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이(2)

고흐의 해바라기

by 여림


형! 아까 그 여자 봤어요?!


그녀가 내린 정거장은 고작 우리가 내릴 정거장의 직전 정거장이었다. 난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가쁜 숨을 몰아쉬며 선배형에게 쫑알대기 시작했다.


글쎄 이걸 들어주겠다고 했다니까요?


그녀가 날 좋아하는 게 틀림없다고 신이 나서 한참을 떠들었으나 선배형은 에구 너 참 귀엽다는 애석한 표정만을 지을 뿐 대꾸조차 하지 않았고, 그런 형의 시선을 의식하면서도 난 의기양양함을 감추지 못한 채 싱글벙글 혼자서 어깨춤을 춰대는 것이었다.


다 왔다.


아, 더 신나고 싶은데. 아쉬운 마음이 들긴 했으나 사실 별 수 없는 에피소드에 불과하다는 것을 나도 잘 알고 있었기에 선배형의 뒤를 따라 전시장으로 들어섰다. 기계와 쇠가 부딪혀 내는 쨍-하는 소리로 가득한 문래동 한쪽 켠에 예술인들이 자리 잡은 지도 이제 꽤 시간이 흘렀다. 이것도 나름의 볼만한 광경인지라 언젠가는 구경 오는 사람들도 더러 있었던 것 같은데 지금은 마치 남해의 다도해처럼 째깐한 섬들이 저마다의 섬에서 머물러 있는 그림이랄까. 풍월로만 듣던 외롭고 가난한 예술쟁이들을 풍경으로 맞이하는, 한적하고도 쓸쓸한 섬 숲. 우린, 그 숲의 한 섬에 들렀다.


어-왔어요?


드문드문 어떤 사람들은 그림을 보고 있었고 그 사람들에게 그림을 설명하던 어떤 녀석은 우리와 눈이 마주치자 금세 다가와 인사를 건넸다. 축하한다는 인사를 하고 휘익허니 나도 그림들을 둘러본다. 내가 뭘 볼 줄 알아야지. 그런데 대체 뭘 볼 줄 알아야 하는 걸까 라는 생각을 할 때쯤 뭘 이런 걸 가져왔냐는 녀석의 말이 들린다. 그러고 보니 대체 그게 뭐였던가 싶었던 나는 내 다리 길이만 한 그놈을 풀어 헤치는 선배형 곁으로 가서 그 물건을 쳐다봤다. 선배형이 풀어헤친 신문지 사이로 보이는 익숙한, 그림 전시장에 와서 뭘 봐야 할지도 모르는 나에게 조차 익숙한 그 그림은 바로 고흐의 해바라기였다.


엇, 고흐네.


녀석은 좋아하는 듯 실망하는 듯 혹은 의아해하는 듯한 반응을 보였는데 그것은 꽤나 적절해 보였다. 나조차 그랬으니까. 누군가의 전시장에 남의 그림을, 그것도 너무나 유명한 남의 그림을 가져오다니. 이 형 뭐야 라는 생각이 들었는 찰나, 선배형의 말은 더 가관이었다.

어차피 다들 꽃 사 올 거 아냐? 이게 어지간한 꽃보다 낫지.


아아-그럴듯해. 어차피 버려질 꽃을 사 오느니 유명화가의 그림 속 꽃이 훨씬 낫다는 논리다. 너무 논리적이야, 반박할 수가 없네. 선배형은 넉살 좋게 그림을 선물하면서 자신의 집이 예전에 꽤 잘 나갈 때, 그래서 집이 꽤나 컸을 때 거실에 떡하니 걸려있던 그림인데, 아버지 사업이 망하는 그 어떤 전형으로 아주 좁은 집으로 이사를 가게 됐고 덩달아 방치되어있던 이 그림이 앞으로도 계속 방치될 전망으로 보여 이럴 바에 그림을 그리는 녀석이라도 줘야겠다 싶어 가져왔다는 것이었다. 허허 고마워요. 어차피 가난한 예술쟁이의 곁에 가난한 녀석들이 들러붙어 서로를 격려하고 위로하는 자리이니 주고받는 물건들에 어떤 기대도 없음은 물론, 녀석도 크게 실망할 거 까진 없어 보였다. 나는 여기에 또 넉살 좋게 이거 어디 걸면 되냐? 하며 고흐의 해바라기 액자를 들고 녀석의 그림 여기저기에 대보는 장난을 쳤고 구경하던 사람들은 깔깔거리며 웃어주었다.


그렇게 내 다리 길이만 한 놈을 이리저리 대보며 이제야 이 전시장이 나에게 의미 있는 공간이 된 것인 양 놀고 있는데 아아-울렁대는 이 심장. 우리가 올라왔던 계단 쪽, 그러니까 이 전시장에서도 가장 우중충한 그곳에 한줄기 빛이 스며드는데 그 빛의 주인공은 바로바로바로! 조금 전의 그 화구통을 맨 소녀가 아니던가. 난 내 다리 길이만 한 놈을 엉거주춤하고 들고 있다 그녀를 발견하고는 순간 일시정지가 돼버렸고, 그녀는 그런 나를 바라보고는 또 쌩긋 웃으며 자신의 앞머리를 스윽 귀 뒤로 넘기고는 살짝 패인 보조개를 또. 이어 고개를 살짝 끄덕이며 내게-나만 알아채도록-아는 체를 하는 거였다.


어-왔어?


어-왔어? 라니. 오 마이 갓. 너희 아는 사이야? 고마워. 눈물이 난다. 난 그녀를 마치 오랫동안 헤어졌던 오누이 혹은 조금 착각을 더해 연인을 만난 듯-물론 혼자-감격에 겨워했다. 아 그런데 나는 왜 자꾸 그녀를 만날 때마다 바보 같은 모습인 걸까. 엉거주춤 들고 있던 그림을 빠르게 치우고는 어색하지만 다른 방도가 없었으므로 다시 그림을, 그것도 뭔가 아는 게 있는 것처럼 감상을 하기 시작했다. 뒤편에서 들려오는 그녀의 웃음소리가 내 목덜미를 간지럽히는 듯했고, 그녀의 시선이 내 등 곳곳에 닿는 듯했다. 적절한 시간 간격을 두고 그림을 옮겨가며 감상을 하는 척했으나 실은 어서 녀석이 나를 그녀에게 소개를 해주길 원했고, 하지만 그러면서도 대체 어떻게 인사를 나눠야 할지를 심각하게 고민하는 것이었다.