수 있었다. 조금 전에만 해도 얼굴 주변에서만 삐질 거리던 땀이 속옷까지 흠뻑 적시고 있음은 그리 기분 좋은 일은 아니었다. 아무튼 버스는 달리기 시작했고 우린 아직 내릴 정거장이 많이 남았기에 비좁은 사람들 틈을 헤쳐 버스의 뒤쪽으로 몸을 옮겼다. 휴. 겨우 손잡이를 잡고 액자를 내 무릎에 살짝 기대 놓고서야 손의 해방감을 느낄 수 있었다. 선배형과 내가 나란히 서있을 만큼의 공간은 없었으므로 우리는 서로 등을 진 채 반대편 창밖을 쳐다보며 목적지로 향했고 그렇게 무심히 창밖을 보며 대체 종로는 왜 이리 사람이 많은가를 아주 잠깐 생각하다 곧 배가 고파옴을 느끼고 이어 주머니에 얼마가 있더라로 생각을 옮기는 중이었다.


저 주세요.


반사적으로 네?라고 물었다. 내 무릎 앞에 액자, 그러니까 이 액자 앞에 앉아있던 사람이 긴 머리의 하얀 얼굴을 가진 소녀일 것이라고는 생각도 못한 터였다. 그녀는 손을 내밀고 있었다. 네? 내 무릎에 기대진 액자에 대한 손짓임을 알고 있었지만 그 어떤 경황도 없었고 그저 몸이 반응하는로 네? 만 연신 하는 것이었다.


제가 들어드릴게요. 저 주세요.


나의 무릎 앞에서 자신의 무릎 앞으로 액자를 옮겨내자는 이야기였다. 아아- 천사 같은 그녀, 바보 같은 나. 난 지금에서야 생각이라는 것을 해야 했다. 잠시 후에 삼각김밥을 먹을 것인지, 거기에 사발면을 추가해 먹을 것인지, 그렇다면 그건 튀김우동이 좋을지 육개장이 좋을지를 고민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에서야 제대로 된 생각이라는 것을 해야 했다. 내가 이렇게 부끄러움이 많은 사람이었나? 그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괜찮다고 괜찮습니다 하며 몸이 반응하는 것을 제어하지 못한 채 그저 그녀에게 무안만 주는 몸짓을 해댄 것이었다. 몇 번의 호의를 거절했음에도 그녀는 다행히 생긋 웃으며 고개를 돌렸고 그 생긋 웃음이 뭘 의미하는 걸까 하며 나는 이제야 다시 생각에 빠지게 되는 것이었다. 혹시 그녀가 나를 마음에 들어하는 건가? 지금 내가 힘들어 보였나? 아닌데, 나 지금 별로 안 힘들었는데. 버스를 탈 때는 힘들었지만 몇 정거장 지나오는 동안 쭉 편안했잖아? 혹시 그녀가 나를 마음에 들어하는 건가? 아, 예쁘다. 무슨 말이라도 걸고 싶다. 연락처라도 물어볼까? 나 몇 정거장 남았지? 하는 새 버스는 계속 어디론가 달렸고 어느덧 그녀는 고개로 내게 인사를 건네는 듯 혹은 아닌 듯, 하지만 다시금 생긋 웃으며-아아 보조개가 예쁘다-라는 글자를 내 머리에 남긴 채, 그렇게 버스에서 내려버렸다. 창밖을 통해 본 그녀의 뒷모습에는 그녀와 너무나 잘 어울리는 예쁜 화구통 하나가 매어져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